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중지론'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7.09.09 은사중지론
  2. 2017.04.08 신학의 희생자
  3. 2017.01.21 현대판 사두개인
  4. 2016.12.31 말씀 v 성령
  5. 2016.11.19 죽은 정통신학
  6. 2016.09.24 신학적 교리
  7. 2016.07.16 성경적 이신론자 1
  8. 2016.04.09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9. 2016.02.27 현대판 바리새인
  10. 2016.01.16 미성숙한 신학
  11. 2015.11.28 바리새인 기질
  12. 2015.10.17 칼빈주의 신앙 1

은사중지론

은사중지론 2017. 9. 9. 12:22

전라도 지방의 방언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속담이 아닌 실제 언어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말 같지 않는 말,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 비유적으로 이르는 관용구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식 동물이 아닌 개가 풀을 뜯어 먹는다는 것은 병든 개가 아니고서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Lloyd Jones의 성령론을 불편해 하면서 그를 비성경적인 목사로 심하면 이단에 가까운 사람으로 매도하거나 폄하합니다.  솔직히 이것은 Princeton University 철학과 교수인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속어인 “On Bullshit”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엡 4:29)에 한 마디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신도들 앞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개나소나 신학자가 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말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밥벌이 목()사들이 많아지는 세상에 교인 하나만 생기면 자신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23:15), 잘못 가르치는 선생들로 인해( 3:1), 현대교회가 타락할 때로 타락하고 신앙과 신학이 썩을 때로 썩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18:8).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은사중지론 자들의 생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영적은사들은 오직 사도들 시대에만 연관되어 있으며 마지막 사도인 요한과 더불어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주후 90년경에 이미 소멸되었다고 말하면서 초대교회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허용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필요했기 때문에 예언적 계시(고전 14:26)나 꿈( 2:17), 치유( 16:18), 이적( 6:8), 방언(고전 14;2), 방언통역(고전 12:10) 등의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복음주의 은사 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의심하는 사악한 궤변들을 내세우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살전 5:21)보다는 무조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귀신의 장난이다”, 혹은 “무당 신내림을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신비주의자나 정신이상자인 것처럼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극소수의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못되었거나 미혹의 영에 속는다고 단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고전 14:1), 모두가 감정적이며 영적인 도취에만 빠져 있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22:37-40),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단의 현혹(살후 1:9)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 3:9-18), 그리고 타락한 세상 가치관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요일 2:16),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분명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을 가지고는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현대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 2:1-7), 버가모 교회( 2:12-17), 두아디라 교회( 2:18-29), 사데 교회( 3:1-6),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3:14-22), 모든 면에 있어 쇠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릴 정도( 23:29)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라면( 4:12), 반드시 초대교회처럼 무슨 변화( 2)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살전 2:13).  물론 강해설교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강해설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들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열심을 보이는 것은 칭찬할만 하지만, 문제는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삶으로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6:46-49).  최근 여론조사 자료들에 의하면 세상이 교회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닮아간다는 절망적인 통계가 나왔는데, 이것은 수준 높은 강해설교를 하거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인데, 물론 은사중지론 자들은 신앙을 사수한다는 목적 아래 “우리의 신학적인 범주들은 그런 것들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어!”라고 강조하지만, 사실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는 신학을 가지고( 23:15, 11:52),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왈가왈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치고( 12:24-37),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3:19).  따라서 은사 중지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주님을 진정으로 닮아가는 일들을 상실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태도와 많은 허점을 가진 야바이(やばい)같은 신학 체계이고, 이런 탁상 공론적인 은사중지론에 대한 논증은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R. T. Kendall 같은 신학자들 의해 호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은사중지론 자들도 목회에 있어 성령의 존재를 남겨 놓기는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 한 가지 사역만을 하시는 분으로 제한되고 격하시키는데(고전 12;3), 예를 들면 성령의 주요 역할은 신자로 하여금 단지 성품에 있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5:22-23), 이것이 비록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주장은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뿐만 아니라( 2:5), 그분이 하신( 14:12)일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2:21).

 

