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15.06.13 영들 분별함
  2. 2015.05.23 병 고치는 은사
  3. 2015.03.21 분별할 수 있는 능력 2
  4. 2015.02.14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5. 2014.12.13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6. 2014.08.23 귀중한 은사 '방언'
  7. 2014.06.10 통역되지 않는 방언

Lloyd Jones는 성령의 은사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을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는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전해진 어떤 것도 스스로 경시한다. 그들의 마음의 선입관과 모든 편견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는 교회의 진실한 부흥이나 성령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역에 대한 최대의 적은 거의 일괄적으로 교회 자체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것은 놀랍고 굉장한 진리이며 모두가 성령을 소멸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개혁가들을 박해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위험은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쉽게 모든 것을 믿어 버리곤 한다. 이들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것이라도 믿음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쳐 버린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거짓된 열정이라 불렀던 것이며 항상 광신주의로 이끌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첫 번째 부류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성령을 소멸할까 두려워서 무비판적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소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Lloyd Jones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단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물질적인 것의 주위에는 영적인 영역들이 있으며 하나님과 모든 거룩한 것을 대적하는 사악하고 해로운 영들과 권세들이 있다. 우리는 성령 뿐 아니라 이러한 악령들로부터 항상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의 한 가지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인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과 그 교훈을 줄 뿐 아니라 가능한 우리에게 영들을 시험하고 영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 “성령을 소멸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살전 5:19-22).  여기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죽은 정통, 즉 모든 것을 질서 하에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에 성령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이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것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라고 불리우는 것들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것인데 환언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바리새인처럼 무조건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지 말고(마 12:22-37), 좋은 것들이 있다면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과 악을 구별하고(요일 4:1), 의와 불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겔 44:23), 특히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는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고전 2:14), Calvin은 이 은사에 대해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통찰력을 말하는 것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은사라고 말하며, Wayne Grudem은 어떤 사람 안에 있는 마귀의 영이나 성령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며, D. A Carson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행하게 하신 기적들을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했던 것처럼 악령들의 사역을 분별하는 은사라고 말합니다.  또한 RobertsonPlummer는 영적 현상들이 위로부터인지 자연적인 것인지 혹은 악령에 의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으로 거짓 예언자들이 교회 안으로 많이 침투한 상황에서 이 은사는 필수적이고, Gordon Fee는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특히 예언들을(고전 14:29), 바르게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영들 분별함’이란 사람의 속마음이나 감추어진 죄악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들 분별함이 감추어진 죄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을 가진 은사인데 성경에서 이 은사를 받은 대표적인 두 사람을 든다면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소유물을 판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때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하여 죄를 지적했고(행 5:3-9), 사마리아 전도여행에서 마술사 시몬을 보고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라고 말하며(행 8:23), 이 은사를 사용한 것을 알 수가 있고,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 지방에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여종하나를 만났을 때 그녀가 바울의 일행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고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추켜세우자 바울은 이것이 그녀에게 역사하는 귀신이 소행임을 분별하고 악령을 쫓아내었는데(행 16:16-18), 이렇듯 이들이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적은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서 대처하기가 용이하지만 교묘하게 가장하여 공격하는 적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도리어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마귀의 활동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엡 6:10-12), 거짓 교리가 판을 치며(딤전 4:1), 성령의 사역을 모방하는 온갖 종류의 현상들이 난무한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다면 바로 영분별의 은사일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영들 분별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  (0) 2018.09.16
영분별의 은사를 가진 사람  (0) 2015.09.19
분별할 수 있는 능력  (2) 2015.03.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John은 남들이 알아주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4년간 가르치는 것과 그것을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모든 과정을 잘 배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뚜렷한 선교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빛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성경공부 반을 세우자 원주민들은 진지하게 열심을 보였고 추장과 많은 부족 어른들을 비롯하여 마을사람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학기 말이 다가올 때쯤 성경공부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원주민들이 선교사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John은 혹시 자신이 원주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아니면 무슨 문화적인 금기를 범한 것은 아닌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고 결국 추장을 설득하여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길 “당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말씀이 머리 속에 속속 들어와,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묻자, 추장은 “성경공부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성경공부를 다녀온 밤에 우리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귀신들에 대해 처리하는 방법을 당신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추장과 대화를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John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젊은 선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은 잘 배웠지만 그 마을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는 영적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고 이것은 오늘날 교리와 전통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앙생활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요한삼서 2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엡 6:10-13), 이 전쟁은 인간을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끌고 가는 치열한 싸움으로 주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히 12:4).  