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5.12.30 놀라운 회심 이야기
  2. 2015.12.23 두 가지
  3. 2015.12.19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4. 2015.12.16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5. 2015.12.12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점
  6. 2015.12.09 경험으로 아는 것
  7. 2015.12.05 이혼과 그리스도인
  8. 2015.12.02 George Muller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나면서부터 비참한 상태였다는 것과

자신들이 처해 있는 영원한 멸망의 위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사로잡게 되자

두 가지 결과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즉각 자신들의 죄악 된 행실을 버리게 되었고,

더 방탕한 사람들은 이전의 악과 방종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결과는 사람들이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회 예배와 사적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그들의 눈을 여셔서

마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깨닫게 하실 때,

사람들의 감정이 때로 어떻게 움직이며 반응하는가 보는 것은

아주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생각으로 좌절하고

죄책감 때문에 깊은 수렁에 잠겨

도무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 스스로 여겼었는데,

이제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심장이 방망이질 쳤습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기쁨과 뒤범벅되었습니다.

때로 그들은 혼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성령의 회심시키시는 역사는

신앙의 위대한 일들이 확실히 실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비상하게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일들이 얼마나 신성하고 탁월한지를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수백 권의 책에 담긴 논증을 읽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크게 확신시켜 줍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며 사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는 것은

그들이 받은 빛과 기쁨에 정비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비상하게 깨닫게 됨으로써

구별되었던 사람들이 잘난 척하거나 

스스로 대단한 척하거나

혹은 광신자들처럼 자족하는 분위기를 풍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온유함과, 온건함, 

자신을 불신하고 낮추는 영이 충만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재 속에 엎드리고 싶어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놀라운 회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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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진리의 성령 2015. 12. 23. 14:55

