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11.28 바리새인 기질
  2. 2015.11.25 구세주
  3. 2015.11.21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가?
  4. 2015.11.18 본질은 사랑입니다
  5. 2015.11.14 바알 편에 선 사람들
  6. 2015.11.11 어떻게 읽을 것인가?
  7. 2015.11.04 성경의 권위

바리새인 기질

은사중지론 2015. 11. 28. 16:05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 있는 John MacArthur는 복음주의 목회자로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신앙의 입장에 서서 눈(?)에 거슬리는 목회자들, 특히 Robert Schuller, Oral Roberts, Bill Hybels, Joel Osteen, Rick Warren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두 권의 책,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Strange Fire』에서 그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강도 높게 공격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순절에서 일어난 성령운동 전체를 기독교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른 ‘이상한 불’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라고 무지막지하게 비판을 가하면서 레위기 10장 1-2절에서 나오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다가 죽었던 사건을 들며 “오늘날 교회들을 향해 큰 경종을 울리는 두려운 사건”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분을 능멸하며 그분이 원하지 않으시는 방법으로 그분 앞에 나가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면서 “성령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고, 그분이 자의적이고 변덕스럽고 비성경적인 예배를 용인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거의 발악(發惡)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은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다른 불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이단/사이비 운동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사실 2년 전 MacArthur는 자신의 교회에서 ‘Strange Fire’라는 제목의 은사주의 운동 반대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집회의 현장에서 Mark Driscall 목사가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저서 『A Call to Resurgence: Will Christianity Have a Funeral or a Future?』을 소개하고 즉석에서 사인회를 열면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고, Fire School of Ministry의 설립자이며 Pensacola 부흥사역자 학교를 세운 Michael Brown 박사도 『Authentic Fire』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 있는 MacArthur는 바리새인 기질을 가지고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도가 지나치게 마치 대선후보로 나선 Donald Trump처럼 거침없는 막말을 쏟아내는데, 한 마디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귀신의 영으로 치부하고 은사주의 신학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거짓교사를 양산하는 잘못된 신학으로 온갖 형태의 이단사상을 만들어 낸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반면에 은사지속론 입장에 서 있는 Brown 박사는 분열보다는 사랑과 연합을 촉구하면서 부드럽고 겸손하게 MacArthur의 공격적인 비판에 답변하는 가운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오순절 운동이 기독교에 기여한 수많은 공헌들을 제시하고, 자신의 저서 『Authentic Fire』 Chapter 9에 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해야 할 하나님, 즉 종이에 기록된 말씀 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MacArthur처럼 이런 식의 교만에 중독된 언어는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데, Arnold A. Dallimore,『George Whitefield』Volume 1에 의하면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영적갱신 운동에서 크게 쓰임을 받았던 Ralph Erskine은 국교회의 느슨하고 냉랭한 영적분위기를 반대하면서 The Associate Presbytery를 결성할 계획을 가지고 돈독한 우의를 다졌던 George Whitefield에게 연합장로회에 가입할 것을 종용했지만 Whitefield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제안에 동의하지 않자 하루아침에 Erskine과의 관계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연합장로회는 1742년 한 소책자(고난 받는 남은 자들인 스코틀랜드 참 그리스도의 장로교회의 선언)를 통해 그를 “더럽고 추잡한 우상숭배자,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멧돼지 같은 야수”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에 담지 못할 언어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렇듯 이런 일들이 트집 잡기 좋아하는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데(요 8:6), 오순절 학자인 Vinson Synan 박사에 의하면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방언기도로 횡성수설 하는 영적인 소돔의 통치자”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악마숭배의 절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Lloyd Jones의 전임목사이며 알미니안주의와 세대주의적 색깔을 띠고 있는 Campbell Morgan 역시 오순절주의자들을 “사탄의 마지막 구토물”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3억 명의 은사주의자들이 있고, 오순절주의자/은사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말하는데, 만약 MacArthur가 말한 것처럼 이들 모두가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거짓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오늘날 교회를 향해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MacArthur 자신이 이들처럼 체험적인 신앙이 없고 기독교 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혈기와 분노를 가지고 과격한 목소리를 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들이 보기에는 오순절 은사운동 하는 사역자들이 거칠고도 꼴사나운 사람들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은사운동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질서를 파괴하는 잘못된 귀신의 역사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수준의 발언을 쏟아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제3세계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John White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때로는 무질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지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태풍과 같은 소동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걸림돌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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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평신도 훈련/묵상 2015. 11. 25. 15:26

훼방과 간음과 살인이 끔찍한 죄악들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거절하는 죄보다는 가볍다.