무엇보다도 지식적인 성경공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귀신에게 너무 시달려서 자살하고 싶다든지, 방금 암 진단을 받은 사람, 혹은 감정에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성경공부만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성경공부를 포함한 봉사와 친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를 했지만 그곳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과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에 대해(고전 12:7-11),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전쟁에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 암 말기 환자 한분이 대학생 아들과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집사님으로 그 당시 머리카락은 다 빠진 상태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집사님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성경공부와 말씀으로만 양육을 시켰고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해서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처럼(약 5:14-16),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고 사실 정식 신학교육은 받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경험이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분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회자에게 간다고 말을 하면서 교회를 떠났을 때 그때에는 담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성경에 나오지만 치유사역(막 16:18, 고전 12:9)에 대한 무지함 그리고 교회 전통과 대학원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으로 인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조금만 더 일찍 성령의 능력사역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표현한 분으로 묘사하는데(요 1:18), 예수님은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을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7).  이 말씀의 의미는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40편을 기독론적으로 사용한 구절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완벽한 참 제사의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히 10:14).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마 4:23),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마 9:35, 10:1, 막 1:34), 예수님의 사역은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마 14:14).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는 것(마 4:23-24)과 귀신들린 사람(막 5:1-20)을 치유하는 것이었고(막 9:14-29), 주님은 제자들(눅 9:1-6)과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치유사역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막 16:17-18).  이렇듯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지상사역 때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히 13:8),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눅 5:17, 요 14:12),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마 8:3).

'성령의 은사 > 병 고치는 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0) 2016.04.16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0) 2016.01.30
육체의 질병  (1) 2015.10.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늘날 유행이 얼굴은 물론, 머리 모양과 옷 모양, 그리고 얼굴 화장과 말투와 행동까지 엇비슷하여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쉽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눈으로 보이는 육적 존재가 이러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잘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와 가짜를 쉽게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5:11-14).  예수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셨고( 24:5), 사도 바울도 사단이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는데(고후 11:14), 사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이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고(딤전 4:1), 특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초자연적인 현상들, 즉 ‘선’을 가장한 ‘악’을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동일한 기적과 이적 현상들을 놓고 보는 시각에 따라 ‘사단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과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 즉 ‘영들 분별함’이 없이(고전 12:10),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좁은 신학적 지식과 신앙, 그리고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는 영분별이 요구되는 분야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많은 상황들은( 6:10-13), 그렇게 분명하게 흑백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무엇인가 확실하게 올바른 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고 과정들 가운데 성령의 다스림( 8:14-16)과 지도하심이 요구되는(고전 2:10-13),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에 대해 개발하도록 격려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은사를 개발한다는 말에 오해 없기를), 이 은사가 비은사주의자들,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강단에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탁한 세상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4:11-16), 반드시 영분별의 은사가 꼭 필요한 은사이고,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방해하는 악한 영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판별해 낼 수 있고( 5:1-10), 어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 바리새인처럼 싸잡아서 매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12:22-37),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부터 나온 것인지( 11:20), 아니면 개인의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8:9-11), 또는 귀신들의 역사인지를( 16:16-18), 확실하게 분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The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의 한 사람인 Petrus Octavianus가 독일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 말씀을 증거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에 어떤 한 사람이 일어나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Octavianus는 그 사람을 향해 조용히 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후에 그는 동료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영분별을 위해 주님께 기도한 후 그 사람의 방언 기도가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다”  이 사건은 『Occult ABC』의 저자이며 수십 년 간 축귀사역을 감당했던 Kurt E. Koch 박사가 쓴 『Charismatic Gift』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Octavianus에게 긴급 상황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임무중 하나인 거짓은사를 방지할 영분별의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강신술사였던 Raphael Gasson 역시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모방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단이 어떻게 자신에게 예언하는 힘을 주는지를 회상하면서, 대부분의 거짓 예언과 영분별의 은사에 대한 거짓 모방은 일종의 ‘투시력’이나 ‘투청력’,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까지 마귀에 의해 교묘하게 모방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영분별의 은사는 사모해야 할 은사이고(고전 14;1), 물론 그 은사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고전 12:29-30), 초자연적 존재이며 엄청난 세력을 가진 사단과의 전쟁에 있어( 6:10-13),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모든 교회에게( 20:28), 필요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무엇보다 영분별의 은사가 다른 모든 은사에게 필요한 이유는 방언에는(고전 12:10), 마귀가 주는 방언과 심리적으로 유발된 방언,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있고, 예언에도(고전 12:10), 예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9:1, 삼상 10:18),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인지( 13:17, 23:26), 또는 귀신의 역사인지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23:13).  이렇듯 영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와(고전 12:4-11), 악령의 역사를(삼상 28:3-20), 구별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은사들을 대할 때 그 출처가 성령을 통해서인지 악령을 통해서인지 혹은 인간의 심리나 최면인지를 구별하여 내는데, 이것은 배워서 익힌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고전 12:11), 그 시에 테스트 없이 직감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영분별의 은사’는 오늘날처럼 거짓교리와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 귀신의 역사가 판을 치는 혼탁한 현대 교회에 꼭 필요한 은사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영들 분별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  (0) 2018.09.16
영분별의 은사를 가진 사람  (0) 2015.09.19
