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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21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가?

오늘날 방언에 대해 말할 때에 “방언하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도가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라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방언기도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유 20절).  즉, 방언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기도는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내 영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때에 말하는 것은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고전 14:27).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을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고전 14:9),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4:2).  만약 여기에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서 덕을 세우게 되는데(고전 14:12-13), Gordon Fee는 이 문제를 놓고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마음을 뛰어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믿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14-15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마음과 영, 모두로 기도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Michael Green 역시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못할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그분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고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이 기도를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요지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는 말로 기도하는 것과 알지 못하는 말(방언)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고전 14:15), 그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 아니라(행 10:31), 덕을 세우는데 있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4).  다시 말해 만약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개인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고전 14:5, 13, 26), 이 귀한 선물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는 우리의 영을 강건케 할 뿐 아니라 기도를 강력해지도록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어 기도해야 된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마음이 너무 피곤하거나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집중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정확히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롬 8:26), 성령께서 돕는 이 기도(유 20절)를 통해 어떠한 것도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영으로’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고전 14:16), 바울이 이 똑같은 용어를 에베소서 6장18절에서도 사용하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때 방언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의 언어인가?”라는 질문인데,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언과 관련해서 이 은사가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인간의 언어에만 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10:44-46, 19:1-6).  물론 오순절 날 방언을 시작으로 복음의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행 2:4), 이 은사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Harold Horton는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and The Gifts of the Spirit』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이 외국어의 형태로 방언의 은사를 받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성경에 의하면 오순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한 명이었고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람어나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한 방언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나라 방언으로 전해진 내용 ‘하나님의 큰일’(행 2:11)은 복음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말하는 것으로(고전 14:15),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행 2:12), 그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행 2:37-42), 이날 이들이 구원받은 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것이지(행 2:14-36), 외국어/방언을 듣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예루살렘 교회(행 2:1-13)와 고넬료 가정(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나타난(행 19:1-6) 방언만이 진짜방언이고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난 방언(고전 12-14장)은 백퍼센트 가짜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거나 쓰기도 어려운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tongue(단수)‘알려지지 않은 언어’(고린도 방언), 즉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기 때문에 거짓된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tongues(복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사도행전 방언) 즉, 외국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헬라어와 영어를 대조시켜 KJV(한글)만이 완벽하게 번역된 것처럼 강조(우상시)하는 Peter S. Ruckman(말씀보존학회)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은 서너 개 빼놓고 거의 ‘방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유독 KJV 만큼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단수에 원본에 없는 unknown을 추가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복수는 with tongues으로 번역하면서 단수는 ‘알려지지 않는 언어’이고 복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잘못된 것은 가령 나무(단수)를 나무들(복수)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단수나 복수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뜻이 달라져 하나는 ‘진짜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방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불신자)에게 하는 것”(고전 14:22)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솔직히 이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한다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여호와 증인들’처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분명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이 방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이 사람의 언어인 외국어라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면 “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는가?”(고전 14:13)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기도했다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고전 14:14)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만일 방언기도가 오순절 때와 같이 알려진 외국어라면 왜 사도 바울은 교회 외에 사적인 공간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즉, 고린도교회 방언은 알려진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 14:5)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이들의 주장대로 번역하면 ‘외국어로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으로 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말씀도 ‘외국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로 됩니다.  여기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알려진 외국어로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하는 것과 인간에게 이미 알려진 언어라면 그 언어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횡성수설 하거나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이 쓴 글에서 무지와 억지, 그리고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으려는 소름끼치는 자의적 성경해석(벧후 1:20-21)이 난무하고 방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은 성경이 증거 하듯 성령이 주신 귀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39).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 현대 방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 모두가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방언기도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귀신에게 속아 옹알거리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들이 말하는 악령(?)에게 더 강하고, 더 세게 다스림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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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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