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지식의 말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6.17 사적인 특별한 계시
  2. 2017.03.18 초자연적인 지식
  3. 2017.01.14 지식의 말씀

어느 날 Charies H. Spurgeon이 설교를 하다가 말고 잠시 멈추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주인에게서 몰래 훔쳤지”  예배가 끝난 뒤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젊은이가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청년은 가지고 있던 장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적질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 돌아가실 지도 모릅니다.” 이 간증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은 Spurgeon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신학과 교리를 잘 알아서 이런 초자연적인 정보(지식)를 알아낸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도 있습니다.  “언제가 음악당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군중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제화공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가게 문을 엽니다. 그 가게는 지난주일 아침에도 문을 열었고 그는 9펜스를 벌어 그 중에 4펜스를 이윤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영혼은 4펜스에 사단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음악당에서 나의 말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 외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내가 말한 것이 옳은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누군가를 지목해서 말한 그와 비슷한 수십 번의 사례를 더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Spurgeon의 체험들이 ‘사적인 계시’와 ‘성경의 계시’를 혼동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지속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항5조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이고, 더 나아가 Wayne Grudem과 D. A. Carson이 말하는 것처럼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설교할 때 사용했지만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의 실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Spurgeon의 신학과 사역을 후세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내용과 함께 살펴본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지식의 말씀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런 은사가 초대교회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잡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겠지만, 사실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Spurgeon 자신의 증언은 우연히도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러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영적인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케 만드는데 기여하는 불신과 배교, 그리고 신학적 무지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오늘날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지 판단하기 위한 최종적 기준은 성경말씀이지만(계 22:18-19), 문제는 교회사의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Augustine, Luther, Calvin, 등등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같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눅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말하거나 다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9-30).  그러기에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눅 11:52, 롬 11:33, 15:14, 고전 8:1, 엡 3:18, 빌 1:9, 3:8, 딤전 6:20, 벧후 1:6, 3:18), 사도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고전 12:8),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아홉 가지 은사들을 기록하면서(고전 12:8-10),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이 하나님의 신비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골 2:3)에 대해 풍성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계시된 비밀, 즉 지식 안에서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고전 1:5, 엡 4:13-16).  하지만 바울이 이 지식을 성령의 은사에 포함시켰을 때는 무엇인가 더 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2절 말씀인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라는 구절과 고린도전서 14장6절 말씀 ‘지식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유익하리요’라는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지식’(고전 12:8)이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적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이 은사를 받은 자안에서 자리 잡은 특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와서 듣는 이의 마음을 쪼개는 사적인 특별한 계시, 즉 초자연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성품을 알아보셨을 때(요 1:48)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으로 가져다주라고 하인을 명하셨을 때(요 2:1-12),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가지고 사용하셨고(요 4:18), 베드로에게도 이 은사가 있었으며(행 5:3-4, 9),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사 역시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왕하 5:20-26).  따라서 이 은사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개인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7).  그리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요한 은사이고(고전 12:11),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잘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훈련되어 있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무분별하게 시행하거나 혹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 없이 사용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은사이기도 합니다(고전 13장).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부담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약 1:17)인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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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으리라는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우리는 따로따로 미국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볼리비아로 가야 했다.  아내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뒤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볼리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며, 나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몇 나라,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그 외 나라들에 들러 학생 사역을 격려하고 볼리비아에서 아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그 예감은 고통스럽도록 분명하게 다가왔다.  왜 되돌아가서 아내에게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이 예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가?  나는 예감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식의 말씀’ 이라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터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비참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물론 나는 기도했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치려 했다.  그토록 강력한 예감이 있는데?  내 입은 바짝 말랐다.  하나님은 까마득히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를 신뢰할 수가 없느냐?”  나는 깜짝 놀랐다.  “예, 주님을 믿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내게로 되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네게 되 돌려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오! 하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는 그들을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내게 맡길 수 없단 말이냐?”  나는 그분 앞에서 울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예, 그들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서나 생명에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믿음으로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나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어떤 예감을 느꼈고 여행을 갑자기 중단하여 그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전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 간증은 의료선교사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정신과 의사 John White 박사의 저서 『The Cost of Commitment』에서 나온 내용인데, 이 간증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White 박사에게 아내와 아들이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된다는 예감(지식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아내에게 그 말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아내에게도 지식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 비극이 일어나기 직전 착륙한 공항에 내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는데(고전 12:7), 여기서 ‘나타남’이란 말은 각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산출하는 것으로, Tom Smail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몸(body)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이 거기서 하시는 일은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8-10)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알려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모든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되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차원에서 볼 때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습니다(고전 12:11).  