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 신자들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풍부한 이해와 은혜로운 경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자 Athanasius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도전 받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이단들이 삼위일체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통 기독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침묵만으로 대처해 나가며 만약 이단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알고 피하는 것과 모르고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인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준으로 삼아야할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적 가르침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셋”이라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인데, 교회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밝혀 이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을 내세운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일신론’(一神論)으로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이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속론’(從屬論)으로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는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하나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樣態論)으로 이 이론 역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다르게 설명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신약에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식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이론은 하나의 본체를 놓고 그 모양만을 달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용어가 바로 ‘교제’와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숫자를 말할 때 개체보다는 오히려 의미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한 해석을 얻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고( 6:4), 말씀하시는 것은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이방 다신종교와 비교하면서 삼위일체의 유일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일체)라는 숫자를 강조하다 보니까 삼위(三位)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숫자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 분 하나님이 일체되어 그들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섬기며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사역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교제하며 돕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19).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할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비록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거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7:5),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신바 되었다고 말하며(1:14, 18), 주후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분은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확인했고, 같은 내용이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버지께 나오시는’ 구절 앞에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낳으심’이 어느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일임을 거듭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낳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해 분명하게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신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같은 생산(生産)의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1:18), 자신의 영광을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누리셨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5).  그러므로 이 호칭에 매여서 현대판 아리우스 자들처럼 예수님의 위상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30).

 

예를 들면 히브리서 15절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7), 라는 구절에 대해 영원 전에 출생하신 아들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성육신, 혹은 그분의 부활과 승귀를 염두해 둔 아들직, 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를 가리킨다는 이런저런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확실하게 “이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없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골로새서 115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 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13절에 보면 아버지 다음에 아들의 순서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이 세 분 하나님이 동등하시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방식인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과 권능과 인격이 같고 가지신 목표가 같기 때문에 하나가 되시고 서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에 누군가하나님은 몇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고 나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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