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자들 중에 배우자의 지속적인 간음과 유기 때문에 이혼한 배우자가 다시 재혼을 할 경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도 이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혼은 가능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이혼 후 재혼에 대해 제한적 허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은 이혼과 재혼을 묵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신 24:1-4), 비록 간음으로 인한 이혼(마 5:32)과 유기로 인한 이혼(고전 7:12-13)을 묵인해 주기는 했지만 역사가들은 초대교회가 이혼 후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마태복음을 뺀 신약성경 또한 이혼 후의 재혼을 묵인해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적인 불가론을 강조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이나 재혼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려고 한다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논지를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신학자들이 Craig S. Keener가 말한 것처럼 초대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해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거기에는 많은 취약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지적인 한계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성경적인 문제들을 접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허풍을 떨거나 독단적인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이혼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은 마태복음 5장31-32절, 19장3-9절, 마가복음 10장11-12절, 누가복음 16장18절에 나오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혼을 금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의 두 구절에서는 예외적인 말씀(음행한 경우)이 주어지고 있고, 더 나아가 마가복음은 남편과 이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다른 복음서들은 이혼한 남편이 재혼하는 것에 관해 동일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고, 마태복음 19장6절과 마가복음 10장9절속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포함시켜 이 교훈을 지지하면서, 마태복음의 경우 모세가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허락하였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신 24:1).  이러한 증거를 볼 때에 예수님은 결혼을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영원한 언약으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고(창 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있는 예외적인 말씀(마 5:32, 19:9)이 예수님 쪽에서 양보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말씀이 결혼 파괴에 있어 무고하게 이혼당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취하신 조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이혼관이 다양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엄격한 Shammai 학파와 조금 느슨했던 Hillel 학파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면 간음이 결혼을 파괴 시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예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뜻이 없었다면 구태여 그런 예외적인 양보의 조항을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사람들이 이혼하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살펴보면 한쪽 배우자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서로간의 잘못, 혹은 상대 배우자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 또는 부도덕한 행위가 드러날 때 부부간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 이혼을 하게 되는데, 사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한마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마 19:8)고 말씀하셨기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인간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다는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이혼한 사람, 혹은 이혼을 당한 사람은 다시 재혼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성경 신명기 24장1-4절의 말씀을 포함해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과정을 다루는 룻기에서는 재혼에 대해 호의적일 뿐 아니라(룻 1-4장), 그리스도의 계보에 재혼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마 1장), 신약에 와서는 상대 배우자가 죽은 뒤 재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롬 7:3),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경우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재혼을 격려하고 있고(딤전 5:14), 더 나아가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기 어려운 과부들에게 ‘만일 절제 할 수 없거든 결혼’(고전 7:8-9)할 것과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안에서만 할 것’(고전 7:39)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은 재혼을 죄악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 이유(말 2:16)는 그 이혼이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것일 뿐 아니라(창 2:24), 상대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사회와 교회에 적지 않는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반대를 하신 것이지(마 19:3-6), 그렇다고 해서 이혼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불리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비록 마가복음 10장1-12절에서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생생한 수사학적 형태를 사용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의 핵심적인 말씀의 요지는 결혼생활을 깨트리는 것을 금하신 것이지(막 10:9), 이미 이혼한 사람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재혼을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는 이상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에 반대할 필요는 없고(겔 44:22), 한 가지만큼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창 2:24), 즉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엡 5:31)을 깨뜨린 당사자가 재혼을 생각할 때는 먼저 자신의 일(이혼)을 깊이 반성하며 회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은 이혼한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혼자 살거나 아니면 본 남편/아내와 다시 화합할 것을 권하지만(고전 7:11), 인간의 마음이 정욕적이고(골 3:5), 죄인이기 때문에(롬 3:9),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경제적, 혹은 정서적으로 평생을 혼자서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 경우 얼마든지 주 안에서 재혼을 고려해 볼 수는 있습니다(고전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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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이혼에 대한 의식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비록 성경은 허락하지만 이혼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고 또한 모든 이혼이 죄악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이혼이 죄에서 비롯된 것만은 사실이기에 이 고통스러운 이혼은 사라지지 않는 현실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슬픈 증거이기도 합니다(마 19:8).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 Gordon J. Wenham은 “우리는 쓰고 버리는 결혼 문화 속에 살고 있는데 이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혼은 개인과 가정에 정서적인 폐해와 영적인 피해를 상당히 끼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가 갈라서는 것은 인간관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며(눅 16:18), 무엇보다도 이혼을 부정적으로 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6)고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이혼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혼은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고(막 10:9), 무죄한 배우자에게 있어서는 고통과 상처를 줄 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이웃과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혼을 반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을 불리하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먼저 믿는 자들 사이에 합법적인 이혼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쪽 배우자가 저지른 부정, 즉 ‘음행’이 있을 경우에 이혼이 허용될 수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마 5:32), 만일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상대 배우자도 그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두 사람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음행 죄를 지은 배우자가 회개했다면 상대 배우자는 그를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눅 17:3).  따라서 음행 죄를 지은 배우자와의 이혼은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제안을 두어야 하는데, 만약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반복적으로 계속 음행 죄를 짓는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징계를 내려야만 하고(마 18:15-17), 상대 배우자는 이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부 중 한 사람만 믿는 경우 불신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은 ‘갈리게 하라’고 말하는데(고전 7:15), 여기서 갈리게 하라는 말은 명령형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면 믿는 배우자가 그것을 억지로 붙들거나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15).  그러나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끝까지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고전 7:12-13), 그 이유는 믿는 자와의 연합을 통해 믿지 않는 자가 주님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14).

 

 

