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10.31 결혼과 독신
  2. 2015.10.28 다양성
  3. 2015.10.24 성취되지 않은 예언
  4. 2015.10.21 성경적 국가관
  5. 2015.10.17 칼빈주의 신앙 1
  6. 2015.10.14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
  7. 2015.10.10 육체의 질병 1
  8. 2015.10.07 ‘죽은’ 정통
  9. 2015.10.03 가톨릭은 마리아를 섬기는가?

각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사실 많은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연분이 완벽하게 맞아서 사는 부부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낳고 살다보면 미운정과 고운정이 들어 무난한 한 쌍의 아름답고 성숙한 부부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상당수 결혼생활이 쓰라린 경험과 악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결혼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가 옥중에서 자기 조카의 결혼 축하를 위해 쓴 편지에서 결혼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간결하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써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인류를 영속시킬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네사랑은 네 자신의 소유물이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란다.”  Bonhoeffer의 말대로 결혼이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라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만약 결혼의 존엄성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담이 상대할 사람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이 불충분하고 부족한 상황으로 간주하신 것으로 여기서 ‘좋지 못하니’ 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이 그와 같은 상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일반 규칙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이 동반자의 관계는 결혼의 본질로서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돕는 배필 혹은 배우자인 그와 ‘한 몸’을 이루어 이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고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창 1:28).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반자인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좋지 못하니’라고 평한 남자의 독신 상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들이었고(창 2:19), 그러나 아담은 그것들에게서 외로움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적합한 동반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동반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을 원료로 사용하셨지만(창 2:7),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의 신체 여러 부위 가운데 심장에 가까이 위치한 갈빗대를 취했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서로 간의 인격에 있어 동등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 즉 성(性)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 됨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자의 성(性)에서 여자의 성(性)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안에는 본능적으로 서로 하나 되고 싶은 성적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를 볼 때 ‘이는 내 빼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고백을 한 것이고 그 결과 생겨난 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제도입니다(창 2:24).

 

이렇게 결혼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평가에서 나온 것이지만(창 2:18), 하나님은 몇몇 사람에게 친히 세운 규칙에서 예외를 두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독신의 은사를 주셔서 배우자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신 것이고(마 19:11-12), 사도 바울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고전 7:1)고 말한 적이 있듯이 비록 결혼이 하나님이 세우신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혼자 살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셨지만 이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독신을 강조하셨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까’라고 물을 때(마 19:10),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9:11), 이 대답에서 창세기 2장18절과 24절에서 주신 규칙에 예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관해서는 특별한 교훈을 하거나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 선포한 규칙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라는 말씀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다른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는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들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명령하셨는데(렘 16:2),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 바울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고전 7:7), 이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사는 것이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딤전 5:14).  물론 이들이 독신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았지만 만약 당시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렘 15장), 임박한 환난(고전 7:26, 29)이 없었다면 이들에게 독신의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결혼을 하도록 촉구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18절의 일반 규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예외는 특별한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정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고(고전 7:9), 반면에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데(고전 7:7), 만약 전자에 속한 사람이 일부러 결혼을 피하거나 후자에 속한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최선으로 행하시고(롬 11:29), 각 사람에게 무용한 은사를 한 번도 주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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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진리의 성령 2015. 10. 28. 14:33