따라서 균형 잡힌 신앙관을 가진 목회자라면 단지 성품에 있어 예수님을 닮는 일에 만족할 수 없고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하며( 14:1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적적인 역사 사이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2:4-11).  Gerald F. Hawthorn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 있는 초자연적인 현시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능력 없이 그분의 성품을 지닐 수 없는 것처럼(15:5), 올바른 사역자라면 그리스도의 성품만을 닮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그분이 주신 내적인 열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말씀 선포사역( 5-7)과 능력 현시사역( 4:40, 5:15, 6:19, 8:26-39)에 있어 균형 있게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9:35).  물론 일부 은사 지속론적 전통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한 과도성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여기서 은사 중지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Dallas Willard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는 성경의 정경 외에 여전히 초자연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의 희생자  (0) 2017.04.08
현대판 사두개인  (0) 2017.01.21
말씀 v 성령  (0) 2016.12.31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신학적 교리  (0) 2016.09.2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처음 오순절 신학을 대할 때는 이 신학만이 가장 최고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소 말씀에 깊이에 있어 어딘가 빈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사에 있어서는 청승맞게 드려지는 장례식 같은 예배와 메마른 말씀을 전하는 죽은 정통 장로교 신학보다는 백번 천번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장로교에서 신(神)처럼 여기는 Calvin 신학을 대했을 때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중 수업이 중단될 정도로 서너 번에 걸쳐 교수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주제가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 앞에서 교수와 맞장토론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논쟁을 벌인 이유는 장로교 사람들이 철저하게 Calvinism로 무장되어 있듯이 나 역시 이미 Pentecostalism으로 그들 못지않게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은사중지론적인 교리 속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오순절 신학이 점점 멀어지고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에 빠지면서 누군가 은사에 대해 물어보면 균형 잡힌 성경적인 대답을 주기보다는 AD 1세기 말에 모든 은사가 끝난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초자연적인 능력의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성경해석을 하는 은사폐지론자의 입장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이며 존경받는 Gene A. Getz는 1972년에 설립한 Fellowship Bible Church의 담임목사로 이미 리더십에 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은 50여권이 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는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릴 만큼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킨 경험 많은 전문가이자 탁월한 성경학자입니다.  처음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이 은사 발견에 힘써야 한다고 강하게 가르쳤으나 그 입장을 바꾸어 성령의 은사 발견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의 견해를 주의 깊게 고찰할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뛰어난 성경학자이고 남들이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이며 교회 설립자였기에 그의 견해를 반박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회원리를 설명할 때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보다는 ‘몸의 성숙’ 즉 지도자로서의 성품과 믿음, 그리고 소망과 사랑을 강조하면서(딤전 3:1-13, 딛 1:5-9), 성령의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는 이론에 대한 반대 이유로 ‘혼돈’, ‘합리화’, ‘착각’, 이 세 가지가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Building Up One Another』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영적은사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제자 삼는데 특별한 사명감을 품고 30년이 넘도록 목회를 하면서 제자훈련에 관한 획기적인 책들을 여러 권 저술하고, 본인 스스로가 전통적 은사중단주의 학교인 Talbot School of Theology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Bill Hull 목사는『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이런 고백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즉 방언, 신유, 기적, 그리고 예언과 같은 것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략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실 Bill Hull 목사는 대학교 시절부터 오순절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지만 Talbot School of Theology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의 신앙관이 변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고린도전서 12-14장을 주해하는 강의시간을 통해 수년 간 배워왔던 은사중단주의자들이 말이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솔직한 고백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우리가 사역에 허락된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회를 놓치는 비극을 초래할 것임을 나는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영적인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나의 지난 목회 기간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은사의 역할을 배우면서 다시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대부분이 은사중단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가 아니라 개교회의 전통과 문화와 제도 그리고 신학자나 목사로부터 신학적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은사는 사도시대인 초대교회 때만 필요했던 것으로 성경이 완성된 지금 우리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모든 은사중지론자가 사도들이 죽은 뒤에 기적적인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신학자나 목사의 가르침, 즉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라는 떼어내기 힘든 고리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여정에 있어서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거나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J. I. Packer“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의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수혜자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면밀한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에 도달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에 의해 전수되어 온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 가르침에 혜택과 영향을 받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직접 연구하고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행 17:11), 오히려 균형 잡히지 못한 선생들의 가르침에 더 의존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딤후 4:3-4).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적인 은사들을 믿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처럼(요 3:1-10), 그들 자신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거나 체험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5:37).  다시 말해 율법주의자들이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딤전 4:1-3), 신자들은 성경에서 은사가 소멸되었다고 가르치는 거짓선생들, 즉 영적으로 무지하고(요 3:9), 성경을 곡해하며(마 15:9), 죽은 정통을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막 7:1-6), 은사를 믿지 않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이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대적해 온 것은 불신자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이고, 이런 교회들이 관료적 지도력의 부상으로 인해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거부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신 것입니다(엡 4:30).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말씀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신 것을 아셨고(마 10:1, 막 16:15-20),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 주님은 사역을 하실 때 영적인 것을 만족시키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육적인 면을 동시에 만져주셨고(마 4:23-24),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말한 것처럼(살전 1:5),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도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귀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더 큰 기적이 있다면 말씀 선포로 인해 불신자가 거듭나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엡 2:1-6).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어느 한 사람이 악한 영에서 놓여남을 받거나(눅 4:18-19), 아니면 앉은뱅이가 걷고 뛰듯이(마 11:5), 혹은 눈을 떠 보게 된다면(눅 7:22), 이 구원받는 과정에 있어 이러한 기적들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행 8:4-13), 복음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막 16:20).  그리고 이런 기적을 경험할 때 잡다한 신학적 논쟁이 끝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을 때(행 3:1-10),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신학자와 목사가 다 모여 있었지만(행 4:1-6),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행 4:14), 만약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고 걷는다면 거기에 무슨 ‘쓰레기 같이 오염된 교리’나 이단처럼 이것저것 마구 갖다 붙인 ‘엉터리 신학적 해석’이 필요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들은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축소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더 나아가 이런 가르침은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길 바라는 성도들의 깊은 갈망을 둔화시키는데 일조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신학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사중지론  (0) 2017.09.09
현대판 사두개인  (0) 2017.01.21
말씀 v 성령  (0) 2016.12.31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신학적 교리  (0) 2016.09.2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분은 게이바를 운영하면서 40년간 동성애 세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탈동생애 운동가이며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 목사님으로 오래 전 이 분의 간증을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오랫동안 몸으로 직접 겪었던 사람이기에 이분만큼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훤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고 성경을 기초로 해서 여러 서적들과 자료들을 참조한 적은 있었지만 이분처럼 그러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가령 동성애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그들과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동성애자가 겪는 심적인 고통이나 질병에 대한 지식을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그 어두운 세계 속에 살면서 몸(?)으로 경험한 사람만큼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동성애자에 대해 무엇인가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동성애자의 세계 속에서 더러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동성애자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의학적인 용어로 ‘공상허언증’에 걸린 사람이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좋아하는 마귀의 자식(요 8:44)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야고보의 믿음은 변절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도(행 12:2), 여전히 열 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 그를 대신할 자(사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반면에 가룟유다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배반했기 때문(요 18:3)에 그가 목매어 죽었을 때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행 1:15-20). 따라서 베드로는 사도로 선택받을 만한 사람의 자격을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라고 오순절 날 일백 이십 명 앞에서 제시합니다(행 1:21-22).  여기서 베드로는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증인의 자격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사람이어야 하는데(요일 1:1), 만일 체험해 본적이 없다면 그 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는 분야에 대해 논할 기회가 생긴다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고(잠 14:12), 하나님 앞에 위증죄를 범하지 않는 일이지만(시 24:3-4), 더 나아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고 억측을 부리거나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쳤는데(행 7:55-58), 오늘날 누군가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분명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시지 않고 앉아 계십니다. 앉아 계신단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도 모릅니까?”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6:64, 눅 22:69), 신약 저자들의 증언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막 16:19, 행 2:35, 7:55-56, 롬 8:34, 골 3:1, 히 10:12, 12:2), 여기서 하나님의 우편에서의 의미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시 110:1, 빌 2:9-11, 히 1:3, 벧전 3:22), 더 나아가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 되시나니’라고 말한 것처럼(시 121:5), 예수님은 돕는 자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말해줍니다(시 110:5).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성경에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를 이단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경구절 하나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이단사냥꾼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죽은 정통신학,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쟁과 논쟁을 일삼는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메마른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체험을 성경말씀보다 위에 두지 말아야 하겠지만(고전 4:6),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체험을 다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지는 말아야 하는데(요일 4:1), ‘오직성경’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만의 성경이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은 어느 신학자의 말이나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신학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병든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Martin Luther가 중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천명하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했지만(롬 1:17), 문제는 이것이 너무나 지나쳐 그는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을 강조한 믿음’의 말씀을 지푸라기 서신으로 깎아내렸는데(약 2:14),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불에 타서 없어질 잡스럽고 쓸모없는 말씀이었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요 20:31, 딤후 3:15-17),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벧후 3:16),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요 14:21).  따라서 성경말씀을 취사선택하거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바리새인처럼 어떤 특정 성경구절만을 가지고 인용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이단들이 하는 짓이고(마 15:1-9), 정상적인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접촉점을 찾기 위해 늘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던 구세군 창시자인 William Booth는 제l회 졸업식 때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잃어버린 영혼을 얻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러분을 2년씩이나 이곳에 잡아두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옥에 5분만 갔다 온다면 지난 2년간 배운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는데,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난 미친개처럼 물고 뜯고 싸우는 사람들이(갈 5:15), 만약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한다면 분명 사울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며 기도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행 9:9).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행 23:8),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마 22:29), 솔직히 오늘날의 문제는 사두개인처럼 두 가지를 모르는 무지에 있다기보다는 한 가지 조잡한 신학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래 전 R. T. Kendall 목사는 균형 잡히지 않는 진리 때문에 생긴 불필요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외면당한 적이 있었는데, Kendall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말씀은 진리는 아는 것을 감사하지 않고 진리를 나누려고 애쓰는 이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사중지론  (0) 2017.09.09
신학의 희생자  (0) 2017.04.08
말씀 v 성령  (0) 2016.12.31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신학적 교리  (0) 2016.09.2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말씀 v 성령

