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병 고치는 은사'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4.16 치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2. 2016.01.30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3. 2015.10.10 육체의 질병 1
  4. 2015.05.23 병 고치는 은사

질병의 문제가 아닌 사역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거의 2주가 되어갈 무렵, 아침예배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힘이 없어 드러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위와 식도 부분이 아프고 따끔거리며 통증이 오면서 운동할 때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증상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혹시 금식을 잘못해서 위나 식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반면에 이것이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께서(출 15:26), 이런 방식으로 만지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순간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기도원에서 위장병을 치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질적인 질병을 일방적인 은혜로 말끔하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위궤양과 만성위염으로 인해 거의 25년 이상 위장약을 복용했지만 약을 먹을 때만 효과가 조금 나타나는 것 같았고 먹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똑같은 증상이 계속 일어났는데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증상이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라기 2장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육체의 질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치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치실 때 항상 즉각적으로 고치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막 1:42),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고전 12:9)란 항상 즉각적이지만은 않고 때로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먼저 성경에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다고 하신 말씀은(막 16:18), 병자가 금방 나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병의 힘이 끊어지고 급속한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받고 곧 바로 고침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마 8:3, 눅 5:13),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 즉각적으로 회복되지 않아도 병세가 더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약 5:16).  예를 들어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일부분만 고치셨을 때 그 소경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무로 보인다고 말했는데(막 8:24),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단번에 완전하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눅 5:17), 아마도 제자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믿음이 없는 소경에게 완전한 치유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점진적으로 고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안수하실 때 그 소경이 온전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8:25-26).

 

 

또 한 가지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라고 믿는 것인데, 오늘날 병 고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나서 다시 재발된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행해지는 치유사역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완벽하게 고치셨다고 말하면서 병이 재발되거나 부분적으로만 고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치유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지만은 않다고 가르치고 있고, 언제든지 밑에 깔려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육체의 질병은 다시 재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우리는 그 해답을 요한복음 5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요 5:14),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만약 다시 죄를 지으면 깨끗하게 고침 받은 질병이라도 얼마든지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45절에서도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더 많은 귀신들이 찾아오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적도 있는데, 이것은 치유가 영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줄 뿐 아니라 죄 짓는 것에 노출이 되면 그만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병원치료에 관한 것으로 신자들 중에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원이나 의사에게 가는 것을 꺼리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문제는 끝까지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사이비 치유사역자를 만나 병이 더 악화되어 열 두해 혈루증에 걸린 여자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막 5:25-27).  사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인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셨고(눅 5:31),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병원치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눅 10:34)이나 의술(사 1:6)을 사용하여 치료를 하시기에 의학적인 방법으로 고치는 것도 그분이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이라는 것입니다(사 38:21).  그러므로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방법이 안수기도인가(막 5:23), 아니면 명령/선포/대적기도인가(눅 4:39), 혹은 단순한 기도인가(마 8:16), 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병자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또는 아버지께서 병자를 향하신 뜻인 무엇인지에 따라 치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고(사55:8-9), 만약 누군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개인의 권능으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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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고(출 15:26, 호 7:1), 그분은 인간의 요청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치유하시기에(삼상 2:6, 시 72:18, 103, 3, 136:4), 사도행전에서 스테반(행 6:8)과 빌립(행 8:5-8), 그리고 베드로(행 3:1-10)와 바울(행 14:8-10)이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하여 증거 할 때(행 5:12),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0:1, 눅 10:1-20).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결코 치유자로서 명성을 얻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으며(행 행 3:12), 이것에 대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주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거나(행 2:43, 5:12), 단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4:3, 15:12).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병 고치시는 사역(마 4:23-24)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어떤 여건 하에서 치유가 자유롭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요 5:19),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 3:17)조차도 항상 임의대로 치유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막 9:7)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막 2:10), 그분에게 질병을 고치는 능력이 과연 필요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성경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마 8:16), 여러 번 “그는 그들 모두를 다 치료하셨다”(마 12:15)라는 말을 우리는 접할 수 있지만(눅 6:19), 유독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을 고치셨습니다(요 5:1-15).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연못가 주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직후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에 개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5:15-18), 이 논쟁 도중에 예수님은 연못가에서 “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날 연못가에서 한 사람만을 고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만을 고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고(요 5:30), 만약 아버지께서 그 병자를 치료하시길 원하지 않으셨다면(요 12:49), 아마 예수님 자신도 병자를 고치실 수 없었고(요 14:10),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고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습니다(요 8:28).