이렇게 배우자의 음행 문제와 불신 배우자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경우에 이혼할 수 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예외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적/언어적 폭력, 정신적인 학대, 술/마약/도박 중독, 약물 남용, 자녀 학대, 무관심(부부관계)과 무책임한 행동 등등, 가정에 행복과 사랑이 넘치기 보다는 계속해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관계 속에서 끝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거나 이런 것들이 이혼 사유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은 없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이런 잘못된 행동은 결혼 언약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훗날 심판대 앞에서 가정폭력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도록 저지른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지도 모릅니다(고후 5:10).  물론 부부가 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어진 신뢰와 마음의 상처가 회복하기 힘든 상태이거나 미움과 증오로 인해 자포자기에 빠지는 가운데 유일한 해결책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 갈라서는 것이 결혼을 지속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혼하는 것이 비록 악이긴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큰 고통보다는 서로 갈라서는 것이 작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은 이런 경우에도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큰 고통이고 이혼하는 것이 작은 고통이 된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 중에 헬라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리 또한 명확한 성경의 사례를 넘어선 이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룰 때 신중해야 하겠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믿는 자의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원래 의도하셨던 것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창 2:24), 바울도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고, 만약 아내가 주의 명령을 어기고 남편과 이혼을 한다면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다시 그 남편과 합하든지 하라’(고전 7:11)는 말씀처럼 아내는 전남편과 화해하고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이것은 불순종한 것으로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던져 넣어(신 24:4),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마 5:32).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음행을 이혼의 정당한 근거로 삼으셨고(마 19:6), 바울도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말했지만(고전 7:15), 이것 외에 다른 이유, 즉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욕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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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혼생활 25년 동안 한 번도 싸움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참으로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 있어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 시점은 결혼한 지 한 십년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십 년간은 평온한 가운데 아내는 자녀들을 키우고 나 역시 공부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사느라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는데 결혼한 지 십년이 지나고 나서는 주기적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쌍방이 아닌 일방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논리정연하게 말을 하는 아내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기에 결국 마지막엔 큰 목소리로 집안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방적인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 아내와 달리 이혼에 대해 한두 번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이혼하고 혼자서 살까?”,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등등 쓸데없는 고민하면서 지내고 있을 때, 어느 날 하루는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걸어오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당시 이것이 주님의 음성인지 깨닫지 못했지만 마음에 이런 감동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네 아내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너에게 있어서는 천사와 같다.”  주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신 것은 짧은 메시지였지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네가 지금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는 아느냐 마음이 아름다운 아내 만난 것을 감사하라.”  한 마디로 “네 주제를 알라.”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이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라면(창 2:24), 이혼은 두 당사자가 서로에게 동반자의 관계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언약을 깨트리거나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혼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습니다(말 2:16).  사실 오늘날 교회는 이혼을 악으로 여기면서도 이혼에 대해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입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면, 먼저 이혼은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늘 있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이혼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견해인데, 이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가톨릭에서는 결혼생활 본연의 존엄성과 성스러운 가치에 의한 불가 해소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죽음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결혼이 해체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즉, 피해 당사자가 이혼해야할 법적인 이유(간음 또는 유기 등)가 확실하게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견해와 마지막으로 결혼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어 있거나 아니면 다양한 이유(신체적/정신적/언어적 폭력, 마약/술/성/도박 중독 등등)로 이혼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실 세 가지 입장은 결국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 부류는 결혼 언약은 부부가 서로에게 한 충성서약이기 때문에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언약도 결혼 당사자의 여러 가지 이유에 따라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정에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부부가 믿음으로 잘 극복만 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이혼을 생각하거나 또는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행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그리스도인 삶의 기준선이고(딤후 3:16),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께서 맺어준 배우자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신자가 믿는 배우자와 이혼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적인 죄로서 ‘음행한 이유 없이’(마 5:32), ‘음행한 연고 없이’(마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말은 매우 포괄적인 용어로 결혼을 해치는 모든 성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우자에 대한 불성실한 행위, 즉 결혼에 대하여 부부 일방의 부정을 말하는데 한 마디로 부부 관계 속에 제 삼자를 끌어 들여 동반자 관계 언약을 파괴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음행은 남편과 아내와의 항구적인 결합(결혼)을 정면으로 파괴하고 침소를 더럽히는 행위라는 것입니다(히 13:4).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4장5항에 보면 “약혼한 후에 범한 간음이나 음행이 결혼 전에 발견되면 그것은 순결한 편에서 약혼을 파기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준다. 만약 결혼한 후에 간음한 사실이 있을 때 순결한 편이 상대편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혼소송을 하고 이혼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이것은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에는 이혼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인데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교회가 지중해 지역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의 회심자들이 생겨났고, 이때 상대 배우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구원받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부부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가정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신앙의 문제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사실 믿는 자들의 이혼 문제는 두 당사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딤후 3:15)과 성령(고전 6:19)이 있고, 주님께 순종할 기본적인 헌신이 있기 때문에(롬 6:17), 소망이 있는 가운데(롬 8:24), 화해를 주장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히 12:14).  그리고 어느 한쪽 혹은 둘 다 문제 다루기를 거부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가동할 수 있는 교회의 징계과정이 있지만(마 18:15), 반면 불신자와 이혼을 생각하는 신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믿는 자에게 어떤 경우에든 믿지 않는 자와 이혼하면 안 된다고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기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 것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7:13).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문제로 더 이상 믿는 배우자와 같이 살기를 거부한다면 바울은 ‘갈리게 하라’고 말합니다(고전 7:15).  쉽게 말하면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믿는 배우자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신자 남편이 믿는 아내에게 이혼을 하고 요구하는데 아내는 이혼이 주님의 자녀로서 덕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생활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면 아마 그 생활은 평생 고통스러운 삶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 남편에게서 결혼을 유지할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아내가 그와 같이 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닌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성도를 화평 가운데 부르셨기에(고전 7:15), 만약 주님의 자녀가 불신자 배우자와의 신앙문제로 결혼생활이 고통에 빠지게 된다면 이혼하고 화평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신 배우자가 결혼을 유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이혼하기를 바랄 경우 믿는 배우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갈라서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하고, 자신을 버리기 원하는 불신 배우자의 뜻을 받아들여 이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자에게 있어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계속해서 살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은 불신 배우자를 ‘버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고전 7:12-13).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조금 지겹고 보기 싫더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살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버리고 떠날 때까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 배우자가 떠나도록 믿는 배우자가 문제를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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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결혼에 대한 꿈과 기대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상대방의 욕구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은 결혼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시작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평생을 유지한다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 후의 너무나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좌절하거나 실패를 경험하는 부부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결혼해서 함께 살다보면 각종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이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는 가정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결혼을 하면 육신의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고(고전 7:28), 이 결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걷던 남녀가 한길로 함께 걸어가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배경과 가정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자신들의 뜨거운 사랑이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만일 결혼생활도 연애시절처럼 뜨거움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한 인생의 경험자인 부모들이 앞으로 결혼할 자녀/예비 배우자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실상 그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고 말하는데(창 2:18), 이 단어를 놓고 다양한 성경번역본에서는 ‘돕는 자’, ‘적절하게 돕는 자’, ‘적절한 동반자’, ‘조력자’, 심지어 Anchor Bible에서 “내가 그에게 맞는 조수를 지으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에제르’는 구약에서 20번 이상 나오는 명사로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지칭하는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신명기 33장26절에서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라고 개역성경은 번역을 했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너의 힘이 되시려고’이고, 신명기 33장29절에서도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라고 했지만 ‘그는 너의 힘의 방패시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데 한 마디로 ‘돕는 배필’이란 힘/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와 동등하게 그리고 완전한 남자의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동등권을 강조하는 이 같은 논리전개 방식은 창세기 2장23절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한말 ‘내 뼈 중의 뼈요’라는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관용적 의미는 “우리 중의 하나” 혹은 “우리와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수(assistant)나 시중을 드는 배필(mate)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남자를 위해 힘이나 혹은 능력으로 지음 받아 그 모든 면에 있어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동물들에게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자기와 부합한 존재, 즉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창 2:19-20), 자기와 동등한 존재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필요를 공허감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 주셨는데(창 2:21-23), 그것이 바로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나 노예로 만드시지 않고 남자와 동등한 힘으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Matthew Henry의 말을 인용하면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  이 결과로 생겨난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고(창 2:24), 이 결혼이라고 하는 성적 만남을 통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울 뿐 아니라 넘칠 만큼 채워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결혼을 동반자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고(말 2:14), 이 동반자의 관계란 생각과 목표가 같으며 또한 육체의 관계에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친밀하게 연합한 자를 가리킵니다(엡 5:31).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위해 한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시고 이들이 언약의 보호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외롭지 않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만남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삶이 시작하기 위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데(창 2:24), 사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것이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남자(아담)와 여자(아담)인 것을 생각해 볼 때(창 1:27), 부모와 자식관계는 일시적인 것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부부관계는 영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출생(창 3:16)이나 양자(출 2:10)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육(엡 6:4)하거나 공경(엡 6:2-3)해야 하는 의무는 있지만 결혼의 관계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적인 약속은 없고, 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구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마 19:6).  이처럼 결혼이 언약적인 동반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발전시켜야 하고, 만약 이 관계에서 무슨 좋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간음, 폭행, 술, 도박, 등등)들이 생겨서 결혼생활이 비참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두거나 혹은 아내가 남편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둘 때 언제나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하는데, 물론 혈육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보다 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쌍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평생을 깨알 쏟아지는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것은 극히 드문 것이고 결혼생활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부부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부부의 사랑이 언제나 로맨틱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문제인데,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아내)을 볼 때 남자의 소유물이거나 성노리개, 혹은 집에서 일하는 기계(?)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생활에서 뜨겁게 사랑하던 시기가 지나면 실망과 좌절이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때에 부부가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게 되겠지만, 만약 자기의 주장이나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내세운다면 이런 부부는 거의 이혼이나 별거의 상태로 들어가고 남은 인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짝을 찾아야 하겠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면 남은 인생을 순탄(?)하게 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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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에서는 배우자의 과실을 입증하지 않아도 어느 한쪽이 이혼할 의사가 있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는 무과실(無過失) 이혼법 제도가 있는데, 물론 일부에서는 이것을 두고 “결혼의 신성함을 깨뜨리는 법률적 테러”라고 혹평하지만, 이 법(No-fault divorce laws)은 부부 사이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만큼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서로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법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국이 이혼 대국이라고 말하지만 OECD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이 전체 34개 회원국 중 9위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아시아 회원국 중에선 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회원국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높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진 후 사회적 파장이 커지면서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났는데, 예를 들면 불륜을 조장하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가 성행하고 특이한 것은 서로 간의 불신이 생겨서인지 예비 신랑신부는 혼전계약서, 신혼부부는 혼인계약서, 이미 결혼한 중년부부는 재산계약서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고 실행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이혼 사유로는 경제적 이유와 배우자의 외도 그리고 성격차이와 학대와 폭력으로 집계되고 있고 이혼 연령별은 20대부터 7-80대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과 각종 사유를 통해 이혼이 불신자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심적으로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이혼에 대해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문란한 성행위는 어디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가정과 사회의 불안정을 몰고 오고 있으며, 특히 서구사회에서 수많은 자녀들이 혼외정사로 태어나거나 다섯 번의 임신 중에 한 번 꼴로 낙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약 절반의 부부가 이혼으로 끝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가정 밖에 살고 있는 십대 청소년들의 문제가 대부분 계부나 계모와의 갈등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통계에 의하면 배우자 사이의 폭력은 정식으로 결혼한 경우에서보다는 동거하고 있는 상대방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현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혼은 더 이상 불신세계나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부가 되었고 가정 사역 전문가들에 의하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이혼 비율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막 10:9)고 성경은 말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부모를 떠나 새로이 결합하여 평생토록 지속되는 결혼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라고 말하는데(창 2:24), 이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유익은 두 사람이 동반자의 관계에 있어 서로 간의 외로움을 제거해 줄뿐 아니라 인류를 영원히 존속시킬 수단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창 1:28).  사실 결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형상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뜻이지만(사 43:7), 문제는 이렇게 영광을 드러내야할 행복한 결혼이 인간의 정욕적인 죄(마 5:32)로 인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원한 결혼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정욕으로 인해 발생한 이혼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지 하나님께서 사회질서의 한 부분으로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결혼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4-6).  즉 이혼은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마 19:8),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입니다(말 2:14-16).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혼을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원칙과 규제에 따라 이루어진 이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혼 경력(?)이 있으시며 이혼과 관련된 모든 고통도 경험해 보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사 50:1), 예를 들어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를 주었으되’(렘 3:8)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과 이혼 과정을 밟으셨던 분이신 것을 알 수가 있고(사 54:4-6), 신약에 와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건을 통해(마 1:18-19), 이혼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혼한 모든 사람에 대해 비난하거나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라기 2장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이혼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들이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신 24:1).  만약 배우자와 비정상적인 근거로 이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간음죄를 짓는 것이지만(막 10:11-12), 그렇다고 해서 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을 수 없을 만큼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닐 것입니다(요일 1:7).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과거에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롬 8:1),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있고, 실제로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78:38).  그러나 한 가지 만큼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최선의 과정을 거쳐 이혼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상처로 남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결혼제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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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혼의 정의에 어긋나는 결혼증명서가 내 이름으로 발급되는 것은 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따를 수 없다.”  이 고백은 동성결혼 증명서 발급을 거부해 법정 구속된 켄터키 주 로완 카운티의 법원 서기인 Kim Davis가 한 말인데, 사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자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지면서 한편에서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환영을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타락의 길을 간다고 탄식하면서 모든 교회가 힘을 합쳐 대응할 것을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을 통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위대한 자유와 사상 속에서 피어난 큰 열매라고 추켜세우며 성경말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성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이천년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라는 정의는 좀 구태의연한 표현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고 동성애 문제를 종교가 아닌 인권적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은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죄”(레 18:22)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들의 입장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 주님 앞에서 겁없이 아주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을 할 때 그 말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조심해야 하는데(민 14:27), 사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겠지만(약 3:2), 함부로 급한 마음에서 말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조급한 생각으로 무엇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고(전 5:2), 입에서 내 뱉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잠언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말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2:36).  다시 말해 입으로 내뱉는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되고 그 말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기도 하고 또한 정죄함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7).  더 두려운 것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쉽게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가 안 되는 것처럼(고후 6:15), 하나님의 자녀는 소속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고(왕하 5:18), 예수님께서도 동성 간의 결혼을 한 번도 인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마 19:4-6),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위배가 되는 것입니다(레 20:13, 롬 1:26-27).