 

우리 모두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잃어버려야 할 경우에도

그리스도만은 간직하자.

그리고 친구들을 배반해야 될 경우에도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죄악을 구원하시려고 피와 땀을 흘리셨던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인 구세주만은 소중히 지키자.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구주를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찰스 H. 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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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방언에 대해 말할 때에 “방언하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도가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라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방언기도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유 20절).  즉, 방언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기도는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내 영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때에 말하는 것은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고전 14:27).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을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고전 14:9),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4:2).  만약 여기에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서 덕을 세우게 되는데(고전 14:12-13), Gordon Fee는 이 문제를 놓고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마음을 뛰어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믿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14-15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마음과 영, 모두로 기도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Michael Green 역시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못할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그분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고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이 기도를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요지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는 말로 기도하는 것과 알지 못하는 말(방언)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고전 14:15), 그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 아니라(행 10:31), 덕을 세우는데 있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4).  다시 말해 만약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개인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고전 14:5, 13, 26), 이 귀한 선물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는 우리의 영을 강건케 할 뿐 아니라 기도를 강력해지도록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어 기도해야 된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마음이 너무 피곤하거나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집중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정확히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롬 8:26), 성령께서 돕는 이 기도(유 20절)를 통해 어떠한 것도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영으로’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고전 14:16), 바울이 이 똑같은 용어를 에베소서 6장18절에서도 사용하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때 방언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의 언어인가?”라는 질문인데,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언과 관련해서 이 은사가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인간의 언어에만 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10:44-46, 19:1-6).  물론 오순절 날 방언을 시작으로 복음의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행 2:4), 이 은사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Harold Horton는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and The Gifts of the Spirit』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이 외국어의 형태로 방언의 은사를 받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성경에 의하면 오순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한 명이었고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람어나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한 방언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나라 방언으로 전해진 내용 ‘하나님의 큰일’(행 2:11)은 복음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말하는 것으로(고전 14:15),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행 2:12), 그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행 2:37-42), 이날 이들이 구원받은 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것이지(행 2:14-36), 외국어/방언을 듣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예루살렘 교회(행 2:1-13)와 고넬료 가정(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나타난(행 19:1-6) 방언만이 진짜방언이고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난 방언(고전 12-14장)은 백퍼센트 가짜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거나 쓰기도 어려운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tongue(단수)‘알려지지 않은 언어’(고린도 방언), 즉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기 때문에 거짓된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tongues(복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사도행전 방언) 즉, 외국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헬라어와 영어를 대조시켜 KJV(한글)만이 완벽하게 번역된 것처럼 강조(우상시)하는 Peter S. Ruckman(말씀보존학회)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은 서너 개 빼놓고 거의 ‘방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유독 KJV 만큼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단수에 원본에 없는 unknown을 추가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복수는 with tongues으로 번역하면서 단수는 ‘알려지지 않는 언어’이고 복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잘못된 것은 가령 나무(단수)를 나무들(복수)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단수나 복수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뜻이 달라져 하나는 ‘진짜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방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불신자)에게 하는 것”(고전 14:22)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솔직히 이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한다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여호와 증인들’처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분명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이 방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이 사람의 언어인 외국어라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면 “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는가?”(고전 14:13)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기도했다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고전 14:14)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만일 방언기도가 오순절 때와 같이 알려진 외국어라면 왜 사도 바울은 교회 외에 사적인 공간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즉, 고린도교회 방언은 알려진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 14:5)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이들의 주장대로 번역하면 ‘외국어로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으로 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말씀도 ‘외국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로 됩니다.  여기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알려진 외국어로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하는 것과 인간에게 이미 알려진 언어라면 그 언어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횡성수설 하거나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이 쓴 글에서 무지와 억지, 그리고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으려는 소름끼치는 자의적 성경해석(벧후 1:20-21)이 난무하고 방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은 성경이 증거 하듯 성령이 주신 귀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39).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 현대 방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 모두가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방언기도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귀신에게 속아 옹알거리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들이 말하는 악령(?)에게 더 강하고, 더 세게 다스림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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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한다는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예수님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은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바깥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에 대한 보상은

예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당신에게 한 표본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명령을 준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상반되게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표현 없이,

