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예언'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6.12.03 신약의 예언은 설교인가?
  2. 2016.09.1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3. 2016.07.23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
  4. 2016.04.30 예언을 반드시 분별하라
  5. 2016.02.13 예언이 중요한 이유
  6. 2015.10.24 성취되지 않은 예언
  7. 2015.07.18 예언의 은사 2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현대교회에서 과연 예언이 필요한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먼저 성서적인 희랍 어원에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어휘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두 개의 희랍어가 영어 단어로는 ‘말씀’(word)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하나는 ‘로고스’이고(마 8:16), 다른 하나는 ‘레마’(마 4:4)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단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Bill Hamon 박사는 희랍어 학자들과 성서 신학자들 간에 이러한 단어들이 동의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가 벌어졌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각자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하면서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영원히 변하거나 폐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인(요 1:1, 14),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딤후 2:15), 반면에 ‘레마’를 사용할 때는 개별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롬 10:17),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구체적인 말씀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엡 6:17).  즉 로고스(빌 2:16)는 우물 안에 물과 같고, 레마(엡 5:26)는 우물에서 길어낸 한 통에 담긴 물과 같기 때문에 W. E. Vine 박사가 말한 것처럼 로고스는 절대로 변하거나 폐하지 않지만(요 4:50), 레마는 항상 로고스에 의존하고 “말씀에서 나온 한 말씀”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가져다주는 개별적 성경구절이라는 것입니다(행 11:15).


오늘날 “신약의 예언은 설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사람들은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 또는 “신약 선지자의 기능이 오늘날 설교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당시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이 설교의 기능을 대신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구절인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여’라는 구절을 가지고(행 15:32),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을 장려하고 격려하는 말씀이 설교라고 강조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Robertson and Plummer“예언은 반드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 3, 24, 30절 말씀을 제시하는데, 한 마디로 신약의 예언은 설교와 같은 것이지 별도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한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행 21:8-11), 이것도 설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앞으로 당할 일을 예언한 것이고, 바울도 성령을 통해 자신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행 20:22-23).


이 신약의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Dennis and Benett“설교는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영감 받은 지성과 훈련에 근거하지만 예언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출처는 영이지 지성이 아니라.”라고 말하며, Michael Haper도 예언과 설교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심으로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을 ‘계시’라고 말하는데(고전 14:30-31),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꼭 성경을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한 말을 의미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빌 3:15, 마 11:27),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주신 생각을 가리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생각은 한 개인의 평소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말하는 사람의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판단과 분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고전 14:29), 바울은 이러한 느낌이나 본능을 ‘계시’라고 칭하고(엡 1:17), 하나님께서 촉구하신 것을 교회의 회중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예언’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행 11:28, 21:4, 10-11, 요 11:51),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고 보아야 하고, 반면에 예언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본문해석(설명)과 삶의 적용이 있다면 그것은 신약성서의 용어로 ‘성경의 가르침’ 혹은 ‘설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Grudem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에서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약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 15:35, 11:26, 롬 2:21, 15:4),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내지는 설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롬 16:17, 딤후 2:2, 3:10), 우리는 이것을 ‘가르침/설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하여 준비에 의한 것이고, 예언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르침과 예언은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신약의 예언(고전 13:9)은 권위에 있어 회중 설교보다 앞서지 않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회중 예언(고전 14:26)은 언제나 성경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명령하였고(딤전 4:11, 6:2),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고 말했습니다(살후 2:15).


