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herlands에서 Protestant 개혁교회 전통에 함께 속해 있던 Calvin과 Arminius의 후예들이 크고 살벌한 논쟁을 벌였다. Netherlands 국회가 소집한 이 회의는 여러 지방 교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United Kingdom, Scotland, Germany의 Calvinism 교회의 대표들이었다.  France는 초정을 받았으나 Louis XII가 금지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교회 회의는 ‘항론파’(Remonstrant) 견해가 Calvinism 신앙고백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국회는 자문위원으로 신학 교수 5명과 위원 18명을 선출하였다.  정규 대표 수는 56명이었다.  Arminian파에 속하는 ‘항론파’ 그룹은 The Synod of Dort 당시 지배적인 세력을 점하고 있던 Calvin파와 정당한 토론을 기대했다.

1609년에 Arminius가 죽자 1610년에 Arminian파들은 ‘항변서’를 발행하여 무조건적 예정을 주장하는 정통파를 반박하였다.  논쟁에는 예정 외에도 다른 쟁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정치 쟁점들이 신학적 열기와 맞물림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1611년 Calvinist들은 반항변서(Counter  Remonstrance)를 발행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정통파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 결과 1619년 The Synod of Dort에서 Arminian파의 신앙이 정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항론파 목사들은 강단에서, 항론파 지도자들은 나라에서 추방당하였다.   

‘Arminianism의 5대 강령’에 답변한다는 점에서 공식화된 ‘Calvinism의 5대 강령’, 즉 영어 표현에서 다섯 항목의 첫 글자를 따서 ‘TULIP’으로 불린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사실 ‘The Five Points of Calvinism’라는 명칭은 오해를 낳기 쉽다.  왜냐하면 Calvinism은 다섯 가지 교리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Calvin이 5대 교리의 제창자도 아니다.  추후에 논의하겠지만 TULIP이 Calvin의 입장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The Synod of Dort에서 논의된 중요한 내용들은 Calvin의 저작들을 살피는 과정에서 하나하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Calvinist들은 다른 교단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입만 열면 Calvin 신학을 신앙의 잣대로 사용하여 비판하고 논쟁하는 무기로 쓴다.  더 웃긴 것은 서철원이가 무슨 대단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것처럼 Calvin 신학과 같은 레벨에 놓고 용을 쓰며 떠들어 댄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들의 공개 토론과 수많은 글들을 읽어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보탬이 없는 조잡한 토론과 유치한 강의, 이런 것을 듣고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을까?  정이철의 입장에서 보면 Calvin과 서철원을 빼놓고 나머지는 거의 이단 아니면 사이비들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개나 소나 신학자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시대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으면 한다.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단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진짜 이단(異端)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고난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신자들을 위한 본이다(벧전 2:21).  조류과에 속한 것처럼 주둥이만 나불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마 7:21).  예수님처럼 이단 소리를 들어야 한다(행 24:5).  다른 것은 다 입으로 나팔을 불어 대면서 왜 이단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Reformism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TULIP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신학적 얘기만 하면 Calvin을 들먹이지만 한 마디로 속 빈 강정이다.  간혹 간덩이가 부은 사람 중에 자신은 Arminian들과 다르게 TULIP을 따라 사는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 대는 자들도 있다.  솔직히 말해 Calvin 추종자들이 ‘Calvin의 5대 강령’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Reformist로 자처하는 것은 망상 장애를 가진 조현병 환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이것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4)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Lip Service 즉,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Calvin의 신학적 관점과 신앙체계에 대한 신학적 진술의 논리적 연결성을 근거로 삼아 주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Wesley는 어떠한가?  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Calvinism의 5대 강령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두 개나 세 개 정도는 인정했을 덴데, 그는 Calvin 신학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Calvinism의 5대 강령을 Wesley 신학과 비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먼저  Wesleyan Arminian이 아닌 Calvinistic Arminian 신앙이 유럽의 개혁교회 전통 안에서 시작된 논쟁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Wesley를 신학적으로 Arminian 전통에 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만약 이렇게 믿고 있다면 잘못 배워도 한참을 잘못 배운 것이다.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카더라’ 통신을 가지고 가짜 뉴스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청각처리장애(APD)를 가진 자폐증 환자다.