『네 명의 소경과 코끼리』라는 인도의 우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네 명의 소경들이 동물원으로 코끼리를 구경하러 갔는데 한 소경이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겼네.”  그러자 두 번째 소경이 코를 잡아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코끼리란 놈은 뱀과 같이 생겼거든.”  이번에는 또 다른 소경이 다리를 만지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코끼리란 놈은 기둥같이 생겼어.”  그러자 마지막으로 옆에 듣고 있던 소경이 꼬리를 잡으며 말하기를 “무식한 놈들 같으니! 다들 틀렸어, 코끼리란 놈은 빗자루같이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네 명의 소경들은 서로 상대방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대면서 상대방을 비판하며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네 명의 소경들은 자기가 만져본 부분만을 이해했을 뿐 전체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새롭게 하는 것, 위에서 임하시는 것, 인 치시는 것, 채우시는 것, 은사를 주시는 것, 세례를 주시는 것, 말씀하시는 것, 인도하시는 것, 내주하시는 것, 가르치는 것 등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는 인격적인 성령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면만 알고 있다면(요 16:9), 병을 고치시는 성령(행 10:38)과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성령(고전 12:10-11),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시고(살후 2:13), 능력도 주시며(눅 24:49), 거듭나게 하시고(요 3:3-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도 해주십니다(롬 8:16).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다 알기 전에 성령에 대해 정말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입니다(고전 8:2).  이런 사람이 인도의 우화에 나오는 네 명의 소경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그 사역을 잘 알기 위해서 크게 두 범주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인데,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혹은 ‘간접사역’과 ‘직접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성령은 마음속에 거하심을 알 수 있는데, 에스겔서 36장27절과 로마서 8장9-13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19-20절의 말씀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이 더욱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화사역의 근본주체로 역사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초자연적인 역사들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말씀이나 기적적인 능력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조용한 사역인 순종의 중요성과 회개, 그리고 영적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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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4:33).  여기서 ‘어지러움’이란 말은 ‘무질서’를 의미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 마지막 절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지금 현재 예언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지만 많은 교회들이 회중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들 가운데 주어지는 예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예언을 올바르게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가령 잘못 해석해서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엄청난 혼동과 함께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 문제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마 7:16)고 말씀하셨듯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그 은사에 사랑이 있는지(고전 13:1-3), 덕을 세우는지(고전 14:12, 26), 질서가 있는지(고전 14:33, 40),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지를 보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고전 10:31).  만일 이것에서 하나라도 벗어난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라(살후 2:9-10),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이라고 판단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고후 11:13-15).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처럼 예언적으로 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전히 유익함을 받고자 할 때 꼭 밟아야 할 단계가 있는데, 먼저 성경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행 17:11),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고(느 8:8), 마지막으로 듣고 배운 말씀을 삶속에 반드시 적용해야 합니다(요 14:21).  즉,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마 7:24-27).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것은 말씀은 받았지만 해석하는 것과 삶속에 적용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성경지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약 1:22).  마찬가지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예언의 말씀을 듣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요 10:27), 아니면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으며(겔 13:17, 렘 23:26), 또 어떤 예언은 원수가 속이려는 것도 있습니다(렘 23:13).  사실 예언은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하고(고전 14:29, 살전 5:20-21), 그런 다음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고 어떻게 삶 속에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언의 말씀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을 해야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가령 어떤 사람들 중에 자신에 대해서 굉장한 예언을 받으면 그것이 곧 바로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때로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은 가능성을 선포하는 것이지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누군가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이 주어질 때는 반드시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예언을 탁월한 예언사역자에게 받았을지라도 그 예언의 말씀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꿈을 꿀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지만 해석과 적용을 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성경은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있고(시 105:17-19), 그가 처음 꿈을 꾸고 나서(창 37장),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무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창 42:6).  또한 열국의 아비의 가능성을 지닌 아브라함도 그의 첫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해 무려 25년 이상을 기다렸으며(창 21:5), 다윗은 왕이 되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15년 이상을 광야에서 보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습니다(삼하 5:3).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맞게 예언을 받은 사람이 분별하고, 해석하고, 삶속에 적용해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예언은 조건적이며 그것을 받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으며 개인적 예언에는 도덕적인 규범이 따르는데 만일 예언을 받은 사람이 서투르게 반응하고 사울 왕처럼 불신앙에 차있거나(삼상 13:13, 15:11), 이스라엘 백성처럼 계속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히 3:15), 그 주어진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반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빼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에 끝나는 것처럼 예언이 성취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민 14:30).  뿐만 아니라 예언은 상징 속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아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주시면서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렘 24:1-3).  여기에 예언해석에 대한 일반원칙이 있는데 모든 해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그 무화과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무화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지 않았고 직접 하나님께 물어 그 뜻을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나(창 41장), 다니엘처럼(단 2, 4장), 해석의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뜻을 알 수도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있고, 만약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 그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말씀이 장래에 꼭 필요한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뜻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계시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해석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길과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계발되길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결국 그 예언을 해석해 주십니다(렘 29:13).  또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그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왜 이 계시를 주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느냐는 왜 그 예언이 주어졌는지를 기억하면 되는데 고린도전서 14장3절에 예언을 주시는 목적이 쓰여 있듯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셨을 때 적어도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과 비전을 줌으로 주님 안에서 덕을 세워주고, 또한 그들의 소명에 확실한 용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풀어놓아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고 치료합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이 성장하도록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거나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오늘날에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언에 관한 모든 해석은 진리의 말씀으로 걸러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삶의 기초이자 예언의 기준선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다시 말해 교훈이란 미명하에 사람의 입에서 나온 예언의 메시지를 기록된 말씀보다 우위에 두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성경 66권의 말씀보다 예언의 메시지를 더 높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벧후 1:19).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보고 듣고 또한 변화산의 확실한 체험을 가진 장본인이지만(마 17: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험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벧후 1:16-21).  한마디로 예언적 계시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근간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서 목회자들 중에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주어진 예언과 완성된 성경에 대한 차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는 계시(예언)와, 방언과 통역과 찬송과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고전 14:26), 사도 바울도 신약의 성도들에게 예언을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4: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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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국가관