또한 디모데전서 5장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로들 중에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예언하는 장로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었고, 또 이들이 예언하기를 잘하며 확실한 예언에 견고하게 선 자들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딤전 3:2, 딛 1:9).  그리고 디모데는 지도자로서 자기 자신과 가르침을 잘 살피라는 권면을 바울에게서 받았지만(딤전 4:16), 예언을 삼가라는 권면을 받은 적은 없었고, 더 나아가 야고보는 예언하는 자들보다는 가르치는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했습니다(약 3:1).  쉽게 말하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설교 혹은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골 3:16, 히 5:12), Dennis and Benett가 말한 것처럼 “예언은 영감 받은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과 설교, 이 둘은 명백하게 구분이 되어 있고,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이지만(행 19:8-10, 딤후 2:2),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눅 1:67).  물론 잘 준비된 설교에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성령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적 요소가 혼합된 설교/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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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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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참으로 유익한 은사이긴 하지만(고전 14:3), 잘못 사용되면 주관론에 빠지기 쉬운 은사이기도 합니다.  2세기 말에 Montanism이 일어나면서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측면에 있어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Montanism은 지하 운동으로서 특히 기성교회에서 만연해 가는 형식주의와 세속성에 대해 저항하며 존속하였지만 문제는 이것이 너무 지나쳐 성경의 교훈보다 더 나아가게 되는 잘못된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또한 Edward Irving은 탁월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며 유능한 설교자이었으나 그가 1820년에 런던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 Robert Baxter는 영적인 사람으로 한동안 Irving Movement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이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아내와 자식과 직업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음성(계시)을 듣고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을 당시 그가 고백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과거보다 뜨거웠고 행복이 더 컸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는 것을 보고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속죄 등을 다 고백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그로부터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 마치 자신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권위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자신을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을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비록 크게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모든 생각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행동하거나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나 마귀의 탓으로 돌릴 뿐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조금도 참작하지 않는 믿음 같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매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므로 자신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점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경험을 초월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능가할 정도로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 없이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한 것처럼(시 13: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기간을 참고 견디어내야 했으며(시 28:1, 39:12, 83:1, 89:46, 109:1), 무엇보다도 구약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요구를 받는 대로 예언을 수시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군대장관들과 백성들은 자기들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바벨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난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알아봐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부탁했지만 기도한지 열흘 후에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42:1-7).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역시 오늘날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원할 때마다 받으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종종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고(고후 4: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9).  이것은 사도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분명한 지시를 받고 싶지만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든지 듣는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만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에게 있어 또 다른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과 실제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열매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마 7:15-20), 오히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분쟁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최악의 경우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나누었다는 의심쩍은 대화들을 교묘히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만약 자신의 신뢰성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상실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의 예언사역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있는 다른 교회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열린 교회의 지도자(목사)로부터 권면과 조언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거부감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겠지만(고전 10:24, 1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그 귀중한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그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고, 더 심하면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는 가운데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만이 항상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를 경계하는 가운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요일 4:1), 교회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정령주의와 체면술의 영향, 그리고 악령도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의지하거나 보도된 내용이 놀라움을 줄지라도 흔들리거나 주변사람들의 평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성령의 지시적인 인도함을 받아(행 8:26, 13:2), 성령께서 무슨 행동을 금지하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행 16:6-7).  이것은 바울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이 성령의 뜻이 아니었기에 막으신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되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물리쳐야 하며(살전 5:21),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는 가운데(마 12:32),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겠지만(살전 5:19), 항상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움직이겠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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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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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신내림을 받은 무당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 아니면 사도 바울 같이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자들과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것이 곁길로 가지 않는 가장 안정하고 바람직한 형태의 길이긴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형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요 5:37), 성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마 23:13-15).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Did the Power of the Spi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시대의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이들이 실수를 범하거나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을 거짓 예언자로 낙인을 찍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충동질하거나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 말의 의미는 거짓 예언자에게는 비록 예언이 잘 맞더라도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예언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예언하는 자가 실수하면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사이비나 이단들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이라는 단어는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행 7:37),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예언자의 대표이시며(눅 24:19, 요 4:19),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지만(요 14:6, 16:13), 여기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백성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그래서 더 이상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이나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신명기 18장15-22절 말씀을 인용한 예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을 거짓 선지자라 고 부르지도 않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하는 백성들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어떤 경우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십 오년을 더 살았고(왕하 20:1-7), 다른 하나는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그를 참 선지자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어떤 경우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각종 이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따라서 누군가 예언을 할 때 그 예언을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열매를 봐야 하는데(눅 6:44), 만약 예언하는 사람이 발람처럼 돈을 사랑하거나(벧전 2:15-16),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믿게 한다면 그를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렘 28:15).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사도행전 21장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를 죽이려 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리게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18장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만약 예언자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분명 사도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29),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지만 그를 거짓사도라고 말할지 않은 것처럼(갈 2:11-12), 우리도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더 나아가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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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대해 알지 못했을 당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신령(?)한 예언자가 어떤 사람을 놓고 예언을 하면서 그 사람이 병으로 일찍 죽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인지라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가 정확하게 예언을 한다고 믿었고 혹시 의심을 하고 판단하면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덫에 걸리기 쉬운데, 이것은 사단이 성도들을 흔히 미혹케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잘못된 예언을 들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딤후 4:6), 그 죽음을 알리신 하나님의 음성이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고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을 주지만(렘 1: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는 힘을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딤후 1:7).  그러므로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약 3:17, 빌 4:6-7, 요 16:33).