 

사실 불신자는 그리스도인과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탓하거나 논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이나 내뱉는 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거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란 없는데(막 9:40), 목사/신학자 중에 동성애에 대해 중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동성애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서 한 부류는 ‘타락한 동성애자들’, 다른 한 부류는 ‘타고난 동성애자들’이라고 부르면서 타락한 동성애자들은 마땅히 정죄 받아야 마땅하고 타고난 동성애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도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라고 아이러니한 이상한 논리를 폅니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계 22:18-19), 범죄한 자들을 사람 앞에서 꾸짖듯(딤전 5:20), 동성애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왜 정확하게 말해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암 5:13).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는 타고난 동성애자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마 19:4).  분명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창 1:28),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살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생겼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롬 1:24-27).

 

사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짧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인기성 발언하는 사람들이 탁월한 신학자/거룩한 목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만큼 분명하게 선을 그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정확하게 죄라고 말하지 못하고(겔 33:7-9),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라는 것입니다(갈 1:10).  즉 세상에 편승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기보다는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예로 들면서 동성애에 대해 아주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사실 말장난을 좋아하거나 인기에 편승해서 떠드는 사람치고 회색지대에 서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분명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라고 말하는데(고전 6:9), 왜 수다한 사람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고후 2:17).  다시 말해 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거짓선생처럼(고후 11:13-15), 성경말씀에 인간적인 쓸데없는 생각을 가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처럼(사 30:9-10), 귀에 솔깃한 말이나 거짓된 것을 좋아하는(딤후 4:3), 영적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서 인기 있는 이름난 목사의 잘못된 가르침을 선호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렘 5:31).

