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esley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라는 설교에서 “결단코 사람에게 있는 여하한 능력이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값없이 내어 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롬 8:32) 그런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다”  그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闡明)했다.

이러한 메시지를 증거 한 Wesley는 Calvin 못지않게 성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Calvin이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거룩한 감동(벧후 1:21)과 신앙적 권위(Authority) 그리고 신뢰성(Reliability)을 굳게 믿었다.  그의 『설교집』 서문에서 Wesley는 성경의 중요성(Importance), 특히 구원에 있어 성경의 유익함을 말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한 책(성경)에 이 일을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책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것이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책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평생 성경 한 권만 읽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증거 하는데 있어 성경 말씀에는 생명을 걸었다.

Wesley는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서 성서의 권위에 우선성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백 년 후에 활동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개신교회와 Roman Catholic Church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Wesley는 『The character of a Methodist』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 충분한 규율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Roman Catholic Church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정경화(Canonization) 되고 전파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딤후 3:16)을 원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믿었다.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 2』 에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성경은 가장 중요한 인도자이지만 모든 면에서 규율(規律) 대로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규율이 된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성령을 안내자로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를 의미하고, 성경을 규율이라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가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Wesley는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A Clear and Concise Demonstration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s, Works』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만드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 크고 놀라운 증거가 있다. 바로 기적(miracles)과 예언(prophecies), 교리의 완전함(good of the doctrine) 그리고 성서 기자들의 도덕성(moral character of the penmen)이다”

Wesley는 성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엄청난 독서의 사람이었다.  단순하게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론(Ecclesiology)과 신학의 발전을 포함하여 400여 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또한 교회사에 능통한 Oxford University 교수였다.  영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외에도 다른 외국어에 능통한 그는 많은 책들을 읽고 편집하고 집필하였다.  이미 16세기 개혁주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서양의 고전으로 시작하여 논리학(logic)과 수사학(Rhetoric)을 성서와 함께 읽을 것을 권면했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s』이라는 글에서 오직 성서연구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감리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서의 연구는 최고의 열정이다. 만일 성서 외에 다른 책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도 다른 책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책들을 가져오라. 특별히 양피지에 기록된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딤후 4:13). 그러나 나는 그 책들을 읽어도 마음속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책들도 읽어 그 맛을 보기 바란다. 그러나 곧 다시 돌려주도록 하라”  성경이 확실하게 좋고 유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목사가 되지 않으려면 다른 책들도 보충자료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과 영성과 사역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위격과 역사를 넘어서는 방대한 자료들을 배제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Wesley는 평생 Church of England의 서품 받은 사제(Priests)로 살았으며, 흔들림 없이 그 전통에 신학적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은 영국의 개혁자(British Reformers)들이었다.  그들은 Roman Catholic Church과 대륙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중도의 길’(middle way)을 모색하는 자들이었다. Anglicans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어 성서와 교회 전통 가운데 신앙적인 권위를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적 권위의 우선성(Priority)과 함께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에도 합리적으로 이차적인 권위를 부여할 것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만을 절대적인 ‘신조’(信條)로 내세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과 차별성을 가졌다. 

Wesley는 성서와 신학,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Humanism)와 명목주의(nominalism)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Luther와 Calvin의 교육과정에 깊이 퍼져 있던 일반적 사상의 흐름이었고, 그들의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달리 말하면 Luther와 Calvin이 오직 성서만 의지했다고 믿는 것은 착하고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잘못 배운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빈틈없이 세밀한 신학자로 이성의 능력을 신봉하는 당시의 흐름을 이미 숙지(熟知)하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말이 ‘오직 성경’이지,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 없이 ‘오직 성경’ 한 권 만을 연구하는 가운데 살았던 것처럼 믿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아는 것이 개신교회의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알아 가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Wesley는 교회 전통과 비판적 사고를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 유용한 도구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Anglican Church의 중도의 길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그는 이 방법론(methodology)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서’(Sola Scriptura)의 원칙과 대립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Wesley는 항상 성서의 권위(Authority)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서 성서의 권위를 높게 부여하였다.  설교와 논문을 모은 『Work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전집에서 나는 진지하고 솔직한 독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나의 신학적 견해가 성서와 이성, 그리고 초기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그의 생각은 초기 기독교가 가장 성경적이고 순수한 시대의 교회 가운데 초대교회의 신앙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Aldersgate에서 성령을 체험한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을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생생한 실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실재를 구체적으로 느꼈고, 이는 성경의 약속을 비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신앙의 올바른 근거로서 체험을 확신하면서 감정의 변화와 체험을 분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A Farther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Part 1』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 본문들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 본문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고전 2:10)와 성령의 감동(벧후 2:21) 그리고 예수의 영(행 16:7)이 그들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느끼는 신자들의 감정을 분명하고 이성적으로 발견할 것이다”

Wesley는 성령의 임재(계 1:17), 즉 성령의 증언(롬 8:15-16)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Calvin은 성경의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성령의 증언(요 14:16)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Wesley는 신자의 삶의 여러 차원들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임재의 경험적인 유효성 역시 중요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유효한 확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이차적일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성령의 체험(행 9:1-19, 고후 12:1-10)이 성서의 우선적인 권위와 함께 전통과 이성의 차원에서 신앙의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그는 성서(Scripture)와 전통(Tradition), 이성(Reason)과 체험(Experience)을 신앙의 권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가리켜 ‘Wesley의 사변형’, 혹은 ‘Wesley의 사중표준’(Quadrilatera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리교 신학자 Albert C. Outler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로, Wesley의 신학방법론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물론 Wesley는 이러한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Calvin이 ‘오직 성서’(Sola Scripture)라는 신조를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Wesley와 결합된 용어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한 관점들, 즉 ‘사변형’을 제시하였고, 이 네 가지는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경이 궁극적인 원천이며 모든 신학의 일차적인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이차적인 동시에 성경을 위한 보충 자료로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Wesley의 사변형이 신화(myth)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만약 이렇게 따진다면 Calvin이 말한 적이 없는 ‘오직 성서’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단 사냥꾼처럼 얼마든지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질 수 있지만 유익이 없기 때문(딤전 6:3-5, 딛 3:9)에 여기까지만 하겠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신화는 성서의 권위에 관한 탁월한 강조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신화다.  ‘사중 표준’과 ‘오직 성서’라는 방법론은 두 사람의 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관점 차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Calvin과 Wesley모두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위를 굳게 믿었다.  또한 두 사람은 성경이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권위가 있으며(시 119:33-34), 신뢰할 만(잠 3:3) 하다고 믿었다.  특별히 두 사람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탁월한 연구와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Calvin은 종교개혁의 구호가 된 ‘오직 성서’를 주장한 인물로 알려졌다.  반면 Wesley도 성서적 권위가 우선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차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신학적으로 다른 권위들도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적 기독교와 성도의 삶 속에서 일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확인하는 올바른 체험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관점에서 신자들의 매일 삶을 힘들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궁금하다.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하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성경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다(히 4:12).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기때문이다(8:16).  신자가 병들었을 때, 혹은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삶의 어려운 문제에 빠졌을 때, 목사가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고 메마른 말씀을 전한 것이다.  비위가 상하겠지만 이것은 목사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례비를 위해 강대상 위에서 원맨쇼를 보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이 ‘오직 말씀’(마 8:5-12)이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훈련받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부족해서 능력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이유 말이다(눅 24:49).   그 당시 이미 기록된 성경이 있었다.  작금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주야장천 ‘오직 성경’만 강조하면 되지 않을까?  듣기 거북하겠지만, ‘오직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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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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