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분되기에 그것은 회심 후에 따라오는 경험이며, 그 첫 번째 육체적 증거는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선조들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이미 거듭난 신자들에게성령세례’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그리고 오순절 사건인 사도행전 2장과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역사( 8),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와( 10),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 받은 일을 내세우며( 19), 이러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도 먼저 거듭나고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삶속에서 오순절과 같은 ‘이차적 체험’ 즉 ‘제2의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어야 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능력을 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보통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의 전제 조건이 ‘회심’이라고 말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지만 일단 회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조건들,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죄와의 결별과 회개’, ‘순종과 기도’, 그리고 ‘인내와 믿음’ 등이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회심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한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세례’란 새 시대를 여는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 이후 신자 개개인의 삶속에 회심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지 그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속으로 유입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다르게 중생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며 구원 이후에 오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을 ‘성령충만’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묘사적 본문, 즉 서술적 본문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서술적 본문들을 교리로 근거 삼는 것을 기피하고 오히려 교훈적 본문들, 즉 일반적인 바울의 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벤자민 B. 위필드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칼빈은 오늘날 논쟁이 심한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주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 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냈을 때에만 성령으로 베푸신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해 둔다. 그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며 또 마찬가지로 날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는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중생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사건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넬료가 그리스도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음에 틀림없다.   쉽게 말하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중생의 영’이기보다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부가적인 ‘성령의 은사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3:2),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내려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처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을( 2:38/주석), 구원의 은혜보다는 ‘은사’로 해석하고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을 제외한 네 번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구원 이후에 받는 ‘제2의 축복’, 즉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이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영’으로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고전 12:3), 다른 하나는 Anthony D. Palma가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력 있는 증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증인들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 이외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영적인 은사와 기사와 이적을 베풀게 하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능력과 은사의 영’을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순절주의자들과 칼빈이 같은 점이 있다면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는 은사들을 동반하는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빈은 사도행전에 일어난 성령사건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2:38/주석), 오순절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The Sovereign Spirit』에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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