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우리에게 자격이 없는데도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다채로운 선물들을 가리킨다(약 1: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명코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자비롭게 유보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구원, 그리고 영생이라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들을 허락하셨다.  우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소송이 우리를 유죄(有罪)라는 필연적인 판결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요구한다.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엡 2:9).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갈 2:16).  사람의 믿음 그 자체는 ‘행위’로 여겨져서도(갈 3:2), 누구든지 자랑할 근거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전 1:29).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요 3:16).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을 주셨다(딛 3: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딛 3:3)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의로운 일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었다(롬 3:27).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딤후 1:9)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요 4:10).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벧전 2:24)과 부할(롬 1:4)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하였고(요일 2:2),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요 14:6)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셨다(고후 6:16). 조금 더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표준 구절로 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을 제시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이것이 형벌을 대속할 존재가 필요한 이유였다.  죄를 속하지 못하는 동물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히 10:4).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었다(히 9:25-26).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었다(행 4:12).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징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의와 거룩하심을 충족시키신다(롬 3:25).  그와 동시에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신다(롬 3:26).  Justin Taylor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로 향하지만 성자가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가 그에게 쏟았진 것이다.    

교회사에는 이러한 대속(vicarious)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이 등장하였다.  먼저 구속과 동의어로 쓰이는 대속(代贖)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 받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리신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킨다(히 9:12).  영어 어원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at-one-ment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준비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있다.   

사실상 신학자들 사이에서 속죄(atonement)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면서도 이견(異見)이 많은 문제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 논쟁의 핵심으로 제기된다.  특별히 형벌 대속이라는 견해는 속죄에 대한 표준적인 개혁주의적 접근법의 특징을 이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그런 접근법을 수용해 왔는데, 그중에는 Charles Hodge, William Greenough Thayer Shedd, Louis Berkhof, John Murray, Lean Morris, John Stott 같은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형벌 대속론의 뿌리는 John Calvin의 저작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Calvin은 역사적인 대속(atonement)의 교리를 확정하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죄의 결과로 희생 제물(sacrifice)이 되어(히 10:14) 무서운 심판(롬 5:16)과 영원한 죽음(롬 5:14)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마 20:28).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필요한 값을 치르셨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죄가 없는 판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징벌을 받아야 할 죄를 범했지만, 그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로 옮겨졌지 때문’이라고 말한다(사 53:12).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징벌(punishment)을 직접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Calvin의 대속교리는 인간의 행위를 대신한 예수의 객관적인 구원 사역에서 법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에 때때로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속적 희생을 가리킨다(막 10:45).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여기서 대속물(ransom)은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代價)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속전(贖錢)을 치르셨는데, 거기에 요구된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갈 3:13).  후에 베드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기록했다(벧전 1:18-19).  이 희생으로 사람이 지은 죄의 형벌을 용서를 받게 하시고(롬 5:9), 의를 전가하시고(고후 5:21),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롬 5:10).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죄 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리(代理) 대속이다.

그렇다면 Wesley는 징벌을 대신하는 대속의 관점에 대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다”  특별히 Wesley의 설교들 가운데 그가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와도 구별되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설교가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Works (Bicentennial Edition)이다.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독교 체계 내에서 속죄 교리는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이신론과 기독교 사이를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점이다”  이 설교는 당시 만연하던 ‘선천적 의지론’과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구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Wesley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보았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엡 2:1-3),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 10:12) 즉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히 9:12)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스스로 우리의 죄(고후 5:21)와 죄책(갈 3:10)과 형벌(요 1:29)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Wesley는 복음의 본질인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가에 대해서는 Calvin의 주장과는 엇갈렸다.  다시 말해 Wesley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것’이지 단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사 53:6)처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막 16:16)이 있다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권과 자유  (2) 2024.01.21
보편 속죄  (1) 2024.01.14
웨슬리와 성경  (1) 2023.12.17
칼빈과 성경  (1) 2023.12.10
알미니안주의  (2) 2023.12.0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