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봄에 루이스가 몹시 아팠을 때,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었다.  절친한 친구의 아파트에 홀로 앉아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후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줄곧 방언기도를 해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26-27절에서 언급한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 방언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절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처럼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한 가지 아주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증은 『Holy Fire』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침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R. T. Kendall의 고백인데, 그는 Lloyd Jones 목사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감당한 목사로 수 십 권의 책을 저술하고 성령의 역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강해설교와 거리에서 전도할 때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입니다.  이 분은 2002년 은퇴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Kendall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마귀의 주술에 걸려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을 부정하는 Palmer Robertson는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는 언급은 없다. 이는 신약의 방언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나누어 주는 다른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방언 현상은 신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해 진다. 사적인 방언은 신약의 방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신약의 방언은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28절의 말씀에 대해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는 이상 자신을 자제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신 안에서 말한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방언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소리를 냄으로 긴장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증언할지 모른다. 그가 사용한 기도언어는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을 맞닥뜨려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다.”  사실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Richard B. Gaffin 역시 방언기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 방언의 공용성(共用性)을 주로 다루었다.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구절들도 있다(4, 18, 19, 28절). 그렇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다. 대개 위의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방언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용(私用)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용(共用)으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용방언은 통역을 요구하는 공용방언과는 별도로 첨가되는 별개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용방언은 방언의 은사의 보조적이거나 주변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Palmer Robertson처럼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은사는 원래 계시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방언을 개인경건을 위해 쓸 수 있는 혜택도 덧붙여 받는다.” Calvin도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독교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솔직히 방언기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방언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John Stott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바울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한 가지 은사만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하여 공동의 유익이 아닌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Stott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무엇보다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편(엡 6:17)에 서 있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주장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들은 자신들도 성경을 기초로 해서 방언기도에 대해 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우리는 오직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잠시 동안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영적인 세계로 끌어올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한 언어입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고린도전서 14장4절 말씀처럼 자신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이것이 2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 은사를 소유했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도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바울 자신이 그런 기도를 매우 자주했으므로 이 은사를 소중하게 여겼던 고린도 회중에게 그들 중 누구보다 자신이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14, 15, 28절).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전 14:4, 5, 15, 17, 18절).  이들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Michael Green 역시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은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방언이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방언이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별로 놀랄 말한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우는 방언과 교회를 세우는 예언을 세심하게 대조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다”라고 강조하고 있고(고전 14:7), Wayne A. Grudem도 방언기도에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4:5, 15, 18, 39절). 기도로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면 우리는 비록 방언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지라도 이 은사로 인하여 덕을 세우게 될 것을 기대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진리의 성령 편(요 16:13)에 서 있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자신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방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예배가 예언처럼 교회의 덕(고전 14:4)을 세워준다는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의 기원을 찾는다면 창세기 4장부터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교회의 덕을 세워준다는 말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분쟁하는 고린도교회(고전 3:3)나 물고 뜨고 싸우는 갈라디아교회처럼(갈 5:15),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공동체에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면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을 하셨습니다(시 29:2, 요 4:24).  그 이유는 먼저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사 43:7)과 찬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21),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엡 1:17-19), 선포되어지는 말씀(살전 2:13)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자라날 뿐 아니라(롬 10:17), 그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1).  한 마디로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출 20:24).  그렇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데(고전 14:4), 성령께서는 과연 필요하지 않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을까요?(고전 12:7).  확실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들은(고전 12:4), 교회뿐만 아니라(고전 14:26),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만(롬 15:18), 방언은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귀중한 은사이기에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체험한 방언의 은사  (0) 2015.09.26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언  (0) 2015.09.12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0) 2015.02.14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0) 2014.12.13
귀중한 은사 '방언'  (0) 2014.08.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