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evangelicalism)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고 말한다(욥 42:2).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피조물을 다스릴 주권과 능력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시 135:6).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욥 2:1) 간에 모든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다스리신다(빌 2:10).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미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잠 21:1),  즉,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것과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주신다(출 9:16).  따라서 그분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엡 1:11).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일을 정하실지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1:5).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하여 수많은 구절들이 드러나 있다(시 115:3, 잠 16:9, 단 4:34-35).  이미 충분한 성경구절들을 위에 열거했지만, 에베소서 1장 11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이유를 조금 더 제시하겠다.  먼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고 기본 주제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우리의 구원이다(엡 1:4).  이 구절에 따르면 신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구원받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엡 1:9).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과 뜻을 따라 구원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을 포함하여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God's sovereign rule)와 인간 구원에 대한 선택(choice for salvation)을 말해 주고 있다.

먼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계획)에 따라’(11절)라는 구절에 관하여 주석가들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한글 성경에서는 ‘뜻’과 ‘계획’을 중복하여 번역하고 있지 않고, 두 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런데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뜻’(Thelema)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말한다.  반면에 ‘계획’(Boule)은 목적을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을 나타낸다.  따라서 11절의 정확한 해석은 John Eadie의 말대로 ‘심사숙고하여 세워 놓은 계획’을 가리킨다.      

Brooke Foss Westcott는 『St. Paul's Epistle to the Ephesians』에서, 이 구절의 근본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현명하게 이루어지도록 숙고(熟考) 한 후에 선택(choice)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Charles Hodge가 말한 것처럼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라는 것(롬 8:29)과 하나님의 선택(요 15:16)은 예견된 행동이나 인간의 공로 등과 같이 하나님의 무관한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렘 33:2).

하나님의 생각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자신이 목적과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선택하시고 성취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까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창 1:3), 다른 행위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충분히 그리고 단독적(stand-alone)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시는 일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요 15:16)과 천사(히 1:14) 등의 대리(代理)를 통하여 이루어 내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피조물에게 발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문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 방법인 예수님 조차도(행 4:12)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가 되었다’(행 2:23).  의사 누가는 ‘할당하다’, 혹은 ‘배치하다’라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행 13:48).  사도 바울도 ‘원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롬 9:16).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신다’(롬 9:1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든 구문(構文)들 중 최고로 강한 구문이다.  성경은 인간 사건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증거 한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Calvinist들은 열광할 것이다.  Calvin이 Geneva에서 살벌하게 목회하던 것처럼 TULIP에서 벗어난 모든 신학과 신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망나니 같은 서슬 퍼런 신학적 칼 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요 16:2).  바울이 가장 좋은 본보기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가졌던 신학은 ‘카타르시스’(Catharsis)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응어리’를 밖으로 분출할 때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데 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통해 성취감을 가진다(행 9:1-2).  심각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행 26:9-11, 갈 1:13-14, 빌 3:6).  이 증세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정신 질환의 일종인 사이코패스(Psychopath)다.              

그런데 하나님도 Calvinist들이 독선에 빠져 절대적 주권만을 강조할 것을 아신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John Wesley를 준비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먼저 J. I. Packer의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개의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성경적으로 제시하겠다.  신구약 성경은 자유가 전제되어 있는 선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봇이 아닌 이상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결과는 불순종이었다(창 3장).  아론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슷한 선택을 제시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줄 한번 잘못 서서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사람들이 삼천 명이었다(출 32:25-29).  예배드리는 문제는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 속에는 선택이 있었다(수 24:15).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강력한 메시지다(마 6:24).  엘리야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사이에 머뭇거리지 말 것’을 재촉하였다(왕상 18:21).  혼합 종교가 판치는 시대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통해 중요한 선택을 주셨다.  요한복음 5장 40절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선택을 잘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눅 13:34).  예수님도 불가항력적 은혜(?)가 자유로운 선택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설득적인 것이지 강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일 4:9-10).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은 강간을 못 하신다. 사랑을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를 제압(制壓) 하는 건 하나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상 명령을 통해서도 마지막 선택권을 주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요 5:24).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하시지만(벧후 3:9)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 5:4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눅 7: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들은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사실상 거절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절할 수 있으며 실제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 앞에 이행할 의무를 펼쳐 놓지만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도록 Remote control로 조종받는 Robot이 아닌 지, 정, 의를 가진 한 사람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자유로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엡 2:8)라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롬 10:9-10)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主管)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약 두 개의 신앙 중 하나만을 믿는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믿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관계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것이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Augustine과 Pelagianism 사이에서 살벌한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이다.  칼빈주의(Calvinism)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Dutch Reformist) 사이에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못지않게 쓰디쓴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행 23:6-10).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Calvinist들이 심하게 논쟁하면서 영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딤 3:9).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딤후 2:23)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도 없어져야 할 전통이다(딤전 4:7,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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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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