 

이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여건 하에서 마음대로 치료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사건이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났는데, 주님은 그곳에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시지 않고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것을 마가는 증거하고 있고(막 6:5), 마태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3:5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아들의 치유사역이 제한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임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독립하여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자신의 전능하심(마 8:3)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을 통해 철저히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빌 2:5-11).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사도들은 더 말할 나이가 없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5:5), 주님은 동일한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행할 직무를 위임하셨지만(요 5;22), 아들은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독자적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제자들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도록 베드로를 사용하셨을 때(행 3:1-3),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자들을 바라보았지만(행 3:11),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이 치유로 인해 자신들을 높일 것을 두려워하여 병자가 고침 받은 것은 자신들의 사도적 능력이나 거룩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적이 있었는데(행 3:12), 한 마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롬 9:16).  이와 동일한 원리가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도 하나의 기적에 의해 예증되는데,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 저자 누가는 바울은 그에게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고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행 14:8-10).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치료받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 치유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마 9:27-30).  또 다른 예증은 제자들이 간질병이 든 소년을 고치지 못한 경우인데(마 17:14-21), 이 사건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것과 모든 질병에 대한 권세를 받은 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는데(마 10:1), 이것은 치유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마가복음 16장17-18절과 야고보서 5장 14-1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병든 자가 다 고침을 받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치유의 은사는 개인이 임의대로 원하는 장소나 시간에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이 사이비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신실한 사역자라면 그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날 것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지식의 말씀이 치유를 위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19절 말씀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고침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시고,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의 종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사역자는 누가 치유될 것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음성(지시)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사역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처럼 간절히 고침(마 15:21-28)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의대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 사역자를 찾거나 또는 찾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사도들조차도 임의대로 고칠 수 없었다면 오늘날 치유사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대단한 능력의 종인 것처럼 자랑하거나(고전 1:29), 높이지 말아야 하고(눅 16:15), 만약 누구든지, 언제나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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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왼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만져보면 무슨 딱딱한 것이 있다고 해서 아내와 같이 만져보니 탁구공보다 약간 작은 종양(tumor)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프면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저희 가족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에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딸에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이 종양을 제거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요 14:12),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깨끗하게 고침 받을 것을 명령했습니다(눅 4:39).  물론 기도를 해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눅 5:17, 고전 12:11), 금방 나을 것 같았는데도 무려 2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여전히 종양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하던 대로 기도만 하고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큰 딸이 “아빠, 종양이 없어졌네!” 그러기에 손으로 만져보니까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종양을 제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느낀 것은 내 자녀가 종양 때문에 신경을 쓰고 손으로 누를 때마다 아프다고 할 때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질병(종양)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사 53:5), 신약에 와서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체의 질병을 다 짊어지셨다고 기록했으며(마 8:17),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벧전 2:24).  실제로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삼분의 일은 병자와 축귀사역에 시간을 보내셨는데(마 4:23), 만약 병자를 고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라면 승천하실 때 마지막 지상명령에 치유와 축귀사역을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고(막 16:15-18), 무엇보다도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약 5:14-16).  그리고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 2:28-29)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오순절 날 베드로는 이 말씀이 성취됐음을 선포했습니다(행 2:16-18).  이렇듯 구약시대와 달리 이제는 성령의 능력이 주의 백성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는 것, 그리고 예언과 주님의 음성 듣는 것과 환상과 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막 16:17-18, 행 2:17-19).  만약 이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비틀어진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직도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고전 2:14).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칼과 방패는 들었지만(엡 6:16-18), 전혀 사용할 줄을 모르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더라도 마음에 기쁨이 없이 무엇인가 눌려(행 10:38),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하는데(벧전 2:9), 왜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한사람은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질병으로 고생하며 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사람이 영육이 강건한 사람입니까?  