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사람이 죽는 날까지

혹은 마지막 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은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가 전하는 말이 임종을 앞둔

그 사람을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천국에는 죽음 직전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천국의 세 가지 놀라운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그가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임종 직전의 개종

또는 회심에 대한 선례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다. 

십자가에서 회심한 강도는

누구든지 죽음 직전에라도 주님께로 나아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증거다.

이 말씀은 누구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나

모두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여길 수 없는 유일한 예이기도 하다.

 

R. T. 켄달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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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 중에서

‘참된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란 어떤 것인가?

가톨릭일까, 루터파일까, 츠빙글리파일까

재세례파일까, 후스파 일까, 칼빈파일까?

진실로 종교적인 문제에서 절대적 확실성이 존재하는가? 

진정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해석이 가능한가? 

독선가인 칼빈과는 반대로

카스텔리오는 겸손하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하고 있다.

 

종교의 진실은 본성상 신비로운 것이며,

일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랑이 사람들을 깨우치고

최후의 말씀을 보존하지 않는 경우에

그런 논쟁에서 한없이 피가 흘렀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은 부족할 수도,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호 간의 관용이 첫 번째 의무라는 뜻이다.

 

누군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일이 왜 필요한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

혹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 대해

너무나도 뚜렷한 확신을 가진 나머지

오만하게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오만에서 잔인함과 박해가 나온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과 견해가 같지 않다면

조금도 참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완고함 때문에 반항이 생겨나고

정신적으로 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잔인한 행동을 하려는 저 거칠고 야만적인 욕망이 생겨난다. 

오늘날 이런 선동적인 비방에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열을 올리고 있다.

카스 테리오는 단 한 가지만이

이러한 야만성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관용이었다. 

우리의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서로 나란히 모여 살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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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삶은 어떠한 원칙 위에서 구현될 있는가?

대략적으로 가지를 언급할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의무의 삶을 구현되어진다.

,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우리의 순종에 의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있다.

표현은 1549년에 발간된 크랜머의 기도서에 나오는 요리문답에서 유래되었다.

내용을 보면 이렇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의무는 

그분을 믿는 것이며,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께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며,

그분께 나의 전폭적인 신뢰를 맡기는 것이며, 

그분을 부르는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성호와 

그분의 말씀을 공경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생애의 모든 날들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구원받은 삶은 이웃 사랑의 삶으로 구현된다. 

크랜머는 자신의 기도서에 있는 요리문답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의무는 

자신처럼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모든 사람들에 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이 있는 모든 방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발전을 추구한다.

그것은 마음의 의지의 문제이며

감정을 초월하는 문제이고,

순간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헌신의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생활 속에서의 훈련을 요구한다.

 

셋째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유의 삶으로 구현된다. 

이것은 다시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의 필요성으로부터의 자유,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형적인 법령에 부여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피조물들을 사용하고 누릴 있는 자유(딤전 4:4-5, 6:17),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함으로 얻어지는 성취와 만족이라는 차원에서의 자유 등이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삶은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는 삶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은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삶이다.

 

D. A. 카슨 『하나님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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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적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은 어떤 사람이

땅에서 오랜 삶을 마치고 무서운 심판대 위에 섰는데,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엄중하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을 읽다 보면,

회개라는 요소가 빠지지 않고 나타납니다.

회개의 필요성이야말로

성경이 논쟁하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자명한 일로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성육신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셨다는 사복음서의 이야기가 납득가지 않는 사람들,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을 이해할 없다는 사람들,

구속 사상과 의인이니 성화니 중생이니 하는 용어들이

낯설기만 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사상들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죄에 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임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과 사뭇 다르게

시종 죄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인간은 털끝만치의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는 ,

복음은 인간과 무관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은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은 과연 이러한 기쁨을 아십니까?

“영혼을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신합니까?

 

이처럼 간단한 질문을 통해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테스트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간단한 질문에 마음이 찔린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그리스도인다운 면면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 사실을 고백하십시오. 

지체하지 마십시오.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그분께 아뢰십시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성령의 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고 죄과를 시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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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인 성령의 사역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완악하고 교만하고 반항하며 불신적인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는 사역에 속한다. 

성경은 이런 사역을 성령이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속에 신을 주며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11:19).

 

둘째, 우리가 죄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사로 가능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사를 베풀고 그것을 더욱 넘치도록 하며

효율적으로 적용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하신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스라엘 회개케 하사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느니라’( 5:31).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죄를 이기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3).

