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악해져 가는 불신 세상에 둘러싸여 다음 천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교리’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도취에 빠져 냉랭한 성령론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든 Fee는 『God’s Empowering Prese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약 4:8), 보기 드문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임재라고 부를만한 현상은 종종 전율(합 3:16), 위엄에 사로잡힌 경외심(사 6:1-5), 서 있지 못함(왕상 8:10-11, 대하 7:1-3, 계 1:17), 압도적인 기쁨(시 16:11) 및 이와 관계된 다른 징조 등과 같은 반응을 촉발하는데 이 점은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의 시대에는 특별히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회 신자인 고든 Fee가 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은사들, 가령 "예언적 은사"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기시대의 교회에 “정경적” 원리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그런 은사들은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 수립과 관련된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특정한 용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정한 용어의 사용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큰 진리를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특정한 언어적 언급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냐 아니냐가 결정될 때는 더욱 그러한데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논리학 이론과 언어 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던 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D. A. 카슨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 단어 하나를 놓고 신학자들끼리 언어학적인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에 대해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 즉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 때문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오순절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경험에서 그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행 2:3), 드러나는 같은 경험 또는 유사한 체험을 매번 기대해야만 하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성령이 처음 임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람소리나 불의 혀 같은 모든 현상들이(행 2:1-4), 다 나타나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야만 하는가?  이렇듯 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신학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절되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Robert W. Lyon는 『Wesleyan Theological Journal』(volume 14, 1-Spring 1979). “Baptism and Spirit Baptism i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믿는 자들은 회심할 때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또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구별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이 모든 표현이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 모두 믿는 자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존 브라이트는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성경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많은 것은 의미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이 해석되는 원칙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고전 4:6),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교리 문제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두고 은사주의 신학분야의 초기 선구자인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로 회중의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균형 잡힌 사역을 하고 있는 Larry Christenson는 『Speaking in Tongues』에서 오순절주의자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결정할 문제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사역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자가 독특하다. 성령은 각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신비스럽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어떤 확실한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것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편견으로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이나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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