성경에서는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임하시고(행 2:1-4), 내려오시고(행 10:44), 부어진다는(욜 2:28-29),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역할 수 있도록 무장시키는 능력사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능력사역은 성령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령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할 때, 그들은 기적을 맛보게 되고 영적은사를 받게 됩니다(민 24:2-3, 삼상 10:10, 19:20-23, 요엘 2:28, 행 19:6).  성령의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은 전혀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며 역사하는 방법도 아주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삶속에서 이 두 가지 사역을 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역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주 안에서 성장시키며 죄를 이겨 거룩하게 만들지만,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무장시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며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잠재적 가능성을 다 표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 사역이 필수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령의 한부분만 바라보고 얻은 지식을 가지고 성령을 안다고 속단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분이시고 이런 분은 아니다.”  아니면  “성령은 이런 일을 하시지만 저런 일은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성숙하게 세워 가시는데 있어 그 방법이 감정적이지도 않고 경험적이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복음주의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이 나타나면 무조건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반면 은사주의 운동을 접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사역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치유와 예언의 말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사역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운동에 젖어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신자들 속에 “과연 성령이 있을까?”하고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교회가 두 가지 반대파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의 우화에 나오는 소경들처럼 자신들만이 체험한 것이 성령의 참모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사역이 다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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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말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야, 모든 것은 질서대로 해야지, 질서대로!”  그래서 교회는 마치 질서의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예배드릴 때마다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질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만(고전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질서란 인간들이 생각하거나 만들어낸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혼잡하지 않는 정리정돈이 잘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사 55:8-9).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성령(엡 4:30)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 그가 황홀경의 상태에서 하루 종일 알몸으로 춤추고 소리치며 예언을 했다고 성경은 증거 하는데(삼상 19:23-24), 솔직히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전혀 질서적이지 않고 귀신들린 사람(막 5:1-20), 혹은 노출증 환자나(사 20:1-6), 어떤 정신병자의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던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감에 있어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이지 성령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일을 차서를 따라 순서 있게(고전 14:27), 그리고 질서가 있어야 하고(고전 14:31), 동시에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살전 5:19).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 질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데, Lloyd Jones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모든 일을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그만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고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언제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프로그램에 매여 있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사실 Lloyd Jones가 쓴 『부흥』은 5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 꼭 한국/한인교회를 수십 차례 방문하고 나서 쓴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영적인 사람이라 앞으로 미래의 교회가 그렇게 되어 질 것을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 현실과 너무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오전 11시 시작해서 12시가 되면 예배를 마칩니다.  만약 설교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얼굴부터 굳어지고 찬양을 반복적으로 하면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데, 사실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물고문”“전기고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문(?)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 정확하게 11시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안절부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이미 율법주의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이고(갈 5:1), 이러한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의 특징은 예배를 드려도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감격이 없고, 혹시 주일예배 하루라도 빠지면 하나님이 진노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마음에 기쁨이 없고, 마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처럼 뜨거움도 없고 오직 형식과 제도에만 얽매여 있어 윤리적인 행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계 2:1-7).  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여섯 번째의 남자와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거기에다 율법적인 사고방식까지 매여 있으니 얼마나 예수님 보시기에 가련하고 불쌍해 보여겠습니까?  그 여자가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자(요 4:20), 주님이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1-24).  이 말씀은 앞으로 있을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을 말해줍니다(롬 12:1-2, 빌 3:3).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하고, 그리고 ‘진정’이란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진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한다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고전 15:1-4),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돌아가셨는지를(고전 11:24), 알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를(요 4:22),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서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입니다(요 4:20).  쉽게 말하면 교회에 가서 본인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지만 마당 뜰만 밟고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사 1:10-17).  여기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죄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서 드려지는 진실 되고 온전한 예배, 즉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눅 6:46), 성령 안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참된 예배를 말합니다(롬 12:1-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호 6:6).  예를 들어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 예배가 지겨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죄 용서함을 받은 감격이 없기 때문에 예배가 지겨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정해진 장소,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오늘날로 쉽게 말한다면 주일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주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지 않는다는 말일까요?(행 16:24-26, 20:7, 28:23, 느 8:1-3).  물론 좋은 전통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살후 2:15), 성경에는 오전11시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없을뿐더러,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교회전통은 거의 사람을 형식과 제도에 묶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 수 있고(막 7:1-23), 잘못된 전통은 영혼을 도적질하고(막 7:1-23), 심령을 메마르게 만들어 의식이나 형식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골 2:8).  그러나 우리는 신약교회의 예배를 통해 성령이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4장26절에 보면 당시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말하고,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하는데,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약교회의 예배는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셨습니다(빌 3:3).  요약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찬송과 가르치는 말씀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통역함도 있는데 바울은 이 토대 위에서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델은 어디에다 맞추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잘 인쇄된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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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더러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농부의 고대하던 쌀은 자라나지 않고 논에 갈대만 무성히 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 갈대가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부산 ‘을숙도’인가 하는 데를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놀러가서

거기에 핀 갈대를 보는 것은 멋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쌀이 자라야 할 그 자리에 무성하게 피어난 갈대는

농부들의 가슴에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갈대 같은 사람이라면 벌써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고 있고,

볼 상 사나운 사람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더러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꺼져 가는 등불은 주위를 제대로 밝히지 못합니다.

제 구실을 못하므로 심지가 타면서 연기가 잔뜩 피어 나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눈물 나게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칙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죽기 전에 꼭 심은 만치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 사람을 환장(?)하게 만듭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아픔을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우리 더러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저 놈 누가 안 잡아가나!”하고

이를 갈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 아내, 자녀, 부모 하나도 제대로 사랑 못해서

때마다 그들 마음을 박박 긁어 놓는 나에게 그분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와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과 도대체 연결이 되질 않습니다.

뭐, 좀 그럴 가능성이 있으면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이것은 완전히 ‘맹탕’입니다.

 

나는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인데,

그런 나에게 성경은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두 극단에 대한 갈등!

