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시 119:68), 그분이 창조한 만물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악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악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물리적인 악”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도덕적인 악”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악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창 3:1-15, 마 15:18-20).  이 세상 안에 있는 악과 고난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스 9:15),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고(이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필수적인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숫한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선한 하나님과(합 1:13), 창조 세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악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악이 부정되는 곳에는 더 이상 구원도, 가치규범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롬 5:21), 결국엔 인간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를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는(사 45:7),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악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자주 언급하지만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문의 ‘라’(ra)가 악과 악의 결과, 즉 악행과 그 결과를 망라하여 뜻하는데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용된 ‘짓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bara’로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서 절대적 창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는(애 3:38), 반면에 그분은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시고(신 32:4),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합 1:13), 시편 5편4절에서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은 아이러니하게 악한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 하지만(삼하 16:11, 왕상 22:20-23), 또 다른 한편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호 9:15),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욥 34:10-12),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잠 8:7).

 

초기 교회 시대의 이단 마르시온은 이 구절을(사 45:7), 근거로 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미치광이들은 악이란 말을 놓고 왜곡하여 마치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 즉 죄를 만드신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야의 본절을 얼마나 어리석게 오용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에 속하는 재앙의 조성자일뿐 범죄에 속하는 악의 조성자는 아니라는 통상적인 구분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사건의 조성자이시다”라고 합니다.  칼빈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악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악 같은 것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Heinrich Ott는 이 세계 안의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 한계의 질문으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G. Gutierrez는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에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결국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인간의 신학적 개념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그 지식에서 작용되는 논리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분으로(롬 11:33-34, 고전 1:25),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사 55:8),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처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시며(욥 13:6),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렘 32:19).  Herman Bavinck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시면서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면서 자녀에게는 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는 아니시지만 그 어떤 재난도 그분의 주권적 뜻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욥 1-2장, 암 3:6), 만약 우리가 이 상충적인 양 진리를 무리하게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라고 한 Louis Berkhof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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