 

여기서 우리는 다음 가지 질문들을 대답할 필요가 있다.

 

번째 질문: 성령이 어떻게 죄를 죽이는가?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 죄를 이기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서로 대조시켰다.

 

육체의 열매( 5:19-21) 성령의 열매( 5:22-23)

서로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열매가 우리 안에 넘치도록 함께 공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서로 다른 종류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함께 거할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5:24).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있는가?

해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으로써일어난다는 것이다( 5:25).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풍성한 은혜에 따라서

행할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야말로

죄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다.

성령은 육체의 열매들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을 무너뜨리고

그것들을 대적하게 하여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고 성장하도록 역사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이라고 말씀한다( 4:4).

 

번째: 성경은 인간인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는가?

성령만이 일을 있다면

전적으로 성령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는가?

성령의 사역 방식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고

은혜를 통해 우리로 선행을 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2:13).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26:12).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이기도록 역사하실

죄를 이기는 행위를 여전히 우리의 순종의 행동으로 간주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받기에 적합할 때만

간섭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하신다.

순종을 위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지혜, , 양심, 그리고 감정을

우리의 인품에 따라 사용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협력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

태만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영향을 받고

수행되며 완성되는 것이다.

 

오웬 『내 안에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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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종이 봉지를 위조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유는 위조한 가치가 있는 것만

위조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가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모조하려고 한다( 8:9-11, 7:22).

예를 들면 점쾌, 강신술, 운수, 점성학 등을 통해( 20:6, 19:26, 왕하 21:6),

가짜 인도하심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당신을 예수님께로 가까이 이끌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실 것이지만,

사탄의 인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하고

당신을 속박할 것이다.

 

진정한 인도하심인가를 시험해보는 가지는

당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인도하심이

성경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령님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

 

로렌 커닝햄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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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을 구별 짓는 주된 표지는 무엇인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증해 주는 검증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각자 서로 다른 대답을 있을 것이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해 주는 것은 진리’,

정통적이고 올바른 신조,

개혁주의의 신앙고백들에 대한 충성이라고 대답한다.

옳다!

진리는 신성한 것이고,

건전한 교리는 교회의 안전에 지극히 중요하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계시된 종교의 ‘부탁한 것을 지키고 굳게 서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지키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엄숙한 권고들을 결코 잊어서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사랑은 지식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진정한 제자의 표지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인정하노라‘

루터가 말했듯이 이신칭의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모든 기독교 교리 중에 1 조항이다”

그리고 Granmer 이것에 같은 뜻의 부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누구든지 이것(교리) 부인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없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진술을 인용하면,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라는 전체 섭리의 핵심이요

중추이며 모범이고 진수이다”

나는 말에 동의한다.

종교개혁의 슬로건이었던 ‘Solo Fide’,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또한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도가

사랑이 믿음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서 종교적 체험 강조한다.

체험은 보통 특별하고 생생한 것으로서,

그들은 체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재현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옳다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으심은 실재하는 것이다.

‘말할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에 비하면

다른 것들에 마음이 쏠리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체험보다 위대하다.

 

마지막 범주의 사람들은

실제적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표지로 섬김’,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한다.

역시 옳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셨으므로

그분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궁핍한 사람을 보고

그의 필요를 채워줄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할 있단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특혜적 선택

또는 우선적 관심이 새로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봉사보다 위대하다.

 

요약하면,

지식은 매우 중요하고,

믿음은 필수 불가결하며,

종교적 체험은 필요하고,

봉사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자신을 주시는 완벽한 사랑으로 서로 영원히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답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일가는,

중요하고 탁월한 특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 짓는 특성이다.

어느 것도 그것을 몰아내거나 대체할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스토트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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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당신이 인생을 보는 방식을 하나님은 바꾸실 있다.

증거가 필요한가?

엘리사와 사환의 예가 어떨까?

사람이 도단에 있었을 ,

성난 왕은 군사를 보내 그들을 멸하려 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 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5-17)

 

사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사를 보았다.

당신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없다고

누가 말할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

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시각을 교정해 주실 있다.

 

그분은 물으신다.

“누가…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그리고 답하신다.

