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 부흥강사인 Todd Bentley가 Florida Lakeland에서 “사도 임명식” 받는 장면을 2008년에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Peter Wager를 비롯해서 그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인 Rick Joyner, Che Ahn, Bill Johnson, John Arnott, Chuck Pierce 외 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특이하게 본 것은 여성 선지자로 알려진 Stacy Campbell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언하는 장면과 Bentley의 안수를 통해 Che Ahn 부부가 쓰러져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었는데 물론 이런 경우에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쓰러져서 떤다고 해서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같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 John Wesley, George Whitefield, Charles Finney와 같은 사람들이 집회할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한 것은 John Stott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들에게 행해진 임명식이 과연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했느냐는 것입니다(행 1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역자의 열매로(마 7:15-20), Bentley는 본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사역을 했던 아시아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지금도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 없고 다른 직임, 즉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다시 말해 이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될까요?  바로 뒷 절에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라고 말합니다(엡 4:13).  환언하면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10).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몸으로(엡 4: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벧전 2:2).  결코 우리들 중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은 없고(엡 4:15), 주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벧후 3:18),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친히(엡 4:7-10), 특별한 사역자들을(고전 12:28),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의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에 다섯 가지 직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신(막 3:13), 열두 명의 제자들이지만(마 10:2),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마 26:15), 맛디아가 제비뽑기로 선택되는데(행 1:26), 이 열두 명은 유일한 사람들이고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새 예루살렘 성벽 열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사도들이며(계 21:14).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행 1:21-22),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역을 했습니다(엡 2:20).  반면 또 다른 사도들이 있었는데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보내셨는데 그 중에 바울(롬 1:1, 행 22:4),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야고보(갈 1:19, 2:9), 그리고 본문에 많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롬 16:7), 사람들을 추가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추가하실 수 있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서는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란 용어를 놓고 George Peters는 『A Theology of Church Growth』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초기 사역에서 사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인정된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불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도들’이나 ‘교회의 사도들’로 불린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 여러 사도들이 나오지만(마 10:1-4, 갈 1:1), 그 어떤 구분만큼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롬 16:7, 고후 8:23, 빌 2:25).  John Stott도 일차적인 의미에서 열 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과 같은 계승자(갈 1:1)는 오늘날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로 ‘사도’라고 추겨 세우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사도된 사람들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Peter Wagner는 이 문제를 놓고『교회의 지각 변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신사도개혁운동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사도에 대한 점검 문제를 자주 제기하곤 했는데 일관성 있는 확실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Wagner 자신도 사도의 증명과 점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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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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