당신을 향한 자신의 뜻을

결코 당신의 인생에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에게서 차선의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본질상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죄에 빠져서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연단과 심판과 진노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연단은 항상 사랑에 근거합니다(히 12:6).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든지

그것이 항상 최선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다음 성경구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하고…’(요일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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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혼의 정의에 어긋나는 결혼증명서가 내 이름으로 발급되는 것은 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따를 수 없다.”  이 고백은 동성결혼 증명서 발급을 거부해 법정 구속된 켄터키 주 로완 카운티의 법원 서기인 Kim Davis가 한 말인데, 사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자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지면서 한편에서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환영을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타락의 길을 간다고 탄식하면서 모든 교회가 힘을 합쳐 대응할 것을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을 통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위대한 자유와 사상 속에서 피어난 큰 열매라고 추켜세우며 성경말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성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이천년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라는 정의는 좀 구태의연한 표현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고 동성애 문제를 종교가 아닌 인권적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은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죄”(레 18:22)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들의 입장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 주님 앞에서 겁없이 아주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을 할 때 그 말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조심해야 하는데(민 14:27), 사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겠지만(약 3:2), 함부로 급한 마음에서 말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조급한 생각으로 무엇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고(전 5:2), 입에서 내 뱉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잠언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말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2:36).  다시 말해 입으로 내뱉는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되고 그 말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기도 하고 또한 정죄함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7).  더 두려운 것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쉽게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가 안 되는 것처럼(고후 6:15), 하나님의 자녀는 소속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고(왕하 5:18), 예수님께서도 동성 간의 결혼을 한 번도 인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마 19:4-6),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위배가 되는 것입니다(레 20:13, 롬 1:26-27).

 

사실 불신자는 그리스도인과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탓하거나 논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이나 내뱉는 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거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란 없는데(막 9:40), 목사/신학자 중에 동성애에 대해 중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동성애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서 한 부류는 ‘타락한 동성애자들’, 다른 한 부류는 ‘타고난 동성애자들’이라고 부르면서 타락한 동성애자들은 마땅히 정죄 받아야 마땅하고 타고난 동성애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도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라고 아이러니한 이상한 논리를 폅니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계 22:18-19), 범죄한 자들을 사람 앞에서 꾸짖듯(딤전 5:20), 동성애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왜 정확하게 말해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암 5:13).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는 타고난 동성애자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마 19:4).  분명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창 1:28),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살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생겼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롬 1:24-27).

 

사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짧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인기성 발언하는 사람들이 탁월한 신학자/거룩한 목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만큼 분명하게 선을 그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정확하게 죄라고 말하지 못하고(겔 33:7-9),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라는 것입니다(갈 1:10).  즉 세상에 편승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기보다는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예로 들면서 동성애에 대해 아주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사실 말장난을 좋아하거나 인기에 편승해서 떠드는 사람치고 회색지대에 서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분명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라고 말하는데(고전 6:9), 왜 수다한 사람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고후 2:17).  다시 말해 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거짓선생처럼(고후 11:13-15), 성경말씀에 인간적인 쓸데없는 생각을 가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처럼(사 30:9-10), 귀에 솔깃한 말이나 거짓된 것을 좋아하는(딤후 4:3), 영적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서 인기 있는 이름난 목사의 잘못된 가르침을 선호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렘 5:31).

 