“나 여호와가 아니뇨”( 4:11)

 

하나님은 발람으로 천사를 보게 하셨고,

엘리사로 군대를 보게 하셨고,

야곱으로 사다리를 보게 하셨고,

사울로 구주를 보게 하셨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0:51)

 

많은 사람이 소경의 간구를 올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분명한 시력을 얻어 돌아갔다.

하나님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일을 해주시지 않으리라

누가 말할 있겠는가?

 

맥스 루카도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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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영원한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영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먹고 입히고 치유하는 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복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적 존재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 내에 있는 영적-육체적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적으로 올바른 정의이다.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다르게 되라고 부르신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다.

그의 헌신은 부분적이지 않고 전체적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평일에는 이방인인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집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직장에서는 비그리스도인인 그런 사람도 아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태도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기쁨과 평안은 없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

, 우리의 인격적 성숙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주되심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다.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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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이처럼 끔찍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한 것은

회중 가운데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설교는

여러분 중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처참한 지옥이 여러분 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이글대는 무서운 웅덩이가 있습니다.

지옥문이 입을 활짝 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가

오늘 아침 다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난 지금까지 지내면서

아직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엄숙한 시간에

여러분의 악한 방식대로 예배드림으로써

정결하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고 있는 지금 순간,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예배드리고 있는 동안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역시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지금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 거듭나지 않은

모든 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품행이 얼마나 방정하며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젊다구요?

여기서 나이 같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여러분,

여러분은 특히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심히 많은 죄를 범했으며

마음 역시 극도로 강퍅합니다.

그리고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향유하고 있는 

소중한 시기를 등한히 여길 예정입니까?

이곳에 회심하지 않는 어린이 여러분

지금 매일 밤낮으로 여러분에게 분노하고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향해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까?

 

회중 가운데 그런 비참한 가운데 빠질 사람이

오직 사람뿐이라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사람이 누구인지까지 안다면 얼마나 끔찍할까요?

아마 사람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소리 높여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데 맙소사!

그런 사람이 사람만 있는 압니다.

지옥에 가서 오늘 들은 설교를 기억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영혼을 등한히 여긴다면

은혜의 때에 우리 마음은 점점 강퍅해져

더욱더 죄를 짓게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사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이 되는 것보다 위험한 일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성령을 받을 것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틀림없이 세례 요한의 때처럼

도끼가 아주 특별하게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베여 불에 던지울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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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완전히 알고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 안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의 자유롭게 하심을 통하여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를 얻는지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육신에 속하다’( 7:14, 18)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31-3절에서

말에 대해 설명한 것을 참고해야만 한다.

거기서 그는 비록 거듭나긴 했으나

아직도 자신을 성령께 완전히 맡기지 않음으로 인해

신령한 자가 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데

말을 사용한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지만

육체의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안에서 강한 힘을 행사하는 요소에 의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성령을 가졌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그분의 능하신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기 힘만 가지고 악전고투하는 ,

그들은 신령하게 행하지 않으며

신령하게 수도 없다.

 

바울이 여기서 설명하는 사람은

거듭났으면서도 자기 자아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기는 했지만

갈라디아서 525절에 따르면

성령과 더불어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육적인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성령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원하게 하시고

아울러 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느니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자가 율법으로부터 확실하게 해방되지 못한 이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실로 귀착될 것이다.

그는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안에서 기뻐하기까지는 하지만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므로

살아있는 자는 이것들을 행하게 것이라 하는

믿음의 법에 굴복할 때에만

그는 다른 , 성령을 통하여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께 연합할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참으로 열매를 맺게 것이다( 7:4).

 

앤드류 머리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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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 토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중에 하나만을 있다.

거기서 도망을 가든지 위에서 죽든가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죽는 곳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직설법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명령법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과 함께 죽으면서 동시에 그분의 부활의 권능으로 사는

긴장에서 결코 벗어날 없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유익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칭의를 받는다.

 

그들은 권능을 실감하며 더욱 성화된다.

그들은 수치를 지면서 최후에 옳다고 입증되기 위해

길을 가며 완전히 주님과 동일화 때까지 예수님을 본받는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승리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에 대해 말하지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경험할 없다.

 

성금요일이 없다면 부활절도 오순절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도록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과 함께 죽도록 부름 받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삶에서

십자가는 과거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기도 하다.

 

데렉 티드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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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를 믿는 ,

이것이야말로 영혼을 멸망시키는 일이다.

자기 의를 신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한다.