 

무엇보다도 동성애자들이 동성애 문화축제나 퍼레이드를 하는 목적이 자신들도 인권이 있고 이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즉 인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뿐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성행위 그 자체도 인정해 달라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그리스도인 중에 동성애자들을 향해 돌 던질만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을뿐더러(요 8:7), 각자의 삶에 자유와 권리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정죄할 수는 없지만(눅 6:37), 그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죄라고 확실히 말해주어야 할 것입니다(유 7절).  이것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요삼 1:11),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할(왕상 18:21), 주님의 자녀로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고 결코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딛 2:8).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레 20:7, 13), 주님께서 심판하실 이들을 우리가 판단할 이유가 없고(고전 5:13),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구절들을 언약백성(렘 31:31-34)이 아닌 자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만약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5:12).  다시 말해 언약백성이 아닌 불신 동성애자들은 하나님께 맡기지만 교회 안에 더러운 음행 죄들(고전 6:9)을 짓는 사람인 경우에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판단 받기를 싫어하거나 더러운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행할 경우 교회는 그러한 사람을 출교하는 것이 성경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마 18:15-17, 고전 5:13).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동성애자들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동성애자로서 오랫동안 죄악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동성애에 강력한 유혹에서 벗어나 결혼해서 정상적이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친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은 그렇게 타고난 것이 때문에 변화될 수 없다고 주장을 하겠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에(롬 1:16), 얼마든지 동성애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6:11).  솔직히 동성애 세계 속에서 벗어나 하루아침에 새사람이 되어 새롭게 적응하며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고 무엇보다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감과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생각, 그리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과 견디기 어려운 자신과의 싸움이 있겠지만, 만약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막 7:24-30),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편에서, 혹은 바알 편에 설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될 것이고(왕상 18:21),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마 6:24),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본색이 진리의 말씀 앞에 들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인해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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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사실 많은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연분이 완벽하게 맞아서 사는 부부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낳고 살다보면 미운정과 고운정이 들어 무난한 한 쌍의 아름답고 성숙한 부부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상당수 결혼생활이 쓰라린 경험과 악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결혼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가 옥중에서 자기 조카의 결혼 축하를 위해 쓴 편지에서 결혼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간결하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써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인류를 영속시킬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네사랑은 네 자신의 소유물이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란다.”  Bonhoeffer의 말대로 결혼이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라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만약 결혼의 존엄성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담이 상대할 사람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이 불충분하고 부족한 상황으로 간주하신 것으로 여기서 ‘좋지 못하니’ 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이 그와 같은 상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일반 규칙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이 동반자의 관계는 결혼의 본질로서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돕는 배필 혹은 배우자인 그와 ‘한 몸’을 이루어 이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고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창 1:28).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반자인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좋지 못하니’라고 평한 남자의 독신 상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들이었고(창 2:19), 그러나 아담은 그것들에게서 외로움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적합한 동반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동반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을 원료로 사용하셨지만(창 2:7),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의 신체 여러 부위 가운데 심장에 가까이 위치한 갈빗대를 취했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서로 간의 인격에 있어 동등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 즉 성(性)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 됨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자의 성(性)에서 여자의 성(性)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안에는 본능적으로 서로 하나 되고 싶은 성적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를 볼 때 ‘이는 내 빼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고백을 한 것이고 그 결과 생겨난 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제도입니다(창 2:24).

 