Wesley 신학 배경은 Luther와 Calvin의 종교 개혁이 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유럽 대륙의 신학에 영향을 일절 받지 않았다.  Calvin 신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Wesley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Wesley의 사역을 형성한 신학과 신앙은 오히려 사제 서품을 받은 Church of England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Church of England(성공회)는 Catholic Church와 Orthodox Church, 그리고 Protestant를 포괄하는 기독교의 Catholicity(보편적) 전통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신학을 유럽의 종교개혁보다 초대교회(Early Church) 전통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된 ‘Anglican Catholicism’(성공회적 가톨릭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역사 속에서 ‘Catholic’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한 지류를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전 세계적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 용어가 특별히 개신교 정통교회를 Catholic Church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Catholic(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대표적인 경우가 4세기에 작성된 최초의 기독교 신조인 니케아 신조(Nicene Creed)이다.  이 단어는 교회에 대한 속성인 단일성(unity)과 거룩성(holiness), 그리고 사도성(Apostolicity)과 함께 제시되었다.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겠다.      

간혹 목사들 중에 ‘Catholic’ 용어만 나오면 무식하리만큼 무조건 이단이라고 떠들어대는 몰상식한 자들이 있다.  목사가 무식하면 양들이 힘들고 피곤해진다.  입 다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너무 설치거나 무식한 주장으로 떠들어 대는 것은 꼰대질이다.  외식(外飾) 하지 않는 목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교인들 앞에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거나 알지 못한 것을 우겨 가면서 절대로 다투거나 논쟁을 하지 않는다(딤후 2:23-24).       

내가 Wesley 신학을 공부한 것은 학위를 쌓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가 끼친 영향력과 신학을 조금 더 광범위하게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Reformed church이나 심지어 Arminian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용어와 교리들을 Wesley에게 무식하리만큼 억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Calvin과 Wesley가 살았던 시대는 이백 년이라는 시간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몰상식하게 빗나간 시도들은 Wesley의 신앙적 가치와 실천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낳고 말 같지 않은 부정확한 설명, ‘카더라’ 통신이 된다.  이것은 서철원이가 “Wesley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했고….  그의 교리와 신학에 있어 Pelagius와 완전히 동일하며…..   Wesley 신학은 이단으로 단정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이것은 정말 ‘개소리’다.  관상이 과학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을수록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持論)이다.

Wesley는 인생의 마지막 무렵 자신의 신학적 관심이 Arminian 전통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Wesley 신학이 Arminian 신학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머리 터지게 싸우는 Calvinist들과의 논쟁에서 그러한 입장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성질 더러운 동물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개신교회 신학을 종교개혁 전통(Reformed), 특히 Calvin 신학으로 재단할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기독교 안에서 누구든지 다른 의견이나 다른 신학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은사적(고전 12:12-27),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다양성을 좋아하신다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도 Calvin은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spokesman)이 아니다.  그저 삼시세끼 배고프면 밥 먹고, 병들면 골골하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는 인간에 불과하다.  오죽했으면 Calvin을 가리켜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말이 나와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발람의 나귀처럼 잠깐 사용하신 것뿐이다(민 22:28).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누구든지 사람을 높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 가증스러운 것이다(눅 16:15).  신학적 꼰대짓 하는 사람을 높이지 말고 말에나 일에나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벧전 4:11).

그런데 Calvin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느낀 점도 있었다.  Calvin 신학의 장점은 신앙의 기본 요소들을 하나하나씩 정확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조직적이고 이성적이다.  모든 주제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잘 정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준다.  반면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Arminian 신앙의 영향을 받은 신학 전통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허접쓰레기 같은 신학으로 취급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신학의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Calvin의 5대 강령에 필적하는 권위를 가진 만큼 훌륭하고 조직적이며 세련된 문자들로 정리한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Calvin의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작금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는 거의 짝퉁들이다.  자칭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신학자나 목사로서 품위와 인격을 갖춘 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갑(甲) 질 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쪽’ 팔리는 일이다.  나는 Calvin과 Wesley에게서 좋은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목사다(살전 5:21).  그런데 하나 기억할 것이 있다.  Arminius와 Wesley를 포함하여 Calvin의 등장 훨씬 이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Calvin의 가르친 사상에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일까?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슬리와 성경  (1) 2023.12.17
칼빈과 성경  (1) 2023.12.10
카더라 통신 먹사들  (1) 2023.11.26
웨슬리는 누구인가?  (0) 2023.11.19
칼빈은 누구인가?  (1) 2023.11.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