영들 분별함  (0) 2015.06.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혀가 말리는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나서 자신의 의지로 절제하고 거부했을 때 혀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에 일어났던 현상이 아내에게 다시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내는 그때도 역시 놀라 기도하다가 말고 응접실로 뛰어나와 묻기를 혀가 자꾸 말리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주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기도할 때 혀에 너무 힘을 주고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한 번도 사모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고전 12:7).  아내는 그때 성령께서 주신 방언(고전 12:11)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방언을 하면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고전 14:28), 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볼 때(갈 5:22-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아내가 방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성경적이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방언을 점화시킨 것으로 보인 사건은 1900년 12월31일 Topeka, Kansas 신년 집회에서 시작되었는데 Stanley H. Frodsham의 『With Signs Following』에 의하면 벧엘 신학교 ‘기도의 탑’이라고 알려진 방에서 학생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세 시간씩 교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적)기도를 드렸고 이렇게 학생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방언을 통해 여러 학생들에게 임했고 그 후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Roger Stonstad는 『Spirit, Scripture and Theology』에서 당시 학생들이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부흥사로 활동했던 이 학교 교장인 Charles Fox Parham이 El Dorado Springs, Missouri에 이어 Houston, Texas에서 “성령이 가장 두드러진 해석, 신학과 변증”이라는 설교를 할 때 그곳에 참석했던 William J. Seymour는 Parham의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Los Angeles에 있는 Azusa 거리에서 1906년 4월9일 월요일, 자신과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버려진 감리교 교회에서 매일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Douglas J. Nleson은『The Black Face of Church Renewal』에서 그 결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하심과 같았다고 말하면서 2년 후인 1908년에 이 운동이 거의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순절교회의 탄생 과정은 아무런 반대가 없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Topeka의 운동과 Azusa의 부흥운동은 많은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의 의해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부되었고 일부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루터교회 안에서는 이 운동을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양분되었는데 특히 반대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마귀적이라고 비난하면서 1909년 오순절 부흥 운동을 반대하는 “베를린 선언문”(Declaration of Berlin)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던 독일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사라졌고 이렇게 조롱을 받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20세기에 들어와 오순절 지도자들 중에 한 사람인 Thomas F. Zimmerman과 오순절 운동의 대변인으로 평가받는 David J. Du Plessis에 의해 일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사귐을 갖게 되면서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통해 Van Nuy, California 성공회 사제인 Dennis Bennett으로 부터 시작된 제2의 물결인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 그리고 John Wimbur에 의해 일어나고 Peter Wagner가 명명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초교파적으로 확산된 제3의 ‘물결운동’(The Third Wave)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거나 칼빈주의 신학에 병적으로 집착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은사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사도시대 마지막에 중단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하겠지만 오늘날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자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 이상 방언만이 최고의 영성이거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고전 12:30),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는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행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는 없고(롬 1:16),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이지(고전 1:18), 어떤 특정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5:24).  물론 방언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개인의 경건생활, 즉 자기 덕을 세우는데 있어(고전 14:4), 방언만큼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금지해야 될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에 따라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고전 14:39).  그래서 우리는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영성의 전부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언  (0) 2015.09.12
가짜 방언 v 진짜 방언  (0) 2015.08.29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0) 2014.12.13
귀중한 은사 '방언'  (0) 2014.08.23
통역되지 않는 방언  (0) 2014.06.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드리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주장을 하는데(고전 14:15),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란(엡 6:18),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처럼 어떤 초월적이고 몸에서 벗어난 탈혼적 체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신자의 영을 통해(고전 14:14),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26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기도이고 또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살전 2:4), 성령의 마음을 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롬 8:27).  물론 이 기도와 관련하여 Wayne Grudem은 “우리의 탄식이 효과적인 기도가 되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지 방언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만, 아무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어디에서도 방언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제안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말임을 언급하고 있고(고전 14:28),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때문에 방언은 말하는 자의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며(고전 14:14), 또한 통역이 없이는(고전 14:28), 지혜롭게 사용하되 교회 공동체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고전 14:4-5, 15-1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고전 14:26),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가 방언을 실제적인 ‘지상의 언어’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10-12절에서 제시된 ‘세상에 소리’에 대한 비유를 통해 방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 혹은 천사의 말로(고전 13:1), 표현한 것을 보면 방언은 지상의 언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Grant Osbome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합법적으로 주시는 정식 은사”이긴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통역 없이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의 ‘다른 방언’(행 2:4)과 고린도교회의 ‘방언’(고전 14장)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방언이라는 단어가 지상에서 다른 나라의 말, 즉 사람들이 이해하는 ‘구어’(口語)이며 ‘살아있는 언어’로 가리키는 경우는 단 한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 사건인 경우이고(행 2:4, 6-8), 신약성경에 그 외에 모든 경우를 살펴보면 그 단어는 누구도 모르는 "천사의 말/신령한 언어"(고전 13:1, 14:2)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서 나오는 ‘다른 방언’의 이적을 구원사적으로 보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언어의 혼잡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범죄로 오게 된 “바벨탑의 저주”(언어의 혼잡/창 11:7)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하나 되어 전 세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나라 말(모국어)을 들었기 때문인데(행 2:5-11), 이 사건을 가지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Calvin은 