이렇게 결혼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평가에서 나온 것이지만(창 2:18), 하나님은 몇몇 사람에게 친히 세운 규칙에서 예외를 두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독신의 은사를 주셔서 배우자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신 것이고(마 19:11-12), 사도 바울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고전 7:1)고 말한 적이 있듯이 비록 결혼이 하나님이 세우신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혼자 살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셨지만 이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독신을 강조하셨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까’라고 물을 때(마 19:10),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9:11), 이 대답에서 창세기 2장18절과 24절에서 주신 규칙에 예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관해서는 특별한 교훈을 하거나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 선포한 규칙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라는 말씀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다른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는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들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명령하셨는데(렘 16:2),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 바울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고전 7:7), 이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사는 것이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딤전 5:14).  물론 이들이 독신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았지만 만약 당시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렘 15장), 임박한 환난(고전 7:26, 29)이 없었다면 이들에게 독신의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결혼을 하도록 촉구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18절의 일반 규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예외는 특별한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정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고(고전 7:9), 반면에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데(고전 7:7), 만약 전자에 속한 사람이 일부러 결혼을 피하거나 후자에 속한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최선으로 행하시고(롬 11:29), 각 사람에게 무용한 은사를 한 번도 주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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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된 두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들이 Middle School 다닐 때부터 배우자를 놓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나의 배우자를 위해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20대 중반부터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결혼기도를 하는 가운데 가족과 지인을 통해 여러 번 선을 보거나 소개를 받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상대방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평생 동고동락할 확신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었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면서 한국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국제 청장년 금식기도회(지금은 전국 청장년 금식 대성회)를 해마다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보호식 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마음과 선한 눈을 가진 지금의 아내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후 세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고 주중 수요예배를 같이 드린 것이 전부였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전화와 편지를 통해 교제를 나누면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만난 지 사 개월 만에 양가 가족들이 모여 목사님의 주례를 통해 약혼식과 더불어 결혼식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20대 중반부터 시작한 결혼 기도가 30대 초반이 돼서야 응답되었지만 만약 결혼 기도를 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에 끌려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짝이 아닌 다른 짝을 만났다면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 요소로 만드셨고(창 2:18),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교회, 학교, 직장이 있기 전에 만든 제도이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결혼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막 12:25), 성경에 결혼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제시해 주셨습니다(마 19:4-6).  만일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뒤에 더 이상 결혼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규칙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지켜야 하며(창 2:20-24), 개인이나 국가조차도 어느 누가 결혼할 수 있고 어떤 근거 위에서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는 결혼에 대한 개인기록을 서류로 보관할 수는 있지만 결혼을 위한 어떤 규칙을 정할 권리나 권한은 없고 그 특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막 10:9).  사실 결혼은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출산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제도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출산을 결혼 안에서 그분의 의무로 수행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기는 했지만(창 1:28), 출산이 결혼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은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 이상이기에 결혼을 동물 짝지기로 혼동하지 말아야 하고 인류의 번성은 결혼의 하부 목적이지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6), 이렇게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서로 다른 특징을 주셨는데 남자는 보통 공격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에 의존하고, 여자는 직관과 기본적 신뢰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모습이고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요점은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그분의 상의한 측면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오는데(창 1:24-25),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몸’이라는 단어로 이 말의 의미는 결혼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결합, 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막 10:8), 이 결혼을 통해 두 가지 끈으로 결합되는데 하나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노라고 ‘언약’ 하는 것이고(창 2:24, 롬 7:2), 다른 하나는 영적결속을 이루는 ‘부부간의 성관계’입니다(히 13:4).  다시 말해 언약의 결속이 이루어지고 나서 두 사람의 몸과 혼과 영을 연합시키는 성적결속이 이루어져 그로써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5:31).  이 하나 됨에 대해 구약성서 신학자 Walter Brueggemann“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라고 주장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의 원래 목적은 부부간의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울처럼 보여주는데 있고 이 하나 됨을 이해할 때만 결혼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Tim Alan Gradner 역시 『Sacred Sex』에서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은 최초의 커플(아담과 하와)이 서로 나누고 즐기며 그들의 하나 됨을 축하하도록 특별하고 비범한 선물인 성행위를 주셨다. 또한 성행위는 거룩하다. 성행위를 안 남성과 여성의 온전한 연합에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이 말을 통해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면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엡 5:22-33), 결혼의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엡 5:23), 그런 복종이 학대를 자초한다고 믿는 여자들을 위해 이 원리를 오용하는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명령하시면서(엡 5:25-26), 창세기의 말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환언하면 결혼은 두 가지 결속을 만들어 주는데 하나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간의 헌신과 보살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건 없는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성적 친밀감을 누림으로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거룩한 행위라고 생각했고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평생을 사랑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를 만나야 하는데(창 24:67), 만약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삶에 있어 영적인 싸움은 매우 치열하게 일어날 것이고(엡 6:12), 부부간의 극복하기 힘든 위기가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같이 살고는 있지만 신자 안에 거하는 영(고전 6:19)과 불신자 안에 거하는 영(엡 2:2)이 서로 달라서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마 10:36).  물론 믿는 부부들도 살아가는데 있어 갈등과 어려운 위기가 닥치는 것은 사실이지만(롬 8:35), 이것은 얼마든지 두 사람이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고(요일 5:4), 말씀과 성령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롬 8: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반드시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창 24:3-4, 고전 7:39), 무엇보다도 기도 중에(창 24:63), 인내하며 기다리는 가운데(창 29:30),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야 되고(창 24:42-44), 상대방의 동의(창 24:8)와 부모의 뜻을 존중하면서(창 28:1-2),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롯 3:18).  그 이유는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제정하신 제도이고(창 2:18-25),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사 43:7, 고전 10:3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고(눅 11:28), 예수님도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에 대해 지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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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를 놓고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는데 주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성애자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동성애자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존귀하며 이성애자나 동성애자 모두 주 안에서 하나이고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는 동성애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 동성애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더 나아가 동성애는 기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치유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이 동성애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할 목사조차 동성애에 대해 죄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경해석을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인 말씀보다 더 높이는 것인데 이것은 목사의 양심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어느 목사는 동성애자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치유기도를 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 정말 일개 신학자나 목사의 말이 성경의 권위보다 높을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이고 이 결혼은 인간 사회의 근본요소이며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생물학적인 출산을 결혼 안에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부부간의 성적 친밀감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사랑하는 가운데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만드셨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주장인데 사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친히 동성애자(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를 만드셨다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만약 남자와 남자끼리 혹은 여자와 여자끼리 만나 결혼해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 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한다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들이 결혼해서 살면서 남자나 여자아이를 자녀로 입양을 할 때에 이렇게 입양된 아이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이들과 함께 살면서 심한 혼란을 겪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또 다시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알아야 하는데 치유와 축귀사역 그리고 동성애자를 놓고 수십 년간 사역을 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Francis MacNutt 박사에 의하면 동성애자 인구의 40%는 콘돔이 쾌감을 반감시킨다고 해서 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가운데 성행위를 하기 때문에 각종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손상된 부위(직장의 대변이 찢어져 상처로 오염된 곳)를 고칠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있어 항문교접이 매우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행위로 오천 명의 동성애 남자들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한 결과 대다수가 