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Charies H. Spurgeon이 설교를 하다가 말고 잠시 멈추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주인에게서 몰래 훔쳤지”  예배가 끝난 뒤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젊은이가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청년은 가지고 있던 장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적질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 돌아가실 지도 모릅니다.” 이 간증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은 Spurgeon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신학과 교리를 잘 알아서 이런 초자연적인 정보(지식)를 알아낸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도 있습니다.  “언제가 음악당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군중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제화공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가게 문을 엽니다. 그 가게는 지난주일 아침에도 문을 열었고 그는 9펜스를 벌어 그 중에 4펜스를 이윤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영혼은 4펜스에 사단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음악당에서 나의 말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 외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내가 말한 것이 옳은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누군가를 지목해서 말한 그와 비슷한 수십 번의 사례를 더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Spurgeon의 체험들이 ‘사적인 계시’와 ‘성경의 계시’를 혼동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지속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항5조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이고, 더 나아가 Wayne Grudem과 D. A. Carson이 말하는 것처럼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설교할 때 사용했지만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의 실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Spurgeon의 신학과 사역을 후세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내용과 함께 살펴본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지식의 말씀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런 은사가 초대교회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잡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겠지만, 사실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Spurgeon 자신의 증언은 우연히도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러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영적인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케 만드는데 기여하는 불신과 배교, 그리고 신학적 무지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오늘날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지 판단하기 위한 최종적 기준은 성경말씀이지만(계 22:18-19), 문제는 교회사의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Augustine, Luther, Calvin, 등등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같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눅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말하거나 다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9-30).  그러기에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눅 11:52, 롬 11:33, 15:14, 고전 8:1, 엡 3:18, 빌 1:9, 3:8, 딤전 6:20, 벧후 1:6, 3:18), 사도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고전 12:8),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아홉 가지 은사들을 기록하면서(고전 12:8-10),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이 하나님의 신비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골 2:3)에 대해 풍성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계시된 비밀, 즉 지식 안에서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고전 1:5, 엡 4:13-16).  하지만 바울이 이 지식을 성령의 은사에 포함시켰을 때는 무엇인가 더 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2절 말씀인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라는 구절과 고린도전서 14장6절 말씀 ‘지식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유익하리요’라는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지식’(고전 12:8)이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적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이 은사를 받은 자안에서 자리 잡은 특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와서 듣는 이의 마음을 쪼개는 사적인 특별한 계시, 즉 초자연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성품을 알아보셨을 때(요 1:48)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으로 가져다주라고 하인을 명하셨을 때(요 2:1-12),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가지고 사용하셨고(요 4:18), 베드로에게도 이 은사가 있었으며(행 5:3-4, 9),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사 역시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왕하 5:20-26).  따라서 이 은사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개인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7).  그리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요한 은사이고(고전 12:11),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잘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훈련되어 있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무분별하게 시행하거나 혹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 없이 사용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은사이기도 합니다(고전 13장).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부담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약 1:17)인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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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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