연구자료 2015. 10. 21. 13:27

이 세상을 다스릴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또한 그 주권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양되었고(마 28:18), 따라서 세상의 모든 국가는 그리스도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고 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들은 국가의 통치권에 굴복해야 한다(롬 13:1-7, 딛 3:1-2).  그리고 국가가 갖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공의(公儀)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악하고 탐욕스러운 이기심을 제어하여 하나님의 의(義)를 실현하는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곧 국가이다.  또한 국가는 국민의 복리(福利)를 도모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여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을 외치거나 소수의 집권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을 착취하거나 탄압하는 일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아무리 악한 국가와 정부라 할지라도 일단 그 주권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악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삿 9장).  그러므로 국민들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며 위정자가 잘못을 행할 경우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딤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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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신앙

은사중지론 2015. 10. 17. 13:58

‘육지의 캐비아’로 불리는 소고기 와규(和牛)는 일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고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육질이 연한데, Wagyu를 올린 불초밥은 정말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맛을 가진 아주 독특한 음식입니다.  물론 이 와규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음식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얼마든지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 음식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는 그 맛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와규를 한두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 음식에 대해 얼마든지 맛과 육질에 대한 평가를 바르게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 신학과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목사가 오순절 신학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와규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 음식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 같이 정신병에 일종인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에 걸려 허풍을 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오순절 신학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 그리도 잘 아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순절 신학이나 그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오순절 운동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한 마디로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방언으로 말하면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순절 신학을 논하려면 이쪽 계통에서 신학을 해보고 신앙생활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해보고 나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는 한국교회의 삼허현상(三虛現象)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평신도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현대 신학자/목회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고,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고, 거룩하지도 않은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외식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23:25-28).  사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행포는 다른 교단/교파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비판을 가하고 오직 칼빈주의 신앙만이 정통한 것처럼 심각한 태도를 취하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기질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 섣불리 이단시하거나 사이비라고 주장하지 말고 정식적인 공개토론을 통해 판결을 가리는 것이 좋은데, 이렇듯 단 한 번 만난 본적이 없는 사람을 비속어로 말한다면 뒷다마(담화)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몇 년 전 IHOP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 때 궁금하면 참지 못한 성격이고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이기에 가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무당 신 내리는 곳이고 거짓선지자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에 직접 가족들과 장시간 운전하는 가운데 34일 일정으로 참석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IHOP이 이단/사이비 집단이고 잘못된 영을 전파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Grandview, MO에 가서 Mike Bickle를 만나 이단이나 불건전한 집단인지 정식적으로 담론을 펼쳐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알게 된 Jack Deere 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타락(?)한 목사를 North Richland Hills, TX에 가면 만날 수 있는데 한 번 만나 대화를 나누면 흑백을 가릴 수 있을 것이고,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있는 노령의 Peter Wagner를 그분이 다녔던 교회가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서너 번 참석해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이 분을 요상한 기름부음 운동을 전하는 죽일 놈(?)으로 생각한다면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Lloyd Jones의 후임목사이고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하고 은사에 대해 활짝 열려 있는 R. T. Kendall Hendersonville, TN에 가면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과목인 열방대학(YWAM) Kona, Big Island에 있는데 그곳을 직접 방문하면 Loren Cunningham을 비롯해서 그쪽 간사들을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궁금했던 모든 것들이 단 번에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계통의 아프리카 선교사이며 치유와 방언의 은사를 복음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Reinhard Bonnke 역시 이단으로 생각한다면, 이 분이 해마다 미국을 서너 번 정도 방문을 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분의 가지고 있는 신학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역자들이 있지만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저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rumor)만 듣고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이들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12:8-12),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01:5, 고전 6:10).