이러한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항문교접이라는 말이 우리가 듣기에는 역겹고 불쾌하겠지만 이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수명이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20-30년 정도가 짧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일부일처의 관계를 옹호하는데 R. A Kaslow 박사와 동성애 세계에서 오랫동안 빠져 있다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가는 몇몇 사람들의 또 다른 간증과 글에 의하면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가정보다는 공공장소(극장, 터미널 화장실, 옥상, 후미진 골목, 자동차, 등등)에서 성행위가 일반화 되었으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개는 50명 많게는 수백 명의 섹스 파트너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편견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있고 이들이 하루 속히 구원을 받고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동성애자의 인권은 존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행하는 가증스러운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John Stott의 말을 인용하면 ‘인격’과 ‘행위’를 구별하는 것으로 인권에 있어 이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저지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혐오스러운 행위에 대해서까지 묵인하거나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동성애에 대해 옹호하거나 지지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신학교수/목사)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들도 한 형제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사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정론이나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은 정말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만드셨다면 그분이 이러한 가증스럽고 변태적인 행위를 조장하시거나 즐기시는 분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패역하고 타락한 시대에 한 가지만큼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동성애 행위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빌미로 무조건 품어주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죄까지 사랑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비정상적인 행위 뒤에는 반드시 귀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유일하게 치료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창녀가 어떤 계기가 되어 주님을 만났으면 그 곳에서 빠져 나와야 하고 만약 그곳에 머물면서 그 일을 계속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성끼리 성행위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 이상 그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문둥병자처럼 간절히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상 예수님이 하실 일이 없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무서운 질병에서 놓여남 받고자 하는 애절함이 있어야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 세상보다 큰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든지 부부 간의 정상적인 성행위를 떠나 동성끼리 비정상적인 더러운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행하고 죽는다면 이들이 과연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그분과 함께 머무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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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 있어 사람들에게 말하기조차 꺼릴 수치스러운 것이 있다면 성중독자들이 짓는 ‘은밀한 죄’로 이 죄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위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이 질병(동성애, 외설물, 자위행위, 관음증, 성희롱, 강간, 간음, 노출증, 전화/인터넷을 통한 매춘, 등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중에 10퍼센트 정도는 성에 중독되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중독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상투적인 모습인 알몸상태에서 트렌치코트만 입고 다니는 노출증 환자와 같이 행동할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지극히 신사적이고 친절한 사람이며 이웃에게 너무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악하고 더럽고 음란하고 역겨울 정도의(막 7:21-23), 더러운 일을 은밀한 가운데 서슴없이 행하는데 만약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겔 18:31).  이 문제를 놓고 Merville Vincent 박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성적 이상자이며 성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이상에서 벗어나는 음탕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이 세상에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적인 문제에 대한 정통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모든 문제를 인간의 타락과 연관 지을 때 사람의 죄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하며 특히 동성애자들도 우리만큼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이들의 행위에 있어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이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John Stott도 동성애에 대해 논의할 때 ‘존재’‘행위’ 즉, 그 사람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항문교접)에 대해서는 비난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김새나 인격에 대해서는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즉,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며(창 1:27), 그분 앞에 죄인이고(롬 3:9), 성적인 존재라(창 2:24),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죄에 대한 유혹을 받으며(마 6:13),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엡 6:10-12).  문제는 우리가 짓는 죄는 동성애자의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칠 때가 많은데 가령 동성애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심각하고 더러운 죄이고(레 20:13), 우리가 짓는 또 다른 성적인 죄는 그다지 심각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요일 1:8-10).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동성애가 죄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동성애만 죄로 여기지 않고 이성애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더러운 성적인 죄(히 13:4),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9-10절에 나열된 모든 죄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인 행위가 불법인 것처럼(고전 7:1-3), 우리는 동성애를 죄와 질병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악의 세력, 즉 마귀가 그 배후에 역사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고(요 10:10), 무엇보다도 마귀는 질병으로서의(눅 13:10, 16), 동성애를 유발하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가정과 성적인 학대와 수치의 감정과 같은 여러 역학관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동성애가 선천적이며 유전적이거나 아니면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귀신의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하나님보시기에 비정상적인 성적인 행위 배후에는 귀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고전 7:5).  따라서 성경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창 2:16-17), 특히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체질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애자인 신자가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마 19:6), 배우자이외에 다른 어떤 성적유혹으로부터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고전 7:3), 부단히 싸워 나아가는 것처럼(히 13:4), 동성애자 역시 도덕적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살전 4:3), 본인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히 12:4).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자도 치유를 받아 정상인으로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질병 이전에 반드시 버려야 할 죄의 성향으로 언급하지만(레 18:22), 많은 의사들이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있고 반면에 동성애자들 스스로는 선천적이며 유전적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동성애는 타고나서 자신들의 성향을 바꿀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동성애자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고 회복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 마디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Columbia University 교수를 지낸 Robert L. Spitzer 박사는 동성애가 불변하는 특성은 아니기 때문에 성적지향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소위 ‘전환치료’를 통해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발표했지만 후에 그는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동성애 단체에게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단체인 Exodus Global Alliance에 의하면 자신의 성적욕망이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바뀐다고 말하면서 동성애 생활방식을 버리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과 성적취향까지 달라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이러한 증언들을 일축해 버리고 그들은 원래 진짜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이며 유전적으로 타고난 동성애자에게는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나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요 4장), 동성애자들에게도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미 다섯 번을 결혼했지만 늘 성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없는 그녀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셨을 때 그녀는 결국 성적인 죄에서 놓여남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놓고 동성애적 성향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Francis MacNutt 박사는『Can Homosexuality be Healed?』에서 치유기도가 신실하게 시간을 가지고 이루어졌을 때 매우 높은 확률의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악한 영은 실제 존재하며(엡 6:10-13), 사람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문란한 성행위로 끌어들이는 영으로부터 축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John Stott도『True Freedom Trust』에서 발간된 소책자『증언들』에 나오는 사례들에서 “손을 얹고 기도를 받자 성도착의 영이 나를 떠났다. 그날 오후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3년이 넘게 동성애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나는 증언할 수 있다”라는 간증을 소개하면서 Elizabeth R. Moberly 박사의 글을 인용합니다.  “기도에서나 관계에서나 사랑이 가장 기본적인 치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치유하고 구속하는 사랑을 구하고 중재하기를 기꺼이 원한다면 동성애자들의 치유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들도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의 놀라운 능력,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때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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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남자와 여자의 몸을(창 1:26), 다음 세대를 출산하기 위해 서로에게 잘 맞도록 창조하셨는데(창 9:1), 만약 남자와 남자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성 관계를 갖는다거나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성적행위를 일삼는다면(롬 1:26-27),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창 1:27).  사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논쟁적인 이슈 가운데 하나인 “동성 간의 결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Mark Christopher 목사는 『Same-Sex Marriage: Is It Really the Same?』에서 “동성 간의 결혼은 결혼이 아니며 전통적인 기독교적 결혼관과 가족관을 파괴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W. Norman Pittenger 박사는『Time for Concent』에서 “이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이 이성애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기본적으로 타고난 동성애 욕망과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반박합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를 반대하는 Christopher 목사는 한 공동체 사회 안에 두 가지 결혼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Pittenger 박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서로 간에 결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동성애 옹호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지하는 이유는 동성결혼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언약의 보호 아래 성 경험을 누리기를 원하셨는데(창 2:18), 이것은 인간의 성욕은 창조에 뿌리를 둔 것으로(창 1:27), ‘성’(性)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 됨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창 2:24),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에 대해 John Stott는 『동성 간의 결혼도 가능한가?』