은사중지론 2016. 12. 31. 10:08

Lloyd Jones의 『성령세례』역자 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성령 편에 설 것이냐의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데, 사실 R. T. Kendall이 말한 것처럼 말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건전한 신학과 이신칭의와 강해설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개혁주의 교리들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우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함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성령 편에 선 사람들은 기도로 처소가 진동하고 표적과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하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권능이 회복될 때까지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하나들면 San Fernando Valley 지역에 Grace Community Church이 있는데, 이 교회는 『무질서한 은사주의』의 저자 John MacArthur가 시무하는 교회로 그는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동네 Church On the Way에서 사역하는 지금은 은퇴한 Jack Hayford는『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의 저자로 매주일 오순절 초대교회처럼 축제가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있는데, 사실 양쪽교회 신자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사역자에게 나타나는데, John Stott는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두 부류의 견해 중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과 어느 교단/교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겠지만, 만약 성령의 은사에 대해 폐쇄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John Stott의 말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의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John Stott가 왜 이런 의미심장한 진솔한 고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자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은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John MacArthur를 role model로 삼아서인지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독설을 퍼부어가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마치 고린도교회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의 은사로 몹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냐는 것입니다(고전 6:20).  분명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럽기 때문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오직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은사 문제로 질서가 없어 보이고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릇되고 허접한 신학을 가지고 영혼을 죽이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마 23:15), 어떤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인데(막 7:1-8), 한 마디로 성령의 은사를 거론하면서 칼빈주의 신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 이단이거나 가짜인 것처럼 비판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전서 13장12절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이들이 내놓는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가 인간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살아있는 교회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그분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살전 5:19-20), 솔직히 우리는 고린도교회나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질서와 자유가 조화롭게 추구해야 하듯이 성령의 은사의 바른 이해와 체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려면 양쪽 진영의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주로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쪽이 은사중지론자들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두 진영이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교회에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갈 5:15).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의 희생자  (0) 2017.04.08
현대판 사두개인  (0) 2017.01.21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신학적 교리  (0) 2016.09.24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죽은 정통신학

은사중지론 2016. 11. 19. 11:48

가끔 글을 읽다 보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5)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정이나 자신만의 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이런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방언을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보태어 Calvin의 『제네바교회 교리문답』과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방언기도론’을 제시합니다.  솔직히 말해 성경에서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혹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라는 교단과 교파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일절 찾아볼 수 없고, 고린도교회의 분쟁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런 독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말하면서 다음 구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불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교단’과 ‘교파’, 그리고 ‘신학’과 ‘교리’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활짝 열려있으면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더 심하면 이단/사이비에 빠진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신랄하게 공격을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보다는(딤후 3:15-17),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신학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이러한 잘못되고 편협한 신학들, 즉 자신만의 신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마 23:2-3)들 그리고 율법사들은 당대의 최고의 석학(눅 11:46, 52)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스라엘 선생들이었습니다(요 3:10).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탁월한 신학자들이며 목사들이지만 문제는 병든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같지 않은 메마르고 병든 설교로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마 23:13).  이들의 이런 잘못된 가르침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신학’으로 인해 참된 진리의 말씀(딤후 4:3)을 가르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섭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다시 말해 후메내오와 빌레도(딤전 1:19-20)처럼 잘못 가르쳐서 많은 영혼들을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딤후 2:16-18).