 

여기서 오순절주의/은사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인 신학자/목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을 직접 만나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오늘날 사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 차근차근 대화해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만나 본적이 없거나 그곳을 방문해 본적이 없다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료나 뜬소문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쓸데없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는 세계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리는 것은 목사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고 솔직하게 그냥 체험해 본적이 없어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교인과 주님 앞에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영적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들이 행하는 일은 논쟁과 비판을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한 사탄의 교묘한 전술이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겠지만(딤전 1:13), 정작 이들에게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고( 7:20),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계속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교묘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육에 속한 일이지 성령의 일이 아닌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과 신학을 했지만 솔직히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 치고 균형 잡힌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을 거의 본적 없는데 이것이 나만이 가진 잘못된 시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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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이 점화되지 않으면 차가 움직일 수 없다.

누구나 알듯이 점화는 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점화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들은 감동을 받지도 못하고

다름 사람들에게 감동을 시키지도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성령의 불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더욱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는

야고보의 경고를 기억하라.

심판 날에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자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교회 직분자 양반,

당신이 성령의 불을 받았다면

내가 지금 지옥불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요”라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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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왼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만져보면 무슨 딱딱한 것이 있다고 해서 아내와 같이 만져보니 탁구공보다 약간 작은 종양(tumor)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프면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저희 가족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에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딸에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이 종양을 제거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요 14:12),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깨끗하게 고침 받을 것을 명령했습니다(눅 4:39).  물론 기도를 해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눅 5:17, 고전 12:11), 금방 나을 것 같았는데도 무려 2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여전히 종양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하던 대로 기도만 하고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큰 딸이 “아빠, 종양이 없어졌네!” 그러기에 손으로 만져보니까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종양을 제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느낀 것은 내 자녀가 종양 때문에 신경을 쓰고 손으로 누를 때마다 아프다고 할 때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질병(종양)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사 53:5), 신약에 와서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체의 질병을 다 짊어지셨다고 기록했으며(마 8:17),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벧전 2:24).  실제로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삼분의 일은 병자와 축귀사역에 시간을 보내셨는데(마 4:23), 만약 병자를 고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라면 승천하실 때 마지막 지상명령에 치유와 축귀사역을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고(막 16:15-18), 무엇보다도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약 5:14-16).  그리고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 2:28-29)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오순절 날 베드로는 이 말씀이 성취됐음을 선포했습니다(행 2:16-18).  이렇듯 구약시대와 달리 이제는 성령의 능력이 주의 백성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는 것, 그리고 예언과 주님의 음성 듣는 것과 환상과 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막 16:17-18, 행 2:17-19).  만약 이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비틀어진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직도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고전 2:14).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칼과 방패는 들었지만(엡 6:16-18), 전혀 사용할 줄을 모르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더라도 마음에 기쁨이 없이 무엇인가 눌려(행 10:38),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하는데(벧전 2:9), 왜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한사람은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질병으로 고생하며 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사람이 영육이 강건한 사람입니까?  만약, 온 몸에 각종 질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성경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하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이렇듯 예수님은 다양한 종류의 병과 여러 가지 유형의 질병들을 이미 고치셨기 때문에(마 9:35, 10:1, 막 1:34),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들 중에 이사야 53장5절 말씀을 오직 영혼구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육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원어에는 온전함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치유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가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육체와(출 23:25, 신 7:15), 감정과(시 147:3, 사 61:1-3), 영이(렘 3:22, 호 14:4), 모두 회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즉 헬라어 ‘소조’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110번 이상 나오는 단어로 ‘영혼구원’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8절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소조’로 사용하고 있고, 의사를 잘못 만나 돈을 탕진하고 몸을 망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온갖 고통을 당한 여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을 때 사용된 단어도 ‘소조’이고(마 9:21), 거라사 지방에서 평생을 귀신들려 벌거벗은 몸으로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귀신에게 완전히 놓여남을 받을 때 사용된 단어 역시 ‘소조’입니다(눅 8:36).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소조)은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에서의 고침과 귀신에게서의 자유함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환언하면 신약성경 요한삼서2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형통함과 육체의 건강까지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자녀가 질병으로 고생하며 사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모든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사회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도 똑같으실 것입니다(마 7:9-11).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요한삼서 2절).  만약 자신이 낳은 자녀가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아마도 그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낳지 않은 자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우리가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병들어 살 수도 있겠지만(요 11:4),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9:3). 우리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막 3:1-6).  가령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이들이 주님께로 나아가면 고쳐주실 것을 믿었을 때 예수님은 이들의 질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는데(막 7:24-30, 마 8:5-13), 하물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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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정통!