에서 창세기 2장18절‘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말씀에서 ‘돕는 배필’(동반자)은 그의 ‘성적’(性的) 파트너가 되어 그와 한 몸을 이루어 이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고 자녀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결혼제도’라고 말하며 이 결혼이라고 하는 성적 만남을 통해 하나가 된 두 사람간의 결합을 ‘신비’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이성애 성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이성애 결혼은 그분이 만드신 제도이고 이성간 정절은 하나님의 의도이다”라고 말하면서 오늘날 동성결혼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 세 가지 목적 모두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신학자 Walter Brueggemenn은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고 주장을 했는데 여기서 ‘하나’(창 2:24)라는 단어, 즉 ‘결혼’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신비한 결합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고, Tim Alan Gardner 박사 역시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최초의 커플에게 서로를 즐기며 그들의 하나 됨을 축하하도록 특별한 선물인 성행위를 주셨다”라고 말했는데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두 개의 성을 창조하셨고 이 남자와 여자 사이를 잇는 것이 그분이 제정하신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부부간의 성관계가 ‘거룩한 행위’ 즉, 혼례 첫 날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했으며, Erwin W. Lutzer도 결혼은 두 가지 결속을 만드는데 남녀 간의 헌신과 조건 없는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성적 친밀감을 통해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된다고 말하면서 『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입을 열다』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반영하는 성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의도에서 성을 더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고 그 결과로 자녀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남녀 모두 헌신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하튼 이성애적(일부일처제) 결혼은 남침례교 Albert Mohler 박사가 말한 것처럼 사회화의 결과물이나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며 성적표현은 오직 이성 간의 결혼 언약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결혼관계에서 벗어난 모든 종류의 성적관계나 행위들, 즉 동성애(레 18:22), 혼전동거(고전 7:1-2), 일부다처제(왕상 11:1-4), 간음(고전 6:9), 강간(신 22:25), 포르노(갈 5:19, 잠 6:25), 수간(신 27:21), 근친상간(레 20:11-17), 매춘(신 23:17), 같은 것들은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무서운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계 21:8).  따라서 성경은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이성애자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그 어떠한 논리나 이해도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누구도 동성애는 선천적이며 유전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한 개인에 의한 민권 문제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동성애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죄악시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고(요 3:16-17), 혐오의 대상이 아닌 복음전도의 대상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막 16:16).  그러나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Archbishop of Canterbury George Garey가 말한 것처럼 성경이든, 기독교 전통이든, 결혼관계 밖에서의 성행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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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Newsweek의 커버스토리는 동성결혼의 성경적 근거를 다루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동성애가 가증스러운 죄라는 많은 성경구절들을 인용하지만 이들은 이웃사랑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무시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거부하고 증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기사화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구절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를 정죄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고대 유대사회의 규범에 다룬 특정 본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특히 레위기 20장13절에서 레즈비언의 행위에 대한 말씀이 없기 때문에 동성애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고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은 구약시대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W. Norman Pittenger 박사는 “기독교의 복음의 요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는데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마 11:28), 주님의 사랑이란 삭개오처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지(눅 19:1-10), 죄인지를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묵인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Erwin W. Lutz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사랑은 모든 악행을 정당화 해주는 면허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의 사건 속에서 오늘날 ‘동성간의 연애’(동성애)를 뜻하는 ‘소도미’(sodomy)라는 단어를 창세기 13장13절과 18장20절 그리고 19장25절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이 성경 기사의 배경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겠지만 문제는 확실하게 소돔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입장은 동성애는 성경적 규범에 반하는 것으로 소돔 사람들이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성연애의 죄악에 깊이 빠져 있어 롯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에게까지 그 혐오스러운 행위를 하려다가 심판을 받았다고 해석합니다(창 19:1-5).  물론 이런 해석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상관하리라’(5절)는 말은 “성관계를 가진다”(창 4:1)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두 명의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기 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구약성경에 히브리어 ‘야다’는 943회가 나오지만 육체적인 관계, 즉 성적인 교접을 의미하는 말은 10회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구절은 “우리가 그들을 그냥 알기 원한다”는 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소돔의 심판은 동성애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겔 16:49-50)과 교만과 위선(사 1:10), 그리고 간음과 거짓 때문이라고(렘 23:14), 말하면서 사회적인 무책임과 외지인에 대한 불친절 때문에 멸망당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해석들은 개연성은 있으나 이 일로 인해 소돔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 3장9절예레미야 23장14절 그리고 에스겔 16장46-59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더러운 음행을 소돔 지역의 퇴폐적인 성도덕과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사사기 19장22절에 나오는 기브아의 사건을 통해 그 어휘의 용례와 정황을 살펴볼 때에 당시 가나안 지방에서의 동성연애는 널리 퍼져있는 악습일 뿐 아니라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행위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레 18:12, 20:13), 소돔 사람들이 롯에게 요구하는 것이 분명 동성 강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창 19:5).  더 확실하게 성경의 글자와 문맥 그대로 소돔이 가증스러운 죄악, 즉 동성애를 통해 심판받은 것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 구절을 찾아본다면 아마 유다서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동성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은 없지만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창세기 2장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 이룰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계획은 동성간의 결혼이 아닌 이성간의 결혼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레위기에서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위협적인 선언들, 즉 ‘너는 여자와 동침함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것이니’(레 18:22), 그리고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라고 경고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 특히 Peter E. Coleman 같은 사람은 ‘가증스럽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도덕보다는 종교적 금기인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신학자는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오늘날 폐지된 구약의 ‘의식법’(히 8:13)에 속하는 부분이거나(갈 4:9-10),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관습이기 때문에(골 2:16-17), 현대의 동성애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해석은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 23:17, 딤전 1:10).  사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한 죄의 대가로 당장 돌에 맞아 죽지는 않겠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나와 있고(고전 6:9), 특히 큰 논쟁을 일으키는 구절인 동성애에 관한 로마서 1장26-2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구절들을 구약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구절들과 (레 18:22, 20:13),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레위기의 가르침은 신약교회에서도 규범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동성애에 대한 욕망 자체를 하나님께 맞서는 개인의 정욕에 의한 반란으로 보았는데(딤전 1:9-10), 그 이유는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질서를 반하는 역겹고 가증스러운 행동일 뿐 아니라(롬 1:24),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창 2:24), 철저히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1장26-27절의 말씀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동성애 옹호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겠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닌 “부자연스러운 행동” 즉,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대로 쓰기’ 때문에 상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 중 하나인 John Boswell 박사 역시 바울이 정죄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범하는 변태적인 동성애적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현대어/현대인 성경에서 번역했듯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스러운 법(정상적인 성생활)을 어기고 변태적인 짓(성적범죄)을 저지른” 인간의 부끄러운 행위 자체를 바울이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구약 성경은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행위는 하나님의 정하신 성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로, 인간 스스로가 무절제한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내버려둠으로써 생긴(롬 1:24, 26, 28), 무서운 심판의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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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coming out)이란 은밀한 성적 취향이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나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2000년 가을, 한국에서 커밍아웃한 유일한 방송인/연예인이며 동성애(동성 지향적인/Same Sex Attraction)자인 홍석천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었고, 이미 외국에는 수많은 연예인들(Elton John, George Michael, Ian McKellen, Freddie Mercury, 등등)이 자신을 동성애자인 것을 스스로 밝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교회에서 많이 불리워지는 찬양 중에 하나인 “Glory to God Forever”를 부른 영국출신 찬양 사역자인 VIcky Beeching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혔는데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과 그에 따른 고민과 인생 이야기, 그리고 처음 여성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12살 때라고 말하면서 남학생과 사귀고 싶었고 그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적 성향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후에 오순절 교회를 다녔고 현재 성공회에 다니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그것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감을 극복하기 위해 오직 일에만 매진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동성애적 성향을 갖는 원인에 대해 하나는 ‘선척적인’ 요인에 의해 유전적으로 타고 난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요인으로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견해인데 먼저 동성애를 유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나의 성향을 바꿀 수 없을뿐더러 나는 나의 본성적인 것을 이대로 인정해야만 한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 성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성적 친밀함을 누릴 권리와 동성애적 생활방식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선택에 따른 생활방식이 아니라 유전적 원인으로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틀림없이 동성애 사회에 커다란 유익과 동성애의 부도덕한 오명을 벗을 수 있기 때문에 소위 ‘게이 유전자’를 찾으려고 열심히 연구를 하지만 지금까지 유전적 이론을 입증할만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춘기에 이른 아동이 환경적 요인에 따라 ‘동성애자’나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예를 들어 어릴 적 성장과정에 있어 부모로부터 사랑과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같은 또래의 집단적인 영향을 받아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개연성이 있는 하나의 심리적인 이론일 뿐 ‘정설’(定說)은 없다는 것입니다.