우리는 죽은 정통신학이 필요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눅 4:22)로 삼십 년이란 세월(눅 3:23)을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일한 경험이 전부였고(막 6:3), 그분에게 있어 어떤 신학적 체계는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예수님은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10:4).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고전 1:26)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주로 학문이 없고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행 4:13).  그렇다고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처럼 무교회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치리할 때 자신이 소속된 교단 총회나 노회가 없으면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누구의 간섭이 없기 때문에 교주 아니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빠질 가능성 많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에 소속되거나 신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더라도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행 15:5),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온 이 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이 일을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통해 해결했기 때문입니다(행 15:6-21).



그리고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여러 종류의 이단(막 13:6)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딤전 6:3),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유일한 신학인 것처럼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사도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행 5:12), 공회에서 특출한 인물이었던 율법 교사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인 히브리 학자 가마리엘(행 5:34)은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파 교단’에서 ‘바리새주의 신학’을 한 사람이고, 반면에 사도들은 어느 특정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신학교에 가본적이 없는(행 4:13), 한 마디로 신학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사도들과 맞지 않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행 5:17), 제자들을 공회에 세워 종교재판을 하고(행 4:1-3, 5-6),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습니다(행 5:40).  이것을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배운 신학만이 정통적이고 성경에 가장 근접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무지막지하게 상대방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교법사 가마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한 마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학공부를 많이 해서, 혹은 교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처럼 죽은 것은 아닐 것이고(행 7:54-60),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순교한 것입니다(히 11:35-38).  그런데 문제는 신학자/목사들이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데(마 10:16), 분쟁을 일으키는 귀신들에게 충동질 당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무조건 자신의 신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책잡으려고 하거나(막 12:13),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눅 11:53-54),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갈 5:19-21).  솔직히 말해 이런 일들을 일삼는 사람들,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똑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들추어내는 사람은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찮은 일, 즉 구원에 절대적이지 않은 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것은(딤전 6:3-4),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망상이나 착각에 빠질 수 있겠지만(갈 1:13-14), 성경은 시기와 다툼과 논쟁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로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약 3:13-18).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신학에 대해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을 주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제의 신학도 존중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판 사두개인  (0) 2017.01.21
말씀 v 성령  (0) 2016.12.31
신학적 교리  (0) 2016.09.24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신학적 교리

