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지방의 방언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속담이 아닌 실제 언어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말 같지 않는 말,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 비유적으로 이르는 관용구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식 동물이 아닌 개가 풀을 뜯어 먹는다는 것은 병든 개가 아니고서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Lloyd Jones의 성령론을 불편해 하면서 그를 비성경적인 목사로 심하면 이단에 가까운 사람으로 매도하거나 폄하합니다. 솔직히 이것은 Princeton University 철학과 교수인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속어인 “On Bullshit”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엡 4:29)에 한 마디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신도들 앞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개나소나 신학자가 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말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밥벌이 목(먹)사들이 많아지는 세상에 교인 하나만 생기면 자신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마 23:15), 잘못 가르치는 선생들로 인해(약 3:1), 현대교회가 타락할 때로 타락하고 신앙과 신학이 썩을 때로 썩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눅 18:8).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은사중지론 자들의 생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영적은사들은 오직 사도들 시대에만 연관되어 있으며 마지막 사도인 요한과 더불어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주후 90년경에 이미 소멸되었다고 말하면서 초대교회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허용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필요했기 때문에 예언적 계시(고전 14:26)나 꿈(행 2:17), 치유(막 16:18), 이적(행 6:8), 방언(고전 14;2), 방언통역(고전 12:10) 등의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복음주의 은사 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의심하는 사악한 궤변들을 내세우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살전 5:21)보다는 무조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귀신의 장난이다”, 혹은 “무당 신내림을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신비주의자나 정신이상자인 것처럼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극소수의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못되었거나 미혹의 영에 속는다고 단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고전 14:1), 모두가 감정적이며 영적인 도취에만 빠져 있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마 22:37-40),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단의 현혹(살후 1:9)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롬 3:9-18), 그리고 타락한 세상 가치관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요일 2:16),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분명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을 가지고는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현대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계 2:1-7), 버가모 교회(계 2:12-17),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사데 교회(계 3:1-6), 라오디게아 교회처럼(계 3:14-22), 모든 면에 있어 쇠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릴 정도(렘 23:29)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라면(히 4:12), 반드시 초대교회처럼 무슨 변화(행 2장)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살전 2:13). 물론 강해설교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강해설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들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열심을 보이는 것은 칭찬할만 하지만, 문제는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삶으로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눅 6:46-49). 최근 여론조사 자료들에 의하면 세상이 교회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닮아간다는 절망적인 통계가 나왔는데, 이것은 수준 높은 강해설교를 하거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인데, 물론 은사중지론 자들은 신앙을 사수한다는 목적 아래 “우리의 신학적인 범주들은 그런 것들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어!”라고 강조하지만, 사실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는 신학을 가지고(마 23:15, 눅 11:52),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왈가왈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치고(마 12:24-37),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빌 3:19). 따라서 은사 중지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주님을 진정으로 닮아가는 일들을 상실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태도와 많은 허점을 가진 야바이(やばい)같은 신학 체계이고, 이런 탁상 공론적인 은사중지론에 대한 논증은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R. T. Kendall 같은 신학자들 의해 호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은사중지론 자들도 목회에 있어 성령의 존재를 남겨 놓기는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 한 가지 사역만을 하시는 분으로 제한되고 격하시키는데(고전 12;3), 예를 들면 성령의 주요 역할은 신자로 하여금 단지 성품에 있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만(갈 5:22-23), 이것이 비록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주장은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뿐만 아니라(빌 2:5), 그분이 하신(요 14:12)일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2:21).
따라서 균형 잡힌 신앙관을 가진 목회자라면 단지 성품에 있어 예수님을 닮는 일에 만족할 수 없고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하며(요 14:1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적적인 역사 사이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2:4-11). Gerald F. Hawthorn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 있는 초자연적인 현시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능력 없이 그분의 성품을 지닐 수 없는 것처럼(요 15:5), 올바른 사역자라면 그리스도의 성품만을 닮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그분이 주신 내적인 열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말씀 선포사역(마 5-7장)과 능력 현시사역(눅 4:40, 5:15, 6:19, 8:26-39)에 있어 균형 있게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9:35). 물론 일부 은사 지속론적 전통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한 과도성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여기서 은사 중지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Dallas Willard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는 성경의 정경 외에 여전히 초자연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