 

Jeffrey Satinover 박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Homosexuality and the Politics of Truth』에서 “동성애가 유전적인가 아닌가, 타고난 것인가 심리적인 것인가 택한 것인가 혹은 사회 때문에 인가를 단순히 단정 지으려는 것은 미성숙한 것이고 대부분의 증명들은 부정확한 것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이거나 후천적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연구 결과는 명백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거나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는 경우는 자신의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 기준을 망각하거나 또는 그것에 대한 복종 의지가 상실되는 경우라고 했는데 C. S. Lewis는『인간 폐지』에서 탁월한 논리로 이렇게 적어 내립니다.  “그 어떤 재간을 부려도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심리학적 진술에서 ‘나는 이 충동에 따라야만 해’라는 실천적 원리를 도출해 낼 수는 없다. 본능에 순종하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본능 역시 그렇다. 우리의 본능은 전쟁 중에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은 성적 친밀함이나 자기표현으로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권리와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 대한 욕심이지(롬 1:26, 약 1:15),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살전 4:3).

 

분명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에 대해 성적순결을 지켜야 하고(딤후 2:22), 결혼한 사람은 성적정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데(히 13:4),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한 성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롬 6:12), 자신의 생활방식과 행동에 대해서는(고후 5:10), 본인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갈 6:7).  사실 아담의 타락을 통해 모든 인간은 죄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롬 5:12), 이 타락한 욕망을 풀기 위해 여자들은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롬 1:27), 일어나 부끄럽고 가증스러운 일을 행한다면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32).  따라서 성욕이 유전적이든 후천적이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창 6:2), 창조된 피조물이며(창 1:27), 하나님은 그 선택에 대해 우리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이고(롬 14:12), 만약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교회나 신자들이 있다면 이 문제를 Christianity Today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뮌헨대학 신학 교수인 Wolfhart Pannenberg 박사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명백하게 거부해야 할 것을 평가하고 있다. 동성애 결합을 결혼과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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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졌던 “Lawrence v Texas”사건에서 6대3으로 텍사스 주의 ‘소도미법’(Sodomy law), 즉 동성 간의 성적 행위를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는데 당시 대법원은 결혼에 관계된 개인적인 결정과 개인적 취향에 따른 성행위는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고 같은 해 11월 매사추세츠 주 최고법원 판사 네 명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막는 일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판결 이후 나머지 주들도 속속 ‘소도미법’을 폐지시켰는데 오늘날 미국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주는 하와이를 비롯해 뉴욕, 워싱턴,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델라웨어, 아이오와, 메인, 뉴햄프셔,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미네소타, 등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을 대표하는 장로교단 중에 하나가 2014년 6월19일 221차 총회에서 목회자가 동성결혼을 주례할 수 있으며(동성애자의 결혼을 법이 허용하는 주 교회 내에서 집례 할 수 있다는 안을 통과시켰고), 결혼의 주체를 “남자와 여자 사이”(between a woman and a man)가 아닌 “두 사람 사이”(between two people), 즉 ‘사람’과 ‘사람’으로 바꾸는 안을 통과시켰고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낙태 도중에 살아서 태어난 아이를 처분(살해)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런 결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이 교단을 떠나지 못하고 총회 결정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만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사실 이들이 교단을 떠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만약 교단을 떠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데 문제는 재산과 건물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교단 법에 따르면 소속 교회의 건물은 원칙적으로 교단에 속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교단을 탈퇴하려면 노회와 재산 분배에 대한 논의를 거치거나 재산 일부(건물 반납)를 포기 혹은 부과된 부담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 일례로 미네소타 주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Hope Presbyterian Church는 교단을 떠나는 조건으로 120만 불 상당의 지교회 건물을 포기했고 같은 교단에서 9번째로 큰 대형교회 중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Menlo Park Presbyterian Church는 2012년에 설립된 신생 보수 교단인 Evangelical Covenant Order of Presbyterians로 옮기면서 노회에 약 900만 불이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는 대가로 교회 재산 전체를 유지한 채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한마디로 건물과 돈에 대한 욕심을 과감하게 포기한 교회만이 이 교단을 떠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는 “동성결혼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 대해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각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나누어지는데 남침례교(SBC), 연합감리교(UMC), 미국침례교회(ABCUSA), 전미복음주의협회(NAE), 하나님의 성회(AG), 미국개혁장로교(RCA), 등은 반대 입장을 확고히 했고 반면에 미국루터교(ELCA), 미국장로교(PCUSA), 성공회(Episcopal Church)의 경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같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성결혼을 찬성하고 지지했습니다.  John Stott는 이런 문제를 놓고 오늘날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도전 가운데서 동성애 논쟁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타종교 가톨릭 그룹인 “Call to Action”에 의하면 동성애는 죄라고 전통적인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고수해 왔던 로마 가톨릭 교회조차도 미국에 있는 사제 중 약 40퍼센트가 성향에 있어 동성애자라는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에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2003년 미국천주교(Catholicism) 주교 의회에서 발표한 “동성간 결합(Homosexual unions)은 결혼이라고 불릴 수 없고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동안 신뢰하는 가운데 맺는 관계”라는 성명을 뒤집어 엎은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과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우리 사회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Homophobia’, 즉 ‘동성애 공포증’ 혹은 ‘동성애 혐오’를 갖는 사람들과 다른 한 부류는 ‘Homophilia’, 즉 동성 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결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보는 ‘동성애 옹호’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동성애 공포/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동성애자들이 비도덕적인 행동(항문교접)과 무서운 전염병(에이즈)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것이고 반면에 동성애를 애호하는 자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것 같이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관계라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으며 누구와의 성관계를 갖는 일에 있어 정부와 사회는 개인의 성적취향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선과 악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문제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고(레 20:13, 롬 1:27), 물론 동성애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요일 1:9), 만약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짓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레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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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술과 담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 교회에서 끊임없이 거론되어 온 문제로 기독교인들 중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자체를 금하는 구절이나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성경 구절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독특한 역사적 산물이지 결코 신앙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술과 담배에 대해서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술과 담배의 문제가 신앙의 핵심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2:8).  따라서 만약 초신자가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여 신앙생활을 중단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중단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직분자라면 반드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 3:1-13).  왜냐하면 직분자의 행동에 따라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실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실족시키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고 경고하고 있는데( 18:6-7), 만일 내가 원해서 아니면 취미로 하는 모든 것들 중에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주고 덕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형제로 하여금 신앙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9:42),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9:9).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2: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이기에(벧전 1:18-19),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샀다면(고전 6:19-20), 그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20).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힌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고(고전 3:16-17),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6:7-8).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몸에다 술을 집어넣는다면 과연 그 몸을 가지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5:11-12).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5:16).

 

그렇다면 성경은 술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술 취하지 말 것을 경고할 뿐 아니라( 5:18), 술에 취한 자와 사귀지도 말 것을 말하며(고전 5:11), 또한 하나님은 술 취한 자를 싫어하시고 그들에게 화가 임할 것을 여러 차례 경고하셨는데( 5:11, 22), 이것은 술을 먹고 취하거나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23:31).  신약에 와서는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주님은 경고 하셨고(고전 6:9-10, 5:19-20), 사실 술에 취하는 행동은 예수 믿기 전에 하던 세상적인 버릇으로(벧전 4:3),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반드시 옛 사람의 행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4:22-24).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2:20), 만일 주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나중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입니다(고후 5:10).  구약성경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나오는데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거룩한 제사장들이지만( 3:1-3),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향로에 다른 불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10:1-2).

 

그러면 이들이 왜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는 다른 불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을까요?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레위기10 8-9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난 다음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 갈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이 말의 의미는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술만 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판단력이 흐려져 분간이 안 됩니다( 28:7).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은 정신이 혼미하고 몸도 말을 듣지 않고 입에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오고 가는 곳마다 싸움질하고 토하고 심지어 길거리이나 골목이 자기 집 안방인줄 알고 개처럼 드러누워서 자기도 합니다( 23:29-35).  술은 인간을 동물처럼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술에 취한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12:1, 고후 7:1).

 

그리스도인은 술을 먹고 취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술을 만들거나 파는 것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계에서 술을 팔아 그 술을 먹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거나 아니면 술에 취해 다른 사람에게 범죄를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죄 값을 하나님은 누구에게 찾습니까?( 18:4). 술 먹고 취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술을 만들거나 팔았던 사람입니까?  만약에 술을 먹은 사람이 술로 인한 사고로 죽었다면 술을 먹고 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술을 만든 사람과 팔았던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간접적인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살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로서( 21:8, 22:15), 주님은 이렇게 술 먹고 범죄한 영혼에 대해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14:12).  왜냐하면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 그 영혼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술을 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8:30-32).  여러분들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술 먹고 취하는 것이나 술을 파는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이 없다면 당신은 이미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작정된 사람인지 아니면 에서처럼 선택받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9:13).

 

사실 하나님은 무조건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든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벧후 3:9), 그분이 기회를 주셨을 때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3:15).  그러므로 술을 먹고 취하는 것과 술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며 그 분 앞에 심판을 자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술 먹는 것을 신앙과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자유하는 자들입니다( 5:13).  먼저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행사하기 전에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원리를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데 고린도전서 8장과 로마서 14장에서 고기 먹는 것과 관련하여 양심이 강한 자와 양심이 약한 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우상제물에게 바쳤다가 시중에 나온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만약 그런 고기를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면 삼가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고전 6:12, 10:23).

 

물론 결혼기념일이나 생일날 가족들과 함께 술 한 잔 마시는 것을 가지고 지옥에 가지는 않겠지만 이웃의 유익을 고려하여 나의 자유를 제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행사의 출발점이고(고전 8:9), 비록 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서 허용된 것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덕이 되지 못한다면(벧전 2:16),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삼가 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0:3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금하고 있지 않는 모든 허용된 일들에 자유 하지만(고후 3:17), 우리의 기호보다 먼저 다른 형제에게 덕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인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고전 10:24).  쉽게 말하면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구체적으로 술 먹지 말라는 구절이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비본질적인 문제이므로 신앙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술/주폭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5-16).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행사되어야 합니다(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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