바로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만

원수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위장도 튼튼한데 울화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나는 도저히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러기에 성령의 도와주심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

이 마음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 갈등을 붙드시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아무리 세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어지럽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그분은 반드시 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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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감리교 신학대학 변선환 교수와 총신대학 박아론 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변 교수는『월간목회』를 통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논박했습니다.  변 교수는 다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박 교수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재차 맞섰으나 더 이상 논쟁이 전개되지 않고 중단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D. Bonhoeffer의 영향을 받은 변 교수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전통적인 종교의식, 즉 예배와 기도와 각족 모임을 통해서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세상의 삶속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한 참여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박 교수는 기독교가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세속을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세속교회, 또는 인류주의 교회관은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 대다수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구원을 어느 한 측면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그 전 과정을 각 단계별로 나누어서 취해진 진술 방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성경이 구원의 서정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알미니안 교회, 심지어 장로교회 안에서도 학자들 간에 이 견해에 대해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엡 2:8), 육체의 질병(마 9:21)과 귀신에게 놓여남을 받는(눅 8:36), 것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악, 즉 전쟁(출 15:2)과 고통(시 34:6)과 원수들(삼하 22:36), 그리고 포로(시 106:47)와 사망(시 6:4)과 죄(마 1:21)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으로 “구원은 총체적인 죄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내놓으신 확실한 해결책이고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기초한 과거의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딛 3:5), 별도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현재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며(고후 5:17), 장래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벧후 4:13).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소유하고 체험하지만 동시에 장래의 완성을 대망하는데(빌 2:12),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롬 8:21).  이같이 바울은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종말, 즉 삼중적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일련의 구속사건으로 이루어진 복음을(고전 15:1-4),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하고(롬 1:16),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벧전 1:18-19), 믿음에 의해서라는 진리를 선언했는데(엡 2:8-10), 이것은 바울신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구원의 근본조건이 믿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구원론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이(엡 2:8),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확산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열렸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람은 성화은총을 통해 내면적으로 칭의를 얻으며 값없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협력할 때만 선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믿음을 통해서만 구속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로마가톨릭주의를 대변하는 Ludwig Ott는 막연히 믿는 신앙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교리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처럼 가톨릭의 입장은 칭의를 전가된 의가 아닌 주입된 의, 즉 사람의 내면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변화시킨 ‘의’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근거해서가 아닌(딛 3:5),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롬 3:21-22),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롬 8:1)과 달리 단순히 죄사함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와 더불어 태어났음을 믿지만(롬 5:12),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롬 10:9-10),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악한 생각이나 정욕(막 7:21-23), 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본죄’(本罪), 혹은 ‘자범죄’(actual sin), 라고 말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이 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대죄(mortal sin), 다른 하나는 소죄(venial sin)라고 부릅니다.  먼저 ‘대죄’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죄로 구속의 은총을 잃게 하는 것으로 이유 없이 성일이나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 술에 만취되는 것, 물건을 절도하는 것, 다른 종교서적을 읽는 것, 등을 말하고, ‘소죄’는 대죄처럼 심각한 죄가 아니며 영혼을 죽이지 않고 구속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는 가벼운 죄로 험담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 과식하는 것, 싼 물건을 훔치는 것 등으로 이 소죄가 계속되면 대죄(大罪)/중죄(重罪)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인간은 ‘성세성사’(聖洗聖事)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으며 성세성사를 받은 이후 범한 죄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성례’(sacrament)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마 28:19)와 성찬(눅 22:19-20) 이외에도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견진’, ‘고해’, ‘종부’, ‘신품’, ‘혼인’ 등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성례 즉, 성사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 성례 자체가 은혜를 준다고 가르치기 때문인데,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고 성사 없이는 하나님과 상통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구원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 점이고,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교훈 밖에 아무것도 믿는 바가 없는 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온전한 성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더 추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명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막 16:16, 고전 11:26), 그 밖에 다른 성사들을 명하신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엡 2:8), 결코 어떤 외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형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말처럼 성례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 이전의 성도들과(창 17:10),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회개함으로 성례를 받을 수 없었던 강도의 구원에 대해 결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눅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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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본질, 활동 혹은 성품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

당신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당신은 하나님보다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분을 알게 됨에 따라