분명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복음적인 사람들 각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죽은 정통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합니다.

 

신약 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 생명력, 생생함, 활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그 감화력에서 멀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의 형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기에 빠진 교회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 더 형식적이 되고

예배 형식을 채용하여 

공기도서나 의식서로 돌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적 종교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여러분이 부흥을 만날 때마다

그러한 유의 모든 일들이 멈추게 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의식이나 공기도서나 절차나 예복이나 옷을 차려 입는 그런 일은 전혀 없고

다만 성령께 속한 자유와 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릅니다.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바로 이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에 성가대에 중점을 둡니다.

또 성가대와 성개대의 독창자들을 돈을 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가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을 프로그램화하려는

매우 무서운 성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 

강사 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순서지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즉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모든 것이 분초를 다투어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는 묻습니다.

그런 경우에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틈이 있습니까?

아니,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에 통제 당하는 대신

우리가 신앙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여 놓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로이드 존스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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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Mariology)은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교리학으로 그녀의 인격과 구속 계획, 특히 성육신에 관련하여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한다면 ① 마리아는 예수 출생 후에도 처녀성을 잃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죄 없는 삶을 일평생 살았다. ③ 마리아는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친 후 몸과 영혼이 승천하였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⑤ 마리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고 구속에 있어 예수와 함께 간접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개신교의 견해와 전혀 다른 구속에 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이고 이들은 이것을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옹호하고 있는데, 사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됨에 따라 ‘이교’(異敎)의 여신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와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4세기에는 ‘영원한 처녀성’ 주장과 431년에 개회된 에베소공의회에서 그녀를 ‘천주의 모친’으로 승인했지만 이런 마리아 예찬이 가톨릭에 의해 과도하게 행해지도록 된 것은 1854년 ‘무죄수태’ 교리와 1950년 ‘성모승천’을 교리로 선언함으로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눅 1:26-35), 문제는 교회에서 그녀의 상(像)을 중심으로 발전한 숭배에 대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명분이 역사나 신학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적 근거로 마 1:16, 13:55, 눅 1:27, 43, 요 2:1-5, 19:25, 행 1:14, 등을 마리아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들로 사용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녀에게 돌리는 영광과 역할에 대하여 지지하는 곳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침묵하고 있고 오히려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증거를 막 3:33-35, 눅 1:47, 2:49, 11:27-28 등에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및 유년의 기사들 외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마태는 주로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면서(마 1:16), 예수님이 잉태된 것은 두 사람이 정혼을 하되 아직 결혼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임을 분명히 밝혔으며(마 1:18-25),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진술은(마 1:25), 두 사람이 그 후에 정상적인 결혼생활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처음 두 장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라는 아기를 낳을 것을 ‘고지’(告知) 하였고(눅 1:26-38), 여기서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령이 잉태케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독특할 역할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모습과 천사가 그녀를 가리켜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닌 ‘은혜 받은 자여’라고(눅 1:28),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눅 1:39-56)과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일, 즉 목자들이 천사의 명령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눅 2:1-20), 이어서 할례를 받은 일(눅 2:21)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공헌한 일을 언급하고(눅 2:22-24), 성전에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 때문에 칼이 그녀의 영혼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25-35).  