만약, 온 몸에 각종 질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성경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하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이렇듯 예수님은 다양한 종류의 병과 여러 가지 유형의 질병들을 이미 고치셨기 때문에(마 9:35, 10:1, 막 1:34),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들 중에 이사야 53장5절 말씀을 오직 영혼구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육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원어에는 온전함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치유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가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육체와(출 23:25, 신 7:15), 감정과(시 147:3, 사 61:1-3), 영이(렘 3:22, 호 14:4), 모두 회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즉 헬라어 ‘소조’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110번 이상 나오는 단어로 ‘영혼구원’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8절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소조’로 사용하고 있고, 의사를 잘못 만나 돈을 탕진하고 몸을 망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온갖 고통을 당한 여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을 때 사용된 단어도 ‘소조’이고(마 9:21), 거라사 지방에서 평생을 귀신들려 벌거벗은 몸으로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귀신에게 완전히 놓여남을 받을 때 사용된 단어 역시 ‘소조’입니다(눅 8:36).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소조)은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에서의 고침과 귀신에게서의 자유함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환언하면 신약성경 요한삼서2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형통함과 육체의 건강까지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자녀가 질병으로 고생하며 사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모든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사회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도 똑같으실 것입니다(마 7:9-11).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요한삼서 2절).  만약 자신이 낳은 자녀가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아마도 그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낳지 않은 자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우리가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병들어 살 수도 있겠지만(요 11:4),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9:3). 우리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막 3:1-6).  가령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이들이 주님께로 나아가면 고쳐주실 것을 믿었을 때 예수님은 이들의 질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는데(막 7:24-30, 마 8:5-13), 하물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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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은 남들이 알아주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4년간 가르치는 것과 그것을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모든 과정을 잘 배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뚜렷한 선교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빛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성경공부 반을 세우자 원주민들은 진지하게 열심을 보였고 추장과 많은 부족 어른들을 비롯하여 마을사람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학기 말이 다가올 때쯤 성경공부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원주민들이 선교사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John은 혹시 자신이 원주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아니면 무슨 문화적인 금기를 범한 것은 아닌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고 결국 추장을 설득하여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길 “당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말씀이 머리 속에 속속 들어와,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묻자, 추장은 “성경공부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성경공부를 다녀온 밤에 우리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귀신들에 대해 처리하는 방법을 당신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추장과 대화를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John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젊은 선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은 잘 배웠지만 그 마을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는 영적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고 이것은 오늘날 교리와 전통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앙생활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요한삼서 2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엡 6:10-13), 이 전쟁은 인간을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끌고 가는 치열한 싸움으로 주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히 12:4).  무엇보다도 지식적인 성경공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귀신에게 너무 시달려서 자살하고 싶다든지, 방금 암 진단을 받은 사람, 혹은 감정에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성경공부만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성경공부를 포함한 봉사와 친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를 했지만 그곳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과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에 대해(고전 12:7-11),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전쟁에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 암 말기 환자 한분이 대학생 아들과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집사님으로 그 당시 머리카락은 다 빠진 상태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집사님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성경공부와 말씀으로만 양육을 시켰고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해서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처럼(약 5:14-16),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고 사실 정식 신학교육은 받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경험이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분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회자에게 간다고 말을 하면서 교회를 떠났을 때 그때에는 담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성경에 나오지만 치유사역(막 16:18, 고전 12:9)에 대한 무지함 그리고 교회 전통과 대학원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으로 인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조금만 더 일찍 성령의 능력사역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표현한 분으로 묘사하는데(요 1:18), 예수님은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을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7).  이 말씀의 의미는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40편을 기독론적으로 사용한 구절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완벽한 참 제사의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히 10:14).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마 4:23),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마 9:35, 10:1, 막 1:34), 예수님의 사역은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마 14:14).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는 것(마 4:23-24)과 귀신들린 사람(막 5:1-20)을 치유하는 것이었고(막 9:14-29), 주님은 제자들(눅 9:1-6)과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치유사역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막 16:17-18).  이렇듯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지상사역 때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히 13:8),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눅 5:17, 요 14:12),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마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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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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