은사중지론 2016. 9. 24. 15:28

교리(敎理)라는 한자어 용어는 “가르침에 담긴 근본원리”, 또는 “특정 종교가 제시하는 이법(理法)”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기독교 교리’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신앙의 절대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인간 구원에 관한 근본진리를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체계화 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공동체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교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엡 5:23)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각 지체로서(엡 4:16), 각 교회가 일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근거로서도 교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에 대해 진리를 선포하고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공격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바 그 진리의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거대한 풍차를 향해 싸우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돈키호테처럼 스스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진리의 내용을 체계화한 교리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형제를 향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성령을 소멸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간구하는 잘못”을 서슴치 않고 범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교리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교리 때문에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그런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교리’는 갖다 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잘 가르치기로 이름나 있고 오래 전 한국에 가서 목회자들을 위한 제자훈련 세미나를 인도한 Bill Hull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교회에 접목시킨 목회자들은 이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쓴 『목회자가 제자를 삼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의 또 다른 책인『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를 읽다보면 Bill Hull 목사는 대학교 시절부터 오순절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분이 Talbot School of Theology를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의 신앙관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성령의 은사들 즉 방언, 신유, 기적, 그리고 예언과 같은 것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에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락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설교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그 당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적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자 그렇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주장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Talbot School of Theology의 공식적 입장은 전통적인 은사중단주의인데 ‘은사중지론’이란 특별계시인 신약정경 완성과 더불어 모든 예언적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주장으로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므로(엡 2:20), 사도의 역할이 끝난 것처럼 예언자 역할도 A. D. 1세기말에 종료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은사는 초대교회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 신앙과 언약신학 노선에 서있는 자들로 많은 신학자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사람은 Robert L. ReymondRichard B. Gaffin을 들 수 있고, 특별히 은사중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목회자들 중 한 사람이 제가 좋아했던 John F. MacArthur입니다.  물론 드물긴 하지만 Talbot School of Theology을 공부한 친구 목회자들 중에 성령의 사역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Bill Hull 목사는 신학교 시절 주제 강의 시간에 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주해로 헬라어 본문을 찾아봐도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결론짓기를 오늘날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은 A. D. 1세기말에 모든 은사가 끝났다고 배웠기에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그다지 환영하는 편은 아니었고, 물론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했지만 누군가 예언이나 환상, 혹은 꿈을 꾸었다고 하면 지금 기록된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고 책망을 하면서 그런 것들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반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박했던 것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들과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 좁은 틀(교리) 안에 갇혀 다른 견해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가운데 신랄하게 비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보니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영적인 갈급함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균형 잡히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건이 있었는데 목회를 관두려고 마지막 금식에 들어갔을 때 남들이 말하는 ‘성령의 불’ 받는다는 것을 뜨겁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것은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너무나 은혜스러운 것이었고 거의 서너 시간 내내 내 자신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성령의 임재와 은혜와 사랑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령을 빼놓고 말씀만 강조하면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은데 Lloyd Jones는 『부흥』에서 죽은 정통주의는 교리적으로 지극히 정통이지만 전혀 생명이 없고 인간이 만든 제도에 묶여서 예배에 생명력이 없어 성령을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딤후 3:5).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 못지않게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죽은 정통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또한 말씀을 빼놓고 예언과 환상과 치유와 은사를 너무 강조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데 이것 역시 오늘날 현대교회의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역사와 능력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역의 모델이 예수님이시고(히 13:8), 분명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에서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5:26, 16:13),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기에(엡 6:17),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만약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거스리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성경지식(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마 21:21), 그 말씀에는 능력이 따르게 되어 있고(고전 4:20),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히 4:12), 그 역사는 지금도 믿는 자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막 16:17-18).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 v 성령  (0) 2016.12.31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성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의 이해력이 부족해서인데, 사실 신학교에서 배울 때 신학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성경해석학의 한 입장을 취하게 되고, 만약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면 결국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의 산물이며 그 관점이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장악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성경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성경관에 대해 그 정통성을 인정받거나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성경적 이신론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인격적인 하나님을 성경 안에 가두어 섬기는 경향이 있고 Jack Taylor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성경을 신격화’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려 예수님보다는 성경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고,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토의 핵심은 성경지식을 전달하는데 있기에 “성경적인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기도 합니다.  즉, 영적성장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이 성경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명사보다는 ‘성경적’이라는 형용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교제하기를 거부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분야에서는 자기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허접한 성경지식으로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정죄합니다(요 7:45-49).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에게 있어 최강의 적은 일반 유대인들이 아니고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철저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는데, 바리새인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이며(막 7:3), 사두개인은 신학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막 12:18), 서기관은 학자들이었습니다(마 23:2).  이들은 성경을 경외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연구한 사람들로 성경을 주관주의에서 보호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성경지식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들이었지만 막상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요 7:27), 심지어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요 11:53).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는 성경이 바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요 5:39),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편견, 그리고 죽어 있는 정통으로 인해 예수님이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7:40-43).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듯 종교적인 사람들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이미 단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요 9:16).  다시 말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미리 단정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기에 성경의 해석을 자신들의 믿고 있는 대로 단정 지은 것이고, 마찬가지로 유대 지도자들도 성경을 읽고 연구를 했지만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5:46-47).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해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전문가 노릇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워 가르치는 것(눅 11:52)은 지옥가기로 작정한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마 12:22-37), 솔직히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알아서 연구한 메마른 성경지식,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완벽한 정통주의”이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마 23:15), 그 연구도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편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마 23장).  물론 성경적 이신론자들도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의심 없이 믿지만(렘 32:20), 문제는 그러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더 많이 아는 것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의 충분성, 즉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길이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모든 것은 성경에 있고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한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성경해석의 열쇠는 성경자체로 성경이 성경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것 같지만 아주 잘못된 주장일 뿐 아니라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고(약 3:1, 벧후 3:16), 그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경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요 16:13), 그것이 바로 성경의 저자이신(벧후 1:20-21),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엡 1:17-19).  오늘날 이러한 오만과 신학적 편견 때문에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5:3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전문지식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우리를 가르쳐 주신 많은 교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 가르침의 결과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선생에게 배워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이들이 내리는 신학적인 어떤 주장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Thomas Erskine는 “성경을 신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성이 강하고 성경지식을 과신하면서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진 형벌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은 정통신학  (0) 2016.11.19
신학적 교리  (0) 2016.09.24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미성숙한 신학  (0) 2016.01.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Lloyd Jones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하여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사역하면서 자신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부류는 참된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기쁨이 결여된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며, 세 번째 부류는 은사 운동에만 관심을 가지는 감정주의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성경적 이해의 빛에 비추어 첫 번째 그룹을 죽은 정통으로, 두 번째 그룹을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세 번째 그룹을 암적인 광신주의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데, 먼저 성경적 정통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만 하면 항상 성경책을 들이대며 성경만이 최고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신격화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부류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도 무슨 이야기만 하면 무조건 Calvin을 내세워 말을 하는데, 마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Calvin이 한 말에 맞춥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신비주의적이며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현대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이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먼저 성령의 은사에 냉담한 사람들인 John Walvoord 그의 동료인 Merill Unger는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사라졌다고 강조하는데,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게 된 이유는 B. B. Warfield가 저술한『Miracles Yesterday and Today』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책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카리스마적 은사의 타당성을 반대하는 가장 유력한 책으로 Warfield는 은사의 기능은 사도시대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 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합니다.  