제자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로 청중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언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알 수 없는 언어라고 해석하는 Abraham Kuyper는 제자들은 한 가지 언어를 말했지만 듣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제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청취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이 없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지(행 2:4, 6, 8), 그곳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는 자들이나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사용되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성령의 능력으로 외국어 배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그 순간에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Simon J. Kistemaker는 『The Testament Commentary』에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과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을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언어는 통변이 되어야 하지만 오순절의 청중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통해 사용되었던 다른 방언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 즉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방언과는 다른 언어들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방언’이고, 고린도교회 방언은 공적으로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행 2장),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을 통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행 8장), 그리고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행 10장).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두 곳은 방언의 현상이 동반되었고, 또한 방언이 사마리아와 관련하여 언급되지 않더라도 복음전파에 대한 기초 작업이 사도행전 1장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놓아졌다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의 방언은 바벨탑에 대한 처방이며 복음에 보편성에 대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언급한(고전 14:21),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사 28:11)에 대한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Palmer Robertson『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을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신 28:49-50), 나타내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옛 언약에 속한 백성에게 내리셨다면 그분은 새 언약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중대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라고 해석하고, Richard Gaffin 역시 이사야의 예언이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의 거울로 삼은 것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중예배 시(고전 14:26), 이 원칙을 적용시켰는데 즉, 통역 없이 방언하는 것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며 유다를 침범했던 이방나라들처럼 불신자들에게는 방언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통역 없는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한 심판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고전 14:22), 만일 외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방언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부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표적의 은사로 이 방언의 기능은 1세기에만 유효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만일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몸의 유익에 기여하며(고전 12:7), 자기 덕을 세우는 방언(고전 14:4)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39).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신자들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고전 14:26), 누군가 방언을 하면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고전 14: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사야 28장11절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불신자들을 교회 내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위험성, 즉 공적모임에서 통역 없이 사용되는 방언에 대한 남용/오용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지 방언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4:18).  그러기 때문에 방언을 초대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 은사를 개인의 기도생활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들 모두가 미혹의 영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언  (0) 2015.09.12
가짜 방언 v 진짜 방언  (0) 2015.08.29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0) 2015.02.14
귀중한 은사 '방언'  (0) 2014.08.23
통역되지 않는 방언  (0) 2014.06.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서 찾거나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사실 종교 개혁자들이 남긴 유산들 중에 위대한 것이 있다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사적 해석의 원리를 들 수 있고, Martin Luther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문맹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적 해석의 문제로 자신의 이단성에 대해 1521년 4월17일 재판이 열렸던 독일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 로마 제국의 의회에서 자신의 글들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서와 이성에 근거해 오류가 없는 한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에 Luther는 개인에게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비록 독일인들에게는 그가 영웅이었으나 보름스 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비쳐진 그를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화된 현대 교회에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가 주장한 사적인 해석 원리가 극단적 주관주의를 허용하는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에 넣어 해석하려는 악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죄성 때문에 성경 속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D. A. Carson은 『Exegetical Fallacies』에서 “해석자 자기대로는 본문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자주 단순히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고 있다. 만약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교사들과 목사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배운 정통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읽거나 해석할 때 편견 없이 분문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기발함보다는 본문에 충실하려는 열망과 함께 공평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류에 빠지는 전문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분야에 연결시키고 싶어 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실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 결과 그들은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학자와 목사들 중에 성경이 다른 부분을 배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과장하거나 무절제한 사변과 주관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 논쟁이 심한 ‘방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은 Athanasius, Augustine, Anselm, Luther, Calvin, Jonathan Edwards, Charles Spurgeon 등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 주로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증거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30절‘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는 구절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물론 성령세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성령세례와 상관없이 방언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 C. Sproul는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그 증거로 방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고전 14:22),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특징적인 심판의 표시로(사 28:11-13),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고 옹알거리는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Palmer Robertson은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은 징조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사실상 방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방언은 계시의 한 양식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는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보편적인 특징을 확립하는데 더 이상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 공급될지 모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언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보존하기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적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한마디로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계속되는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즐겨 사용하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을 사용했던 안 했던 간에 상관없이 어떤 주장을 사용하더라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다. 