 

 

먼저, 우리는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이 예언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 주님의 음성인지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다시 말해 예언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고(겔 13:17), 어떤 예언은 사단이 속이려고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렘 23:13),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고전 14:29, 살전 5:20-21).  이 문제를 놓고 Lloyd Jones『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판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과 예언을 분별하고 시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언을 멸시함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모든 예언을 다 믿어서는 안 되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예언은 비록 하나님의 계시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선포되어… 예언자가 틀린 수도 있고, 해석을 잘못할 수도 있으며, 아무 때나 도전받고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마디로 Graham Cooke이 말한 것처럼 “분변하지 않고 예언을 허용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잘못된 예언은 성령의 은사에 관련된 주제에 많은 해악을 끼쳐왔기 때문에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R. T. Kendall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예언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떻게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아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들은 음성을 시험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중 하나는 먼저 성경으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은 말씀이 성경과 모순이 된다면 하나님은 성경에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예언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예언자가 정확한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벗어나서 하면 듣지 말아야 합니다(신 13장).  두 번째는 믿음이 일어나는지를 통해 시험하는 것인데,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언적인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일어나고 소망이 생깁니다(롬 10:17).  다시 말해 그 예언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솟아나게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대상 17장).  세 번째로 확인을 통해 받은 예언을 시험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딱 한번만 주시지 않고(욘 1:2, 2:1), 보통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주시는데(창 41:32),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때 받은 말씀을 확신시켜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닫는 것이 있고, 또 꿈과 환상을 볼 수 있으며(행 2:17-18),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됨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행 21:1-14).  마지막으로 경건한 지도자를 통해 시험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른 사역자의 증거, 즉 바른 예언자가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예언자는 미가야처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대하 18장).

 

 

물론, 이 네 가지 시험을 다 거쳤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과 예언을 해석하는 능력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체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벧후 1:20).  사실 성숙하고 바른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져야 하고 아무리 노련한 예언사역자라도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고전 13:9), 스스로 전문가인양 행동하려는 교만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오늘날 주의 자녀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행 2:17-18),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예언하는 사람은 항상 지도자의 권위 아래 이루어져야 함을 꼭 기억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대상 25장2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삽의 지휘 아래 예언을 하고 아삽은 왕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위계질서를 세우셨기 때문에(롬 13:1), 예언은 지도자(목회자)의 권위 아래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32-33, 40).  그리고 신약의 예언은 반드시 분별을 받아야 하며(고전 14:29), 물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이 없는 목회자는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이제 예언을 배워 나가는 사람은 경험 많은 사역자나 출석하는 지역 교회 목사에게 순복하여 성경으로 검증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예언의 은사는 예리하게 되어 많은 사람에게 크게 도움을 줄 것이고(고전 14:3), 진리의 말씀 위에서 바르게만 증거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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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계시(예언)와 찬양과 방언을 할 만큼 영적인 은사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지만(고전 14:26), 종종 그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과는(고전 14:12), 무관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시에 예언을 하기도 하고(고전 14:31),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메시지를 전하였는데(고전 14:28), 한마디로 은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혜와 질서가 결여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4:4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고 어떻게 해야 공적인 모임에서 은사를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가르치기는 했는데(고전 12-14),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은사들을 추구하지 말라거나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고전 14:39), 오히려 이미 은사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에게(고전 1:6),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전 14:1).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 1439절을 KJV으로 보면 예언의 은사를 ‘갈망’(Covet)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갈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으로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너무나 갖고 싶어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예언이 중요한 몇 가지 이유 중에 첫 번째이고, 이 예언의 은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범주 안에서(고전 13: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언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시기 때문인데, 사실 하나님께서 AD 95년까지만 말씀하시고 그 이후로는 침묵하시고 계시다는 개혁주의 신학을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제일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문제가 잘 풀렸는데,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명백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해서는 성경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3-15).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개인적인 방향을 결정할 때에는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A B라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곳으로 갈 것인지 저 곳으로 갈 것인지?, “직장을 옮겨야 되는데 이 직장과 저 직장 중 어느 곳을 택해야 하는지?” 등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에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2:13),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인데( 6:66-69),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려니 하는 추측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는 개인의 생각이나 정욕으로 행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4:13).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선한 뜻을 알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삼하 2:1), 그들의 발걸음을 환상( 18:9), ( 2:13),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예언적인 꿈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혹시 잘못되거나 미혹되지는 않을까 생각해서이지만( 24:11), 성경을 보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가장 흔한 방법 중에 하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첫 두 장만 봐도 하나님은 예언적인 꿈을 통해 다섯 번이나 방향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1:20, 2:12, 13, 19, 22).  무엇보다도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슨 특별한 공식에 의지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상담을 통해 방주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었고( 6:13-22),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경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1:2), 바울이 사도의 사명을 발견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해 얻은 것은 아닙니다( 9:3-7).  한마디로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13:8), 자기 자녀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10:27),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3:15), 바리새인처럼 불순종하고 마음이 완악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5:37).