무엇보다도 동성애자들이 동성애 문화축제나 퍼레이드를 하는 목적이 자신들도 인권이 있고 이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즉 인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뿐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성행위 그 자체도 인정해 달라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그리스도인 중에 동성애자들을 향해 돌 던질만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을뿐더러(요 8:7), 각자의 삶에 자유와 권리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정죄할 수는 없지만(눅 6:37), 그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죄라고 확실히 말해주어야 할 것입니다(유 7절).  이것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요삼 1:11),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할(왕상 18:21), 주님의 자녀로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고 결코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딛 2:8).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레 20:7, 13), 주님께서 심판하실 이들을 우리가 판단할 이유가 없고(고전 5:13),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구절들을 언약백성(렘 31:31-34)이 아닌 자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만약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5:12).  다시 말해 언약백성이 아닌 불신 동성애자들은 하나님께 맡기지만 교회 안에 더러운 음행 죄들(고전 6:9)을 짓는 사람인 경우에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판단 받기를 싫어하거나 더러운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행할 경우 교회는 그러한 사람을 출교하는 것이 성경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마 18:15-17, 고전 5:13).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동성애자들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동성애자로서 오랫동안 죄악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동성애에 강력한 유혹에서 벗어나 결혼해서 정상적이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친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은 그렇게 타고난 것이 때문에 변화될 수 없다고 주장을 하겠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에(롬 1:16), 얼마든지 동성애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6:11).  솔직히 동성애 세계 속에서 벗어나 하루아침에 새사람이 되어 새롭게 적응하며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고 무엇보다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감과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생각, 그리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과 견디기 어려운 자신과의 싸움이 있겠지만, 만약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막 7:24-30),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편에서, 혹은 바알 편에 설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될 것이고(왕상 18:21),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마 6:24),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본색이 진리의 말씀 앞에 들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인해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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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것이 훈련생의 기본자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살아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고 그 뜻을 분별할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더 가슴 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의 가르침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삶은 매우 값진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받는 동안 성경을 읽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경우를 상상하면 앞이 깜깜해 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 글에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다음에 제시된 방법들을 통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1. 성경의 숲을 보고 나무를 보십시오.

성경의 숲을 보고 나무를 본다는 것은 성경을 구절이나 장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책별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별로 읽는다는 것은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그리고 가능하면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를 읽으면서 그 책의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읽으면서 저자가 이 성경을 기록하게 된 주된 동기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일까 집중해야 하며 명확히 파악될 때까지 몇 번이든 반복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자신이 파악한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십시오.  이렇게 요약한 문장들을 정리해 가다보면 어느새 성경 전체의 주제와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병행해서 읽으십시오.

대부분 경우 사람들은 성경을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읽어가거나 자신이 마음에 드는 책부터 읽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성경을 읽을 때 구약에서 약속되었던 내용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리고 신약에서는 어떤 새로운 약속이 주어졌는지를 확인하면서 읽으십시오.  구약과 신약을 함께 통독하는 습관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로마서와 목회서신을 함께 읽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과의 삶을 비교하면서 당신은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3. 성경의 상황과 당신의 상황을 병행하면서 읽으십시오.

성경은 지난 역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그 말씀이 갖는 의미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의 눈으로만 해석하다 보면 자칫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하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을 읽을 때 최소한 2천 년의 역사적 간격과 문화적 간격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거에 갇힌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시간과 문화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책 읽듯이 읽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 본문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몸으로 부딪치면서 바로 오늘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본문의 상황과 지금 당신의 상황을 병행하면서 읽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어느새 지성뿐 아니라 당신의 감성과 생활까지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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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교재 2권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복음과 교리, 생활이라는 삼중적 관계를 통해 연구하고 묵상하게 된다.  14주 동안 배우게 되는 내용들은 모두 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기독교의 진수에 속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다루는 2권1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깨닫고 성경의 완전성과 유기적 영감설을 이해하며, 성경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게 된다.  오늘날 사회 전반에서는 연장자, 상관, 가족, 학교, 국가 등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으며 교회 역시 이러한 도전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속에서 믿는 사람들은 무비판적인 묵종과 그에 비교되는 무비판적인 거부, 양자의 유혹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의 권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존 스토트의『성경의 권위』는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며 2권1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성경의 신적인 영감성과 그 권위를 받아들이는 주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충성심에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승낙의 필수적인 결과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 규정되며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의 어떠한 부분도 배제시킬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쳤는가?  예수님은 구약의 신적인 기원과 영원한 타당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여러 번 언급하였으며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간접적 증거를 추가하셨다.  또한 성경에 대해 단지 말씀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거하여 행동하셨다.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크게 세 가지 영역, 즉 개인적 의무와 공중사역, 그리고 공개논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 세 영역은 모두 한 결 같이 질문, 문제, 그리고 논쟁이 각각 있었는데 예수님은 성경에 의지해서 질문에 답하고 문제를 풀고 논쟁을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

 

신약에 대해서는 구약과 병행되는 신약성경이 기록될 것임을 예견하셨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기록되기를 원하셨고 사도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신중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에 대비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친히 임명하셨고 자신과 함께하는 역사적인 경험과 더불어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신약의 기록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셨고 또한 신약성경의 기록을 예비하셨다.  따라서 주된 문제는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련된 것이다.  그 분이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사도들을 임명하여 권위를 부여하여 너희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어찌 사도들이 쓴 신약을 배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약의 권위와 신약의 권위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궁극적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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