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성경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먼저 테스트를 '문법적'으로 즉, 단어의 어원, 특히 동사나 명사 등의 각종 변화형과 문장 구문론 등의 문법적 요소와 문학양식, 문맥구분, 저자의 문체 등을 분석하여 문자기록의 해석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텍스트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것은 주관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막아줍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인데 이 단계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주석하고 텍스트 의미를 밝혀주는 신학을 세우는 작업으로 해석 대상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방법입니다이러한 해석론을 기초로 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고전 4:6), 사도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각 사람들이 해석하는데 있어 일치된 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단 신학에 입각해 성령세례에 대한 어떤 정의들을 내릴 때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나 강도,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결과는 받는 자가 믿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음에 얼마나 합당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Walter C. Kaiser는 “성경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경험을 처음 기록된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성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W.T. Conner는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분명하게 성령의 사역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되는 무엇가를 논하고 있다”

 

사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고전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그들(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 언급된 유일한 두 가지 적극적인 명령, ‘성령을 따라 행하라’( 5:16, 25)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5:1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현재 시제로 신자가 이미 맺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암시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호소나 명령은 없고 반면에 에베소서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성령세례는 하나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이 사도행전 15절과 217(주석)에서, 그리고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를 경험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들 중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개념적 오류들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개념을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그분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대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해서 경험의 진실성을 무시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을,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에 대해 서로 강하게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살전 4:8), 주어진다고(전치사 ‘엔’ 대신 ‘에이스’ 현재 시제의 사용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성령이 진행 중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강조) 말한 것처럼 성령론은 완성되지 않는 과정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서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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