 

예언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예언은 진리를 전달할 뿐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에스겔은 마른 뼈의 환상을 보고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예언을 하자 뼈들이 서로 맞춰지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37:7-10).  이것은 예언이 단지 깨달음과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생명과 능력이 풀어 놓아지고 처해진 상황에 엄청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예언을 지도했으며(딤전 1:18-19),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수나 삶의 환경들과 싸우기 위해 예언의 말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그 예를 구약성경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람 왕의 침략으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레위사람 하시엘에게 임하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예언하자 여호사밧은 그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받고 극적으로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쉽게 말하면 아람군대 앞에 울부짖고 두려워하고 전멸을 예상한 오합지졸과 같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시엘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용사들로 즉각 변화되어 노래를 부르며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대하 20:14-23).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언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Wayne A. Grudem은 “예언의 은사가 억제되거나 의심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기대를 유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은사에 대한 많은 잘못된 견해와 생각은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 예언을 하면 신경이 예민해져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잘못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벧후 2:1-3), 그래도 주님께서 바르게 쓰는 사역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도 기도할 때마다 기적이나 치유의 은사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온전하고( 4:12),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데( 5:18), 예언은 치유와 새롭게 되는 과정을 돕는 훌륭한 동반자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영을 소성시켜 주는 소중한 은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4:3).  따라서 예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이고(고전 14:1, 39), 성경은 이 은사에 대해 일시적이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폐하지 않으며(고전 13:10), 또한 멸시치 말고 그것을 자세히 분별하여 좋은 것으로 취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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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4:33).  여기서 ‘어지러움’이란 말은 ‘무질서’를 의미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 마지막 절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지금 현재 예언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지만 많은 교회들이 회중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들 가운데 주어지는 예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예언을 올바르게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가령 잘못 해석해서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엄청난 혼동과 함께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 문제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마 7:16)고 말씀하셨듯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그 은사에 사랑이 있는지(고전 13:1-3), 덕을 세우는지(고전 14:12, 26), 질서가 있는지(고전 14:33, 40),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지를 보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고전 10:31).  만일 이것에서 하나라도 벗어난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라(살후 2:9-10),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이라고 판단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고후 11:13-15).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처럼 예언적으로 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전히 유익함을 받고자 할 때 꼭 밟아야 할 단계가 있는데, 먼저 성경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행 17:11),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고(느 8:8), 마지막으로 듣고 배운 말씀을 삶속에 반드시 적용해야 합니다(요 14:21).  즉,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마 7:24-27).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것은 말씀은 받았지만 해석하는 것과 삶속에 적용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성경지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약 1:22).  마찬가지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예언의 말씀을 듣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요 10:27), 아니면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으며(겔 13:17, 렘 23:26), 또 어떤 예언은 원수가 속이려는 것도 있습니다(렘 23:13).  사실 예언은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하고(고전 14:29, 살전 5:20-21), 그런 다음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고 어떻게 삶 속에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언의 말씀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을 해야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가령 어떤 사람들 중에 자신에 대해서 굉장한 예언을 받으면 그것이 곧 바로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때로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은 가능성을 선포하는 것이지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누군가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이 주어질 때는 반드시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예언을 탁월한 예언사역자에게 받았을지라도 그 예언의 말씀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꿈을 꿀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지만 해석과 적용을 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성경은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있고(시 105:17-19), 그가 처음 꿈을 꾸고 나서(창 37장),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무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창 42:6).  또한 열국의 아비의 가능성을 지닌 아브라함도 그의 첫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해 무려 25년 이상을 기다렸으며(창 21:5), 다윗은 왕이 되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15년 이상을 광야에서 보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습니다(삼하 5:3).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맞게 예언을 받은 사람이 분별하고, 해석하고, 삶속에 적용해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예언은 조건적이며 그것을 받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으며 개인적 예언에는 도덕적인 규범이 따르는데 만일 예언을 받은 사람이 서투르게 반응하고 사울 왕처럼 불신앙에 차있거나(삼상 13:13, 15:11), 이스라엘 백성처럼 계속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히 3:15), 그 주어진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반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빼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에 끝나는 것처럼 예언이 성취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민 14:30).  뿐만 아니라 예언은 상징 속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아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주시면서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렘 24:1-3).  