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은 영적인 선물들이나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질 때마다 다양성과 사랑과 겸손을 포함하는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롬 12:5-10, 고전 12-14장, 엡 4:1-16, 벧전 4:7-11),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3),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롬 12:5), 구절에 대해 Gordon D. Fee는 말하기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적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은(엡 4:7, 11-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약 1:17), 아낌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때 고린도 교회처럼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시기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10-13, 3:3).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고(딤후 3:16-17),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기준은(벧후 1:20-21), 마땅히 받아들여할 확실한 것이지만(계 22:18-19),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중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3:8), 여기서 쓰인 ‘프뉴마’라는 단어는 문맥상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고 신비로우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이나(요 1:12-13), ‘성령충만’(행 2:4, 4:8),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들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할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깊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묘한 일들은 하나님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신 29:29),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신앙 형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고전 12:11), 임하기 때문에 매우 신비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Craig S. Keener는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에서 “성령 사역의 모든 차원은 회심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 이후에 성령의 여러 가지 또 다른 면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에 대한 확실한 안내를 이렇게 제공합니다.  “그 능력을 덧입는 경험을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면 물세례를 받을 때 경험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특별한 역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좀 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겠지만 주님은 분명 ‘성령세례’라는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분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요 17:22).  J. I. Packer는 이러한 논쟁을 두고 “성령세례와 계속되는 은사들, 성령의 현재적 현현들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신학적 사고 안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안에 계속해서 도전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적절하게 세우는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학을 예외적인 몇몇 경우들을 기반으로 세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폭넓게 신학적으로 잘 설명된 문맥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Sam Storms가 말한 것처럼 개혁/복음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 때 성령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종종 극적인 성령체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점에서는 그르다고 볼 수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에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성령과의 만남의 실재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이런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다고 볼 수 없고 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눅 1:41, 67, 행 4:31, 7:55, 13:9).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신자의 회심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결코 성령의 활동을 회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신약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다양한 이후의 경험을 인정하며 권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놓고 서로 간의 견해를 나누는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든 싫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영적 형제들입니다(고전 12:13). Richard B. Gaffin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의 공통된 연합에 대한 관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자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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