 

사랑하는 자여,

당신은 모든 면에서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죄뿐만 아니라

당신의 종교적 행위도 당신을 멸망시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당신이 놀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악한 때문에 멸망할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 때문에 멸망할 수도 있다.

 

자기 의와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어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진노를 풀어드리고,

그분께 은혜를 얻고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 사람은 멸망한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직무를 무효로 만들고

자기의 행위와 미덕을 구주로 만드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여,

죄를 조심하라.

당신이 많은 일을 하지만,

가지 죄에 걸리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된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당신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3:9).

“대저 우리는 부정한 같아서

우리의 의는 더러운 같으며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4:6)

 

세상을 사랑하는 ,

이것이야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신앙고백을 하면서

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곳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런 죄의 속이는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세속성과 탐욕을 아는데도 정작 자신들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와 가면으로 세상을 향한 사랑을 덮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눈이 멀어 자기 기만 가운데 멸망한다.

신앙고백을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보다는 세상에 애정을 갖기 때문에 땅의 것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육신을 좇아 결국 멸망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저희의 신은 배요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19).

 

그러나 그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히 여깁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당연하죠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을 깊이 꼼꼼히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들이 세상을 얻기 위해 관심과 노력을 집중한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이런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뚜렷한 특징 하나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런 은밀한 때문에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아주 불법적인 행위들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있지만,

합법적인 안락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가 이미 안전하다는 뻔뻔한 착각에 빠져 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라고 외칠 ,

멸망이 갑자기 그들을 덮칠 것이다.

이런 착각 때문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때까지 자기들의 기름이 부족함을 알지 못했고,

기름을 사러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은 사람들이 지금 없는 지역이나 집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근거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근거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상태가 안전하다고 믿으려고 한다.

결과, 변화를 위해 힘쓰지 않고 결국 그들의 가운데 멸망한다.

당신은 평안한가? 

그렇다면 무슨 근거에서 평안한지 내게 보이라.

그것이 성경에서 인정하는 평안인가?

 

당신이 진정한 신자라는 확실한 표지를 보여라.

당신은 세상에 살았던 위선자들보다 나은 어떤 것을 보일 있는가?

그럴 없다면,

당신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평안은 어떤 불안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육신적 평안이 영혼에게는 치명적인 원수라는 것을 알라.

그것은 미소 짓고 맞추고 좋은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에는 당신의 급소를 찔러서

당신을 죽게 만든다.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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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고통당하는 마음에 향유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실한 해석과

양심에 강요하는 율법의 요구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보존되는 곳에서만 유지될 있다. 

 

율법의 요구를 제외한 율법의 해석이 우위를 차지하는 곳에서는

독선적인 바리새주의가 조장되고,

복음의 선포가 율법의 요구를 배제하는 하는 곳에서는

신앙 지상주의의 방종이 발생케 된다.

 

지난 100 동안 아마 기독교 사회는 복음 설교를 50 들었다면

율법에 관한 설교는 정도 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실로 결과는 비참하고 가련하게 되었다. 

, 느슨하고 부주의한 걸음과

동시에 경박하고 뼈가 없는 종교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연속해서 해석하고,

과정에 있어서 율법에 관한 구절에 이르면

그것에 머물러 그의 청중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이전보다 ) 그에게 요구되어지고 있는 본분이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19). 

 

여기에 말의 순서를 주목해 보면 ‘행하며 가르치는’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그의 아들에게

“네가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고 권고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종들에게

생활의 고결함과 교리의 건전함을 요구하고 계신다. 

 

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서로 다른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심히 모욕하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설교와 반대가 된다면,

복음 전파하는 일을 전적으로 그만두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말이 조화되지 않는 사람의 설교에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은 그의 청중들의 마음에 

확신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사역자는 먼저 자기가 설교할 것을 실천하지 아니하고는

양심의 깨끗함과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가르칠 없다.

