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계시(예언)와 찬양과 방언을 할 만큼 영적인 은사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지만(고전 14:26), 종종 그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과는(고전 14:12), 무관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시에 예언을 하기도 하고(고전 14:31),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메시지를 전하였는데(고전 14:28), 한마디로 은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혜와 질서가 결여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4:4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고 어떻게 해야 공적인 모임에서 은사를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가르치기는 했는데(고전 12-14),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은사들을 추구하지 말라거나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고전 14:39), 오히려 이미 은사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에게(고전 1:6),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전 14:1).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 1439절을 KJV으로 보면 예언의 은사를 ‘갈망’(Covet)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갈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으로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너무나 갖고 싶어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예언이 중요한 몇 가지 이유 중에 첫 번째이고, 이 예언의 은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범주 안에서(고전 13: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언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시기 때문인데, 사실 하나님께서 AD 95년까지만 말씀하시고 그 이후로는 침묵하시고 계시다는 개혁주의 신학을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제일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문제가 잘 풀렸는데,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명백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해서는 성경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3-15).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개인적인 방향을 결정할 때에는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A B라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곳으로 갈 것인지 저 곳으로 갈 것인지?, “직장을 옮겨야 되는데 이 직장과 저 직장 중 어느 곳을 택해야 하는지?” 등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에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2:13),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인데( 6:66-69),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려니 하는 추측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는 개인의 생각이나 정욕으로 행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4:13).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선한 뜻을 알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삼하 2:1), 그들의 발걸음을 환상( 18:9), ( 2:13),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예언적인 꿈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혹시 잘못되거나 미혹되지는 않을까 생각해서이지만( 24:11), 성경을 보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가장 흔한 방법 중에 하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첫 두 장만 봐도 하나님은 예언적인 꿈을 통해 다섯 번이나 방향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1:20, 2:12, 13, 19, 22).  무엇보다도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슨 특별한 공식에 의지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상담을 통해 방주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었고( 6:13-22),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경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1:2), 바울이 사도의 사명을 발견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해 얻은 것은 아닙니다( 9:3-7).  한마디로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13:8), 자기 자녀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10:27),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3:15), 바리새인처럼 불순종하고 마음이 완악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5:37).

 

예언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예언은 진리를 전달할 뿐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에스겔은 마른 뼈의 환상을 보고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예언을 하자 뼈들이 서로 맞춰지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37:7-10).  이것은 예언이 단지 깨달음과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생명과 능력이 풀어 놓아지고 처해진 상황에 엄청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예언을 지도했으며(딤전 1:18-19),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수나 삶의 환경들과 싸우기 위해 예언의 말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그 예를 구약성경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람 왕의 침략으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레위사람 하시엘에게 임하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예언하자 여호사밧은 그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받고 극적으로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쉽게 말하면 아람군대 앞에 울부짖고 두려워하고 전멸을 예상한 오합지졸과 같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시엘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용사들로 즉각 변화되어 노래를 부르며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대하 20:14-23).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언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Wayne A. Grudem은 “예언의 은사가 억제되거나 의심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기대를 유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은사에 대한 많은 잘못된 견해와 생각은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 예언을 하면 신경이 예민해져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잘못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벧후 2:1-3), 그래도 주님께서 바르게 쓰는 사역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도 기도할 때마다 기적이나 치유의 은사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온전하고( 4:12),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데( 5:18), 예언은 치유와 새롭게 되는 과정을 돕는 훌륭한 동반자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영을 소성시켜 주는 소중한 은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4:3).  따라서 예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이고(고전 14:1, 39), 성경은 이 은사에 대해 일시적이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폐하지 않으며(고전 13:10), 또한 멸시치 말고 그것을 자세히 분별하여 좋은 것으로 취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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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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