이들처럼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먼저 Robert L. Reymond는 『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성령의 은사지속설은 계시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을 개괄적으로 주석하면서 “계시가 사도시대 말기에 중지되었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 / i, vi), 이런 의미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언은사를 추구하려는 바울의 권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예언과 방언과 지식 등 계시은사들은 계시과정의 종결과 함께 끝났고, 기적의 관계를 거론하면서 능력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랬듯이(요 5:36, 10:38, 행 2:22), ‘사도적 메시지의 확증’ 즉,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었던 특수표징들은 사도들이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중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Richard Gaffin 역시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적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예언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비계속적인 기능으로 사도직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사라진 것이다. …만약 예언이 계속된다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계시의 언약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베드로전서 4장10-11절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누고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창설적 성경을 띤 것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Gaffin은 이런 원리 하에서 신유와 기타 관련된 은사들에 관해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은사들은 ‘사도적 표징들’이므로 사도 이후 교회의 생활에서는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영국 복음주의교회의 회복운동을 주도한 Lloyd Jones의 사역에 동참했던 적이 있는 Peter Masters도 『The Healing Epidemic』에서 “카리스마적인 혼란의 시대인 요즘에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했고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렇게 예언, 방언, 신유, 기적 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성경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엡 2:20, 3:5, 고전 13:8-12, 14:20-25, 29-30절 등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이런 태도(은사중지론)는 성령의 강력한 삶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단순한 도피주의이며 성령은 바람과 불의 영으로 남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분을 어떠한 교회적 밀실(박스)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며 신유, 예언, 축사 및 방언이 마지막 사도들과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Wayne Grudeme 고린도전서 13장8-12절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말했고, Gordon Fee 역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John Stott는 『One People』에서 은사목록 중에 사도직과 예언과 기적을 제외시켰고, John MacArthur는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에서 기적과 방언과 신유와 방언통역 같은 은사를 일시적 은사로, David Hocking은 『Spirit Gift』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말하며, John Walvoord는 『The Holy Sprit』에서 Merill Unger는 『The Baptism and Gifts of the Holy Sprit』에서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반대 입장을 취하는 Michael Griffiths 외에 많은 은사지속론자들은 오늘날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주장은 자유주의에 가까운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여전히 동등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중간에 바꾼 사람들도 있는데 Earl Radmacher은 오순절 계통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오순절 교회를 떠나자 교회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하며 비판했고, 반면에 장로교 학자인 Rodman Williams는 처음에 기적적인 은사가 사라졌다는 Warfield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확신하면서 『The Era of the Spirit』에서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온 데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 제자훈련 세미나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Bill Hull은 성령의 은사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Talbot School of Theology에 들어가서부터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굳게 믿었지만 현재 성령의 은사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성령에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이렇게 상기시킵니다.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중단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약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략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 설교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교리에서 이 논쟁만큼 교회의 분열과 알력을 야기 시킨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양쪽 진영에서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목사들이 성경을 기초로 해서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적 교리  (0) 2016.09.24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미성숙한 신학  (0) 2016.01.16
바리새인 기질  (0) 2015.11.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만약 어느 목회자가 성경을 몇 백독 이상을 하면 굉장히 신령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사역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이름난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신학적 배경과 그 목사가 하는 말을 거의 진리인 것처럼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을 수 백독을 하거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명무실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고 개중에는 중생하지 못한 신학자/목사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평생 성경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요 5:39), 이들은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고(요 3:7-10), 성경을 곡해하고(마 15:9),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막 7:1-10),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 8:44).  성경 말씀대로 인용한다면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마 3:9),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요 3:3), 몸속에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적인 미움의 피가 흐르는(창 4:8), 독을 뿜은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마 23:33).  쉽게 말하면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거나 원어성경을 막힌 없이 좔좔 읽어 내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나 목사가 신학적인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Lloyd Jones는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예측했는지 자기 고향인 South Wales 지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개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위로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는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Iain H. Murray의 『Life of Martyn Lloyd Jones』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면 Lloyd Jones는 웨일즈가 낳은 복음전도자들인 Daniel Rowland, Howell Harris, William Williams, John Elias, 예를 들면서 이들이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신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행 4:13), 사도바울 빼놓고(행 22:3), 거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는 공식적인 훈련이나 사회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고전 1:26).  물론 주님께서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운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신 특별한 이유는 이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고(마 5:16),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배경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들을 택하신 것입니다(고전 1:29). 반면에 세상적인 지위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많고(마 23:2),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진리인 것 같이 어떤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사실 John MacArthur가 계획하고 준비한 Strange Fire Conference에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을 했는데, 여기서 Panel Q & A, Session One 시간에 나온 다섯 명의 목회자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목회에 성공(?)을 했거나 인기가 있는 목회자들이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어떤 신학적인 정의가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맹종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자 Todd Friel 로마 가톨릭교회로 인해 보름스 국회에서 문책을 당했던 Martin Luther를 예로 들면서 이 시간이 마치 그런 것 같다는 뉘앙스를 비추었는데, 솔직히 다섯 명의 목회자들이 한 시간 넘게 토론 하는 것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증거를 찾는 것처럼(마 26:59), 은사주의자들을 마녀 사냥하듯 몰아세우는 것을 볼 때 한편의 현대판 산헤드린 공회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다양한 주제(불, 기름부음, 영광, 예배, 찬양, 지배, 등등)를 가지고 논하였는데, 마치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거듭난 사람이 은사주의 운동에 2초 동안 머무를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재판장(하나님)의 입장에서 거리낌 없이 판단을 내리면서(약 4:11-12), 결론짓기를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이들이 진정한 복음을 듣기 전에는 이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이 고린도전서 15장1-4절의 말씀인데, 이 구절을 생각한다면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확신 있게 독사의 자식들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마 12:34).  만에 하나 은사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두 가지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와 ‘함부로 지껄인 모든 말’에 대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2:36).  만약 이들이 입에 파숫군을 세우지 않거나(시 141:3), 자갈을 먹이고(시 39:1), 지키지 않는다면(잠 13:3),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입니다(잠 18:21).  왜냐하면 입으로 내뺏은 모든 말은 심판의 근거가 되고, 그 말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정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마 12:37)에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Jonathan Edwards의 말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미성숙한 신학  (0) 2016.01.16
바리새인 기질  (0) 2015.11.28
칼빈주의 신앙  (1) 2015.10.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Jack Deere가 말하길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으며,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고 개개인뿐 아니라 교회전체에 도움을 주고, Bill Hull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자질구레한 신학적 논쟁을 끝나게 만들고, Charles Craft 역시 성경 어느 구절에도 표적과 기사가 기독교 초기시대 이후로 중단되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은사들이 종식되었다는 이론들은 인간적인 해석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은사중지론 교리를 믿다가 지금은 은사지속론 입장에 서 있는 Samuel Storms는 표적과 기사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을 희석시키지 않을뿐더러, 만약 기적과 말씀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문제는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Lloyd Jones도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상기시켰고, 성령의 권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R. T. Kendall은 신학적으로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신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합니다.  지금 이들의 공통점은 양쪽진영에서 신학과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접해본 사람들이기에 개혁주의와 오순절은사주의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Talbot School of Theology를 나온 John MacArthur는 줄 곳 한 신학과 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학이기 보다는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신학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 같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만이 정통이라고 줄기차게 우겨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안에는 다양한 신학과 교단/교파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서로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연합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학의 폭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너무나 좁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신학의 틀을 가지고 다른 신학/신앙을 비판하거나 이단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기편에 속한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편에 선 사람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으로 마녀사냥 하듯 몰아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는 기독교 폭력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열매는 아닐 것입니다.  R. A. Torrey는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성숙한 신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고 확인하는 신앙인 반면에 미성숙한 신학은 분쟁을 일으키고 당을 짓는 집단정신을 초래하는 불안전한 신학”이라고 지적했는데, 사실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목사들은 복음주의 우산 안에 있는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오직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데, 이런 사람은 Gregory A. Boyd, Paul R. Eddy의 『복음주의 신학논쟁』이라는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2013년에 MacArthur가 Strange Fire Conference를 준비한다는 말을 들은 은사주의자들 진영의 목회자들은 그에게 은사운동에 대해 공격(비판)하지 말 것을 제안했지만, 막상 컨퍼런스가 시작되면서 그는 오늘날 은사운동 하는 사람들이 마치 버림받은 자들인 것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MacArthur와 네 명의 목회자들이 Panel Q & A, Session One 시간에 은사운동에 대해 결론내리기를 이들(은사주의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성령을 모독하고 복음을 모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혹평을 했는데, 다섯 명의 목회자들이 한 시간이 넘는 토론에서 결론짓기를 한마디로 은사주의자들은 사탄의 노예들이고 길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패널 질의응답에 나온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 보시기에 죄인이고(롬 3:9), 기회만 주어지면 죄짓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인데(사 59:7), 어떻게 하나님도 아니면서 똑같이 마음에 악이 가득하고(렘 17:9), 평생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을 인간들(전 9:3)이 어떠한 영적분별력을 가졌기에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을 향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롬 14:4).  이러한 독설들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말일까요?(잠 18:21).  사실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자들의 착각은 은사주의자들 모두가 그리스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은사만을 추구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판단할 때가 많은데(요 8:16), 이것은 대단한 오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들이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자 개혁주의 신학과 은사주의 진영에서 풍부한 사역을 감당했던 R. T. Kendall은 Strange Fire Conference 패널토의를 다 듣고 나서 편지 한 장을 MacArthur에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Charisma Magazine 2월호에 나온 Kendall이 보낸 편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신은 은사중지론이 진리인 것처럼 신봉함으로 무서운 운명에 처할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당신은 가설에 불과한 은사중지론을 마치 교리인 것처럼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나의 전임자였던 Lloyd Jones 목사가 마치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암시하고 있는데… 그분은 은사중지론자가 아닐뿐더러 은사중지론을 혐오하셨다. 오늘날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체험한 모든 간증들을 당신이 마귀적인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사실에 대해 그분은 아마 전율하실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교리처럼 고수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가능한 빨리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공개토론의 가능성을 내비 춘 적이 있었는데, 사실 Kendall은 『Holy Fire』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초대교회 시대로 한정되었다고 성경을 뒤튼다면 나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신학자/목회자들 중에 Lloyd Jones의 후임목사인 Kendall에 대해 왜 신비주의적 과대망상증 환자나 귀신에게 미혹 당해 거짓방언으로 옹알거리는 자라고 낙인을 찍는 신령(?)한 사람들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바리새인 기질  (0) 2015.11.28
칼빈주의 신앙  (1) 2015.10.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바리새인 기질