 

아더 핑크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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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히브리서 24절과 갈라디아서 3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약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였으며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신약교회들이 그와 동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모든 신약교회의 현상이

우리에게는 전혀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신약교회의 현상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우리 모든 교회들도 동일한 문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고 저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독단적으로 이렇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사들이 여러 세기동안 지속되었다는

분명한 역사적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사와 이적과 은사들이

틀림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기록들이

터툴리안을 비롯하여 많은 교부들의 생활과 

저술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존 낙스의 사위인 위대한 학자,

존 웰쉬의 전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뛰어난 역사가들이 존 웰쉬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피신하고 있을 때에

실제로 죽은 사람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단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이런 기사와 이적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나버렸고

결코 그러한 이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며

성령의 능력에 제한을 가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중국의 호시 목사님의 전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 전기에 나오는 기적들,

초대교회에 분명히 나타난 동일한 은사들이

표현과 같은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세기들을 통하여 이런 주제들에 대하여 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성경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초대교회를 출발시키기 위하여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이런 은사들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침체될 때마다

그리고 세상이 요란하며 강력하며 막강할 때에 

더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시대야말로 

그러한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은 기대해야 할 때입니다.

 

로이드 존스 『성령의 주권적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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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그의 직무에 있어서

많은 사역을 행하시는데 거기에는 회심,

특별히 중생이 포함되고,

또한 그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덧붙이면 성령은 확신과 보증,

그리고 그와 더불어 증거와 증언 및 봉사와

사역의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활동을 하십니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들을 분명한 구별이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는 끝없는 혼란이 있게 됩니다.

그의 사역은 이렇게 분류되어 질 수 있습니다.

즉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면 그의 간접사역과 직접사역입니다.

 

성령은 오늘날 교회에 임재해 계시며,

또한 그곳에서 일반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역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일반사역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독교의 부흥에 대해 살펴보는 그 순간,

그것들이 교회사에 현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그것들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이 동작주(operator)가 되시지만,

그는 이제 예외적이고 드문 방식으로 작용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데,

그의 일반사역, 즉 성령은 우리 마음에 그의 뜻을 밝히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보이시며,

우리를 가르치는 자나 전파자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성령의 사역이 다소 간접적이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이 분명하며 명백합니다.

 

실로 이것은 구약에 있는 성령의 사역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과의

뚜렷하고도 가장 큰 차이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령은 특별하고 직접적인 사역을 위하여 구약에서는 어떤 사람,

즉 선택된 사람, 예를 들면 선지자와 같은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이 일종의 무아경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들 가운데 조용히 역사하고,

또 그들의 능력을 조금 높여 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데,

계시와 능력에 관한 의식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역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엘이 말했듯이 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임하실 때를 우리가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큰 차이점은 성령을 받게 될 사람들이

아주 다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풍성함과 부요함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사에서 특히 부흥기들에 있어서

아주 흔하게 입증되어 온 것입니다.

 

저는 300년 전의 청교도들 가운데 위대한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존 오웬 박사의 진술을 인용하려 합니다.

이것은 그의 글 “성령과 교제에 대한 논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이나 그 자신의 사역들,

혹은 어떤 논리나 추론과 결론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 주시고 또 즉각적인 사역,

마치 성령께서 엘리사벳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라이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세례요한을 복중에서 기뻐 뛰어놀도록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실 때,

그때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한 기쁨과 환희가 넘쳐 나게 됩니다“

 

이제 존 오웬과 같은 사람으로 그와 동시대 사람이며,

이 영적 창공에 밝게 비추고 있는,

또 다른 별인 토마스 굳인 박사의 글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임하시고 인간을 압도하시며,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그는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시켜 주며,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일반적이 신앙의 빛을 넘어선 빛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고 있는 요점인데 즉 일반적이 아니라 예외입니다.

토마스 굳윈에 따르면 이것은 어떤 다른 것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여러분을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인도하는 체험으로,

그것은 실로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엄중한 경고를 주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것은 평상적인 아니라

바로 천국 문에 이르기 위한 비상하여 예외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것을 넘어선 단 한 가지의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 면에서 여기 두 사람과는 아주 다른,

특별히 그의 신학에 있어서 다른 사람인 요한 웨슬리의 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18세기의 사람으로 청교도나 개혁주의나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알미니안 교리의 선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도 위의 두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성이나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즉적적이고 직접적인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미리 맛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기만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기

오래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교회 역사상 세 분의 뛰어난 사람들에 의한

성경적 교훈에 대한 가르침과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세 분 모두는 체험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이고

또 압도적인 성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교회의 생활에서 이것과 성령의 일반작용과를 혼동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대한 면에서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며,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제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이란 이 구절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시금석입니다.

 

오늘날 제가 느끼는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억제를 옹호할 때가 아닙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자제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깨어 일어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서 교회가 약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성령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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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지식과 체험을

갈망해 본적이 있습니까?