마지막으로 열두 살 때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눅 2:41-51), 여기서 마리아는 아이 예수에게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정 어린 꾸지람을 듣는데(눅 2:41-51), 비슷한 종류의 꾸지람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에도 나오고(요 2:1-11), 그 밖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사 중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간간히 기록되었을 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혈육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3:31-33, 눅 11:27-28).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던 일(요 19:25-27)과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성경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직 사도행전 1장14절에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마리아를 흠 없는 성모로서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내포할 뿐 아니라(출 20:4),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가톨릭에서 성스럽게 높이는 마리아가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서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처음에는 두 번씩 외웠고, 1986년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 의하여 두 번씩 되풀이하던 것을 지양하고 한번만을 외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평생토록 남자와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라고 선언했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지 않았고 많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네 형제들과(마 13:55), 그의 누이동생들이 나옵니다(마 13:56).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들은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마 12:46-50), ‘다른 친척’ 혹은 ‘이종사촌’이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치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가톨릭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역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섭리해서 원죄 없이 태어난 특전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성경에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기 3장15절누가복음 1장28절을 들고 나오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는 보지 않았고, 비록 1854년 교황 Pius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라고 선포했지만, Thomas Aquinas는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은 온 인류에 원죄가 없고(시 51:5, 롬 5:12), 자범죄가 없으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히 4:15).  한마디로 마리아가 원죄가 없고 죄 없이 거룩하게 살았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마리아가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는 ‘몽소승천’(夢召昇天) 교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성모승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 교리는 4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적 신약외경에 처음 나타나지만 7세기경에 이르러 동/서방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승천축일을 정해 지키기도 했으며 마침내 1950년 교황 Pius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까지도 승천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오순절 이후의 마리아의 생애에 대해 믿을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핵심적인 이유는 그녀를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토록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가 되고 그 모성이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선언했는데,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모친인 것은 맞지만(마 12:46), 천상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요 8:58),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에(빌 2:6),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마리아의 구원의 중보성 그리고 기도의 유효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들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을 내세우면서 마리아는 참된 중개자인 예수님을 낳은 모친이 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밀접하고 탁월한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녀가 주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문제를 위해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대사전을 인용한다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및 지상생애에서 이룬 구속행위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세말까지 그의 구원활동에 온전히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말해주듯이 초기 기독교 교부 중의 한 사람인 Epiphanius가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들과 싸웠고, 5세기에 들어서는 Nestorius 논쟁을 계기로 보편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Theotokos’ 즉, ‘하나님을 낳은 자’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개념으로 대두되었고, 이런 개념들은 그녀의 무원죄 잉태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주장에 의하면 하와(인류 타락의 원인)와 마리아(인류 구속의 원인) 간의 대조는 그녀가 구원경륜에서 중재역할을 맡고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섬김과 동시에 마리아에 대한 개념이 대중신앙에서 많이 강조되었고 아울러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개념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해괴망측하고 이상한 교리가 오늘날 가톨릭을 대변하는 것은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잘못된 사상으로 성경은 이를 지지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교리들은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발로’(發露)일 뿐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중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며(딤전 2:5),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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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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