은사중지론 2015. 11. 28. 16:05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 있는 John MacArthur는 복음주의 목회자로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신앙의 입장에 서서 눈(?)에 거슬리는 목회자들, 특히 Robert Schuller, Oral Roberts, Bill Hybels, Joel Osteen, Rick Warren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두 권의 책,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Strange Fire』에서 그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강도 높게 공격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순절에서 일어난 성령운동 전체를 기독교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른 ‘이상한 불’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라고 무지막지하게 비판을 가하면서 레위기 10장 1-2절에서 나오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다가 죽었던 사건을 들며 “오늘날 교회들을 향해 큰 경종을 울리는 두려운 사건”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분을 능멸하며 그분이 원하지 않으시는 방법으로 그분 앞에 나가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면서 “성령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고, 그분이 자의적이고 변덕스럽고 비성경적인 예배를 용인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거의 발악(發惡)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은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다른 불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이단/사이비 운동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사실 2년 전 MacArthur는 자신의 교회에서 ‘Strange Fire’라는 제목의 은사주의 운동 반대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집회의 현장에서 Mark Driscall 목사가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저서 『A Call to Resurgence: Will Christianity Have a Funeral or a Future?』을 소개하고 즉석에서 사인회를 열면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고, Fire School of Ministry의 설립자이며 Pensacola 부흥사역자 학교를 세운 Michael Brown 박사도 『Authentic Fire』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 있는 MacArthur는 바리새인 기질을 가지고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도가 지나치게 마치 대선후보로 나선 Donald Trump처럼 거침없는 막말을 쏟아내는데, 한 마디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귀신의 영으로 치부하고 은사주의 신학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거짓교사를 양산하는 잘못된 신학으로 온갖 형태의 이단사상을 만들어 낸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반면에 은사지속론 입장에 서 있는 Brown 박사는 분열보다는 사랑과 연합을 촉구하면서 부드럽고 겸손하게 MacArthur의 공격적인 비판에 답변하는 가운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오순절 운동이 기독교에 기여한 수많은 공헌들을 제시하고, 자신의 저서 『Authentic Fire』 Chapter 9에 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해야 할 하나님, 즉 종이에 기록된 말씀 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MacArthur처럼 이런 식의 교만에 중독된 언어는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데, Arnold A. Dallimore,『George Whitefield』Volume 1에 의하면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영적갱신 운동에서 크게 쓰임을 받았던 Ralph Erskine은 국교회의 느슨하고 냉랭한 영적분위기를 반대하면서 The Associate Presbytery를 결성할 계획을 가지고 돈독한 우의를 다졌던 George Whitefield에게 연합장로회에 가입할 것을 종용했지만 Whitefield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제안에 동의하지 않자 하루아침에 Erskine과의 관계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연합장로회는 1742년 한 소책자(고난 받는 남은 자들인 스코틀랜드 참 그리스도의 장로교회의 선언)를 통해 그를 “더럽고 추잡한 우상숭배자,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멧돼지 같은 야수”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에 담지 못할 언어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렇듯 이런 일들이 트집 잡기 좋아하는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데(요 8:6), 오순절 학자인 Vinson Synan 박사에 의하면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방언기도로 횡성수설 하는 영적인 소돔의 통치자”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악마숭배의 절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Lloyd Jones의 전임목사이며 알미니안주의와 세대주의적 색깔을 띠고 있는 Campbell Morgan 역시 오순절주의자들을 “사탄의 마지막 구토물”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3억 명의 은사주의자들이 있고, 오순절주의자/은사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말하는데, 만약 MacArthur가 말한 것처럼 이들 모두가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거짓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오늘날 교회를 향해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MacArthur 자신이 이들처럼 체험적인 신앙이 없고 기독교 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혈기와 분노를 가지고 과격한 목소리를 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들이 보기에는 오순절 은사운동 하는 사역자들이 거칠고도 꼴사나운 사람들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은사운동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 질서를 파괴하는 잘못된 귀신의 역사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수준의 발언을 쏟아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제3세계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John White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때로는 무질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지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태풍과 같은 소동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걸림돌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미성숙한 신학  (0) 2016.01.16
칼빈주의 신앙  (1) 2015.10.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칼빈주의 신앙