당신에게 방언이 없다는 가르침이 무슨 매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해도 방언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방언하지 않는 사람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방언에 대한 해석을 할 때 Carson이 말한 것처럼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exegesis’(석의)와 ‘eisegesis’(자기해석)을 구분하지 못해 성경을 해석할 때 오류와 왜곡을 낳게 되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어 해석하려는 주관주의의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놓고『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어떤 이가 성경의 일부분을 제거한다면 몹시 통탄할 만한 범죄이다.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방언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방언을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언어이기 때문에(행 2:4),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Wayne Grudem은 방언 말하는 것(고전 14:15, 18, 28)은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  따라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살전 5:21), 만일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자신의 덕을 세우는(고전 14:4), 이 귀중한 은사를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11).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언  (0) 2015.09.12
가짜 방언 v 진짜 방언  (0) 2015.08.29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0) 2015.02.14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0) 2014.12.13
통역되지 않는 방언  (0) 2014.06.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신앙생활을 한지 4-5년이 지날 때쯤, 3년간 미국 남부지방 시골 동네에 살면서 처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가졌던 미국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교회를 다니면서 세 번 놀라운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예배 시간에 어떤 나이가 지그시 드신 목사님께서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 때에 이백 명 이상의 성도들 가운데 한 여자 성도가 일어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때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회중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 여성의 방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성이 방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얼마 후에 남자 성도가 일어나 그 여성이 방언으로 말했던 것을 통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성도가 한 문장씩 통역할 때마다 목사와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방언통역이 끝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성령의 은사로 문제가 많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꿈같은 일이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고 호기심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보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예배가 무질서와 혼란 속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속에서 화평으로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는 공동체 안에서 방언이 지닌 역할에 대해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방언은 성령으로 감동된 말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7절과 11절 그리고 142절에서 분명해진다. 현대 교회 안에서 방언을 제자리에 두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즉 방언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결코 방언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비난하지도 않고 방언에 대해 경의감도 갖지도 않는다.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 받은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바울은 방언이 적절한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존중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고전 14:16),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통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고전 14:2, 14-5, 28),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공적인 모임에서의 방언사용과 관련해서 방언을 정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지 않은 것처럼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공적인 모임 안에서 남용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Fee가 이렇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에 Richard Gaffin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 대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방언도 역시 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이지만 예언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다시 말해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고 더욱이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그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 해석적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시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21:42-43)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38-13절 말씀을 가지고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기 때문에 방언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가르침은 지나친 견해이며 오류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28:11-12), 교회 창설기 때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중지된 은사이기에 그러한 가짜 영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은혜의 방편인 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Gaffin의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무질서하게 은사를 남용하거나(고전 13:1-3), 아니면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히 초청받은 사역자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할 때(고전 14:13), 그것이 무슨 대단한 영성인 것처럼 교인들도 같이 열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Michael Green은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는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것을 영성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찾아보면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던 사역자들이 초기에는 사역을 잘하다가 끝에 가서 비난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Tertullian이 가장 많이 지지했던 Montanus와 같은 사람은 말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일을 통해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금기시 했고 오직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역사동안 따돌림을 받았던 성령신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대교회 실정이기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겠지만(고전 14:39),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되지 않는다면(고전 14:5),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처럼 그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해(고전 14:4), 사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언  (0) 2015.09.12
가짜 방언 v 진짜 방언  (0) 2015.08.29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0) 2015.02.14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0) 2014.12.13
귀중한 은사 '방언'  (0) 2014.08.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