당신은 경배와 감사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방법 중에 하나는

그분의 이름을 시인함으로써 경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당신에게 주시는 방법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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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에서는 배우자의 과실을 입증하지 않아도 어느 한쪽이 이혼할 의사가 있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는 무과실(無過失) 이혼법 제도가 있는데, 물론 일부에서는 이것을 두고 “결혼의 신성함을 깨뜨리는 법률적 테러”라고 혹평하지만, 이 법(No-fault divorce laws)은 부부 사이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만큼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서로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법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국이 이혼 대국이라고 말하지만 OECD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이 전체 34개 회원국 중 9위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아시아 회원국 중에선 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회원국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높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진 후 사회적 파장이 커지면서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났는데, 예를 들면 불륜을 조장하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가 성행하고 특이한 것은 서로 간의 불신이 생겨서인지 예비 신랑신부는 혼전계약서, 신혼부부는 혼인계약서, 이미 결혼한 중년부부는 재산계약서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고 실행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이혼 사유로는 경제적 이유와 배우자의 외도 그리고 성격차이와 학대와 폭력으로 집계되고 있고 이혼 연령별은 20대부터 7-80대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과 각종 사유를 통해 이혼이 불신자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심적으로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이혼에 대해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문란한 성행위는 어디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가정과 사회의 불안정을 몰고 오고 있으며, 특히 서구사회에서 수많은 자녀들이 혼외정사로 태어나거나 다섯 번의 임신 중에 한 번 꼴로 낙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약 절반의 부부가 이혼으로 끝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가정 밖에 살고 있는 십대 청소년들의 문제가 대부분 계부나 계모와의 갈등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통계에 의하면 배우자 사이의 폭력은 정식으로 결혼한 경우에서보다는 동거하고 있는 상대방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현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혼은 더 이상 불신세계나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부가 되었고 가정 사역 전문가들에 의하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이혼 비율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막 10:9)고 성경은 말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부모를 떠나 새로이 결합하여 평생토록 지속되는 결혼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라고 말하는데(창 2:24), 이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유익은 두 사람이 동반자의 관계에 있어 서로 간의 외로움을 제거해 줄뿐 아니라 인류를 영원히 존속시킬 수단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창 1:28).  사실 결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형상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뜻이지만(사 43:7), 문제는 이렇게 영광을 드러내야할 행복한 결혼이 인간의 정욕적인 죄(마 5:32)로 인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원한 결혼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정욕으로 인해 발생한 이혼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지 하나님께서 사회질서의 한 부분으로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결혼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4-6).  즉 이혼은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마 19:8),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입니다(말 2:14-16).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혼을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원칙과 규제에 따라 이루어진 이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혼 경력(?)이 있으시며 이혼과 관련된 모든 고통도 경험해 보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사 50:1), 예를 들어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를 주었으되’(렘 3:8)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과 이혼 과정을 밟으셨던 분이신 것을 알 수가 있고(사 54:4-6), 신약에 와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건을 통해(마 1:18-19), 이혼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혼한 모든 사람에 대해 비난하거나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라기 2장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이혼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들이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신 24:1).  만약 배우자와 비정상적인 근거로 이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간음죄를 짓는 것이지만(막 10:11-12), 그렇다고 해서 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을 수 없을 만큼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닐 것입니다(요일 1:7).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과거에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롬 8:1),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있고, 실제로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78:38).  그러나 한 가지 만큼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최선의 과정을 거쳐 이혼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상처로 남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결혼제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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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Muller

기도의 사람 2015. 12. 2. 15:21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Muller는 10세가 되기도 전에 절도를 저지르고,

청년시절에는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는 등 어두운 삶을 살았다.

그의 비뚤어진 인생은 1825년 한 기도 모임에서 놀라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문자 그대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835년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운 그는

이후로 평생을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는 일에 쏟아 부었다.

시편 68장5절의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긴 그가

길거리에 떠도는 아동들을 위한 헌신한 기간은 60년이 넘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세월 동안 그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부의 힘을 빌리거나

특정 부자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순수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아버지 한분만을 신뢰하고 기도하여

그 응답을 통해서만 사역을 계속하였을 뿐이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그러한 그의 기도가 항상 응답받았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위기가 있었으나

기도하는 Muller에게는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진정한 기도는 모두 하나님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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