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은 남들이 알아주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4년간 가르치는 것과 그것을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모든 과정을 잘 배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뚜렷한 선교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빛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성경공부 반을 세우자 원주민들은 진지하게 열심을 보였고 추장과 많은 부족 어른들을 비롯하여 마을사람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학기 말이 다가올 때쯤 성경공부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원주민들이 선교사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John은 혹시 자신이 원주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아니면 무슨 문화적인 금기를 범한 것은 아닌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고 결국 추장을 설득하여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길 “당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말씀이 머리 속에 속속 들어와,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묻자, 추장은 “성경공부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성경공부를 다녀온 밤에 우리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귀신들에 대해 처리하는 방법을 당신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추장과 대화를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John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젊은 선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은 잘 배웠지만 그 마을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는 영적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고 이것은 오늘날 교리와 전통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앙생활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요한삼서 2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엡 6:10-13), 이 전쟁은 인간을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끌고 가는 치열한 싸움으로 주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히 12:4).  무엇보다도 지식적인 성경공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귀신에게 너무 시달려서 자살하고 싶다든지, 방금 암 진단을 받은 사람, 혹은 감정에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성경공부만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성경공부를 포함한 봉사와 친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를 했지만 그곳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과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에 대해(고전 12:7-11),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전쟁에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 암 말기 환자 한분이 대학생 아들과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집사님으로 그 당시 머리카락은 다 빠진 상태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집사님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성경공부와 말씀으로만 양육을 시켰고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해서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처럼(약 5:14-16),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고 사실 정식 신학교육은 받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경험이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분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회자에게 간다고 말을 하면서 교회를 떠났을 때 그때에는 담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성경에 나오지만 치유사역(막 16:18, 고전 12:9)에 대한 무지함 그리고 교회 전통과 대학원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으로 인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조금만 더 일찍 성령의 능력사역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표현한 분으로 묘사하는데(요 1:18), 예수님은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을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7).  이 말씀의 의미는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40편을 기독론적으로 사용한 구절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완벽한 참 제사의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히 10:14).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마 4:23),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마 9:35, 10:1, 막 1:34), 예수님의 사역은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마 14:14).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는 것(마 4:23-24)과 귀신들린 사람(막 5:1-20)을 치유하는 것이었고(막 9:14-29), 주님은 제자들(눅 9:1-6)과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치유사역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막 16:17-18).  이렇듯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지상사역 때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히 13:8),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눅 5:17, 요 14:12),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마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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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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