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성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의 이해력이 부족해서인데, 사실 신학교에서 배울 때 신학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성경해석학의 한 입장을 취하게 되고, 만약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면 결국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의 산물이며 그 관점이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장악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성경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성경관에 대해 그 정통성을 인정받거나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성경적 이신론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인격적인 하나님을 성경 안에 가두어 섬기는 경향이 있고 Jack Taylor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성경을 신격화’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려 예수님보다는 성경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고,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토의 핵심은 성경지식을 전달하는데 있기에 “성경적인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기도 합니다.  즉, 영적성장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이 성경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명사보다는 ‘성경적’이라는 형용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교제하기를 거부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분야에서는 자기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허접한 성경지식으로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정죄합니다(요 7:45-49).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에게 있어 최강의 적은 일반 유대인들이 아니고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철저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는데, 바리새인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이며(막 7:3), 사두개인은 신학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막 12:18), 서기관은 학자들이었습니다(마 23:2).  이들은 성경을 경외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연구한 사람들로 성경을 주관주의에서 보호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성경지식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들이었지만 막상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요 7:27), 심지어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요 11:53).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는 성경이 바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요 5:39),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편견, 그리고 죽어 있는 정통으로 인해 예수님이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7:40-43).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듯 종교적인 사람들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이미 단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요 9:16).  다시 말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미리 단정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기에 성경의 해석을 자신들의 믿고 있는 대로 단정 지은 것이고, 마찬가지로 유대 지도자들도 성경을 읽고 연구를 했지만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5:46-47).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해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전문가 노릇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워 가르치는 것(눅 11:52)은 지옥가기로 작정한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마 12:22-37), 솔직히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알아서 연구한 메마른 성경지식,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완벽한 정통주의”이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마 23:15), 그 연구도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편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마 23장).  물론 성경적 이신론자들도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의심 없이 믿지만(렘 32:20), 문제는 그러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더 많이 아는 것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의 충분성, 즉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길이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모든 것은 성경에 있고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한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성경해석의 열쇠는 성경자체로 성경이 성경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것 같지만 아주 잘못된 주장일 뿐 아니라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고(약 3:1, 벧후 3:16), 그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경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요 16:13), 그것이 바로 성경의 저자이신(벧후 1:20-21),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엡 1:17-19).  오늘날 이러한 오만과 신학적 편견 때문에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5:3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전문지식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우리를 가르쳐 주신 많은 교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 가르침의 결과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선생에게 배워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이들이 내리는 신학적인 어떤 주장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Thomas Erskine는 “성경을 신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성이 강하고 성경지식을 과신하면서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진 형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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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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