그리고 은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행 1:6-8), 복음을 전하며(롬 15:18-19),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막 16:20), 건축자에게 주신 연장(도구)인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고, 이토록 소중한 성령의 나타나심인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은사는 개인의 만족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 신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기록된 말씀 밖에서 역사하지 않고(고전 4:6), 언제나 신자의 유익,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때문(엡 4:7)에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의 나타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인데(고전 12:8), Bruce B. BartonNeil Wilson은 이 은사에 대해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도 있고(고전 13:2, 8-12, 14:6), 또는 기독교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런 양면성을 가진 견해와 달리 주로 칼빈주의 신앙으로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은 Richard Pratt이 말한 것처럼 오직 한 가지만을 주장합니다.  “바울이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사실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 직접적인 계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즉 지식의 말씀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John Archer“지식의 말씀은 구속계획에 실재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표현하는 교육의 은사”라고 말하면서 “이 은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은사는 진리의 말씀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진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은사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주시는 예언과 깊이 관련된 초자연적인 지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에 대해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롬 12:3), 사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지식에 대해 거부하겠지만, John Archer는 지식의 말씀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오감을 통해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전도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A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자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목신경이 손상되어 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당신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처럼(눅 7:1-10), 시공간을 초월한 즉각적 계시, 즉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오늘날도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강하게 부인하는 부류는 “이런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향해 사탄에게 미혹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리감을 두고 신중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부류는 “사실 나도 그런 은사를 체험하고 싶은데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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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분은 내 마음에 그날 밤 한 젊은이가 예배에 참석할 뗀데 그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께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남자들 중 절반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은 John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은 바로 그날 아침에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성령께서 그녀에게 “네 아들 John에게 예배에 함께 가자고 말하라.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같이 가자고 간청했고, 그는 불신으로 가득 찬 채 “좋아요. 엄마 제가 가도록 하지요, 만일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부른다면 제 인생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저녁예배 때 나는 성령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을 전하고 John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당연히 John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었고 지식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날 그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엄마의 편지를 파일에 보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Mighty Manifestation』에 나오는 복음전도자 Reinhard Bonnke의 간증인데, 사실 지식의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은사로 성경이외의 다른 초대기독교 문서에도 이 구절을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은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지식의 말씀은 다른 은사와 달리 전후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하는데, 모든 성경주석가들은 위의 구절만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이 은사가 신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 즉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지식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교사들에게 있는 지식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사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견해를 살펴본다면 Calvin은 골로새서 2장3절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와 지식은 서로 관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해석했고, John Archer는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 실린 글을 인용하여 성령께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상황을 계시하시는 정신적 인상, 그림 혹은 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사이고, Peter Wagner는 “지식의 말씀은 몸에 성장과 여러 가지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라고 하며, Bruce B. Barton은 “이것은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반면 Richard L. Pratt, Jr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일상적으로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 즉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장시간에 걸친 집중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낸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알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즉각적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식, 즉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자연적인 지식이 아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먼저 신구약 성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본다면 하나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하나님과 주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예물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어두는 파렴치한 죄를 지었을 때 엘리사가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왕하 5:20-26),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이 내려졌는데(행 5:1-11),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때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은사는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조금 더 찾아본다면 먼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예수님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사람의 외모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사 11:3),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과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요 4:10-26).  이런 초자연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전형적인 본보기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성품을 훤히 아셨던 것과(요 1:46-48), 처음 만난 삭개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들을 통해(눅 19:1-10), 이 지식의 말씀이 현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므로 전지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요 10:30),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눅 2:52).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는데(빌 2:6-11), 예를 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리셨고(눅 5:17),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눅 4:14-21).  즉 인성의 한계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적능력을 빌어 사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나 집회에서 종종 누군가가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물론 ‘분변하라’는 말씀(고전 14:29)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 그리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는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잊고 사는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성령의 음성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든 은사는 본래 교회의 유익과(고전 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엡 4:12), 사실 몸의 필요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아는 것도 지식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볼 경우 신비스러운 지식과 성경 계시와의 관계 면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것은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는 지나가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 있는 말씀처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Charles Spurgeon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과 반대로 나오는 계시가 없듯이 한 개인을 위한 지식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각 지체에게 유익하고 조화롭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바르게, 그리고 분별하는 가운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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