여기에 예언해석에 대한 일반원칙이 있는데 모든 해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그 무화과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무화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지 않았고 직접 하나님께 물어 그 뜻을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나(창 41장), 다니엘처럼(단 2, 4장), 해석의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뜻을 알 수도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있고, 만약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 그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말씀이 장래에 꼭 필요한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뜻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계시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해석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길과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계발되길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결국 그 예언을 해석해 주십니다(렘 29:13).  또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그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왜 이 계시를 주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느냐는 왜 그 예언이 주어졌는지를 기억하면 되는데 고린도전서 14장3절에 예언을 주시는 목적이 쓰여 있듯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셨을 때 적어도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과 비전을 줌으로 주님 안에서 덕을 세워주고, 또한 그들의 소명에 확실한 용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풀어놓아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고 치료합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이 성장하도록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거나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오늘날에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언에 관한 모든 해석은 진리의 말씀으로 걸러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삶의 기초이자 예언의 기준선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다시 말해 교훈이란 미명하에 사람의 입에서 나온 예언의 메시지를 기록된 말씀보다 우위에 두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성경 66권의 말씀보다 예언의 메시지를 더 높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벧후 1:19).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보고 듣고 또한 변화산의 확실한 체험을 가진 장본인이지만(마 17: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험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벧후 1:16-21).  한마디로 예언적 계시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근간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서 목회자들 중에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주어진 예언과 완성된 성경에 대한 차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는 계시(예언)와, 방언과 통역과 찬송과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고전 14:26), 사도 바울도 신약의 성도들에게 예언을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4: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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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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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거부하고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예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고 난 후에 뒤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환영하고 인정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의 현실이고 무엇보다도 ‘예언’한다고 하면 점쟁이가 점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나 자신도 오래 동안 그런 생각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언하는 사람을 만나면 미혹의 영에게 사로 잡혔던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의 삶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인데(마 7:20), 여기서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들 중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예언하는 사람의 열매 맺지 못하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주신 은사까지(고전 12:7),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과 판단 그리고 성령의 은사(엡 4:7)에 대한 무지함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얼마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강하게 새롭게 부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사도행전 2장17-18절에서 ‘내가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임한 결과 중 하나는 예언의 은사이고(고전 12:10),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10:27).  한 마디로 베드로처럼 예언의 말씀을 듣고 예언적인 꿈을 꾸며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0:9-16), 예언은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계시를 적절한 때 교회에 적절한 방법으로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고전 14:24-26).  이 예언에 대해 Jack Deere“예언은 하나님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하며, Peter Wagner“예언은 영적으로 감동된 발언”이며, Wayne A. Grudem“예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신 것을 말함”이라고 정의하고, Calvin 역시 고린도전서 12-14장을 해석하면서 “예언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독특하고 탁월한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이란 Gordon Fee가 말한 대로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의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계시 받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 삼으면서 교회 안에 예언의 역할은 끝났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오래 전 개혁주의 입장에서 나 자신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들의 고집하는 주장을 이해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8-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예언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구절에서 ‘온전한 것’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보듯 서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고전 13:12),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Grudem은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구약적인 표현으로(창 32:30, 출 33:11, 신 5:4),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도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Charles C. Ryrie 역시 온전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만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언은 주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고(요 10:2-5), 성경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믿는 자 모두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요 10:27).  한 마디로 양이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입니다(요 10:16).

 

그러면 여기서 오늘날에 하는 예언이 성경에 첨가돼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게 되는데, 사실 현재 주어진 예언적인 계시는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도 다르며, 이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되는 반면 성경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예언은 신뢰적인 측면에서도 성경과 다를 뿐 아니라 이 예언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의 그릇을 통해 주어지고 말하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 오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은 반드시 분변해야 하고(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합니다(살전 5:20-21).  이렇게 바울이 “분변하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고 좋은 것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인데(딤후 3:16-17), 여기서 ‘영감’이란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을 통해 주어졌지만 초자연적인 보호를 입어 혼탁함이나 오류가 전혀 없습니다(벧후 1:20-21).  즉, 성경의 원본에 적힌 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정확히 적은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시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1세기에 성경기록은 마감되었지만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만약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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