은사중지론 2015. 10. 17. 13:58

‘육지의 캐비아’로 불리는 소고기 와규(和牛)는 일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고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육질이 연한데, Wagyu를 올린 불초밥은 정말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맛을 가진 아주 독특한 음식입니다.  물론 이 와규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음식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얼마든지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 음식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는 그 맛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와규를 한두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 음식에 대해 얼마든지 맛과 육질에 대한 평가를 바르게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 신학과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목사가 오순절 신학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와규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 음식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 같이 정신병에 일종인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에 걸려 허풍을 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오순절 신학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 그리도 잘 아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순절 신학이나 그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오순절 운동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한 마디로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방언으로 말하면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순절 신학을 논하려면 이쪽 계통에서 신학을 해보고 신앙생활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해보고 나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는 한국교회의 삼허현상(三虛現象)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평신도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현대 신학자/목회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고,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고, 거룩하지도 않은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외식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23:25-28).  사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행포는 다른 교단/교파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비판을 가하고 오직 칼빈주의 신앙만이 정통한 것처럼 심각한 태도를 취하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기질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 섣불리 이단시하거나 사이비라고 주장하지 말고 정식적인 공개토론을 통해 판결을 가리는 것이 좋은데, 이렇듯 단 한 번 만난 본적이 없는 사람을 비속어로 말한다면 뒷다마(담화)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몇 년 전 IHOP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 때 궁금하면 참지 못한 성격이고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이기에 가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무당 신 내리는 곳이고 거짓선지자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에 직접 가족들과 장시간 운전하는 가운데 34일 일정으로 참석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IHOP이 이단/사이비 집단이고 잘못된 영을 전파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Grandview, MO에 가서 Mike Bickle를 만나 이단이나 불건전한 집단인지 정식적으로 담론을 펼쳐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알게 된 Jack Deere 목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타락(?)한 목사를 North Richland Hills, TX에 가면 만날 수 있는데 한 번 만나 대화를 나누면 흑백을 가릴 수 있을 것이고,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있는 노령의 Peter Wagner를 그분이 다녔던 교회가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서너 번 참석해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이 분을 요상한 기름부음 운동을 전하는 죽일 놈(?)으로 생각한다면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Lloyd Jones의 후임목사이고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하고 은사에 대해 활짝 열려 있는 R. T. Kendall Hendersonville, TN에 가면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과목인 열방대학(YWAM) Kona, Big Island에 있는데 그곳을 직접 방문하면 Loren Cunningham을 비롯해서 그쪽 간사들을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궁금했던 모든 것들이 단 번에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계통의 아프리카 선교사이며 치유와 방언의 은사를 복음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Reinhard Bonnke 역시 이단으로 생각한다면, 이 분이 해마다 미국을 서너 번 정도 방문을 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분의 가지고 있는 신학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역자들이 있지만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저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rumor)만 듣고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이들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12:8-12),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01:5, 고전 6:10).

 

여기서 오순절주의/은사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인 신학자/목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을 직접 만나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오늘날 사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 차근차근 대화해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만나 본적이 없거나 그곳을 방문해 본적이 없다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료나 뜬소문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쓸데없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는 세계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리는 것은 목사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고 솔직하게 그냥 체험해 본적이 없어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교인과 주님 앞에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영적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들이 행하는 일은 논쟁과 비판을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한 사탄의 교묘한 전술이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겠지만(딤전 1:13), 정작 이들에게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고( 7:20),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계속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교묘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육에 속한 일이지 성령의 일이 아닌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과 신학을 했지만 솔직히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 치고 균형 잡힌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을 거의 본적 없는데 이것이 나만이 가진 잘못된 시각일까요?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적 이신론자  (1) 2016.07.16
은사중지론 v 은사지속론  (0) 2016.04.09
현대판 바리새인  (0) 2016.02.27
미성숙한 신학  (0) 2016.01.16
바리새인 기질  (0) 2015.11.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