모세는 바로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인자하게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모세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사야도 한번은 하나님을 어렴풋이 적이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5).

그는 너무나 놀라 비틀거릴 정도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영광을 언뜻 보게 되었을 ,

“발아래 엎드려져 죽은 같이 되매” 라고 말했습니다(:17).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조금 밖에 알지 못합니까?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17:3).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어떻게 말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14 전에 하늘로 올리움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기이하여서 자기는 진실로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일이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가능성들을 인식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여러 세기에 걸쳐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숲속에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중에

체험한 것을 기술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적이 있습니까?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드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이야기를 읽어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세대와 보다 가까운 사람을 소개 한자면 무디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여주셨을 ,

그는 하나님께 그만 손을 거두어 달라고 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육체적 체질이 영광 아래서 부서지고 녹아지는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손을 거두어 달라고 요구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것들을 자주 읽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의 임재 속에서 또는 임재에  대해서 느끼고는

문자 그대로 땅에 엎드러져 기절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기절하거나 죽은 것처럼 되었다는

기록을 읽을 놀라서는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의 부분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나 응답은 부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분명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보여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구하십시오.

교회를 위해서,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로이드 존스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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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전통이라는 떼어내기 힘든 짐이 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려는 여정에

이것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짐도 기도함으로,

팀 사역을 통하여,

진솔한 가르침과 오랜 인내로

드디어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복음주의 교회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성경에만 초점을 맞추는 부류와

영적능력을 증시하는 부류가 그것이다.

말씀 중심의 교회는 가뭄에 콩 나듯 이따금씩 능력을 경험한다.

반대로 능력 중심의 교회는 말씀의 역사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들을

우리는 테러범 다루듯 했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교회의 덕을 위해서

내 백성들에게 은사들을 허락했다면,

왜 너는 그것들에 대해 가르치지 않느냐

너는 지금 내 능력의 흐름을 막고 있지 않느냐

내 백성들이 도구들과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내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겠느냐?

 

너무나 많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을 위해 충분히 무장하지 못했다.

지도자 된 우리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중 삼분의 일이 땅 속에 묻혀있다.

성도들의 손과 발이 묶여 있다면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룰 수 있겠는가?

만약 성경의 모든 은사들이 종합 선물세트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분명 죄일 것이다.

 

빌 헐 『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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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현재 땅에

이토록 놀랍고도 은혜롭게 나타나고 계신데도

신중함이라는 원리 위에서 행한다는 구실로

역사의 결과가 어떠한지,

그리고 역사의 영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린다는 구실로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오랫동안 망설이는

정당한 구실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일 그들이 보기에 장애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자 기다린다면

그것은 마치 바보들이 강가에서 물이 모두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 됩니다( 18: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항상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육적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게 보이고

모순으로 보이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항상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에 어떤 장애물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성향과 영적인 감각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믿지 아니하고 성미가 비꼬이고,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나 깨닫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13:13).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는

성령에 대해 짓는 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롭게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대적해서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를 대적해서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은택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가지 요소만 갖추면 것입니다.

,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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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그랬다.

그녀는 내가 그곳의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오슬로에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즉시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이 그녀를 집회 장소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테레시아는 돈을 모아서 왕복 비행기 표를 샀다. 

떠나기 전에 나이로비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

그녀가 갈망하는 성령의 불을 받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오슬로의 교회가 문을 열자마자 테레시아가 먼저 들어갔다.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때까지 테레시아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지역에 사는 자매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당신이 하나님께 받기 원하는 어떤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겠다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놀라운 확증이었다.

테레시아는 자매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강대상에 올라간 나는 테레시아의 존재를 금세 알아챘다.

노르웨이 교회에서 아프리카 여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은 그녀는 눈에 띄었다.

내가 병자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그녀는 기도를 받으러 쏜살같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미 8년이란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음 초청까지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내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와 앞에 서서 기대감에 떨고 있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테레시아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는지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님의 불은 손의 안수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여하간 나는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강력한 힘에 의해 아래로 밀려 넘어져 공중으로…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녀의 신발이 양쪽 벗겨졌다.

한쪽 신발은 노르웨이 청중들 한가운데 떨어졌는데 다시 찾을 없었다.

 

오슬로의 집회가 끝났고 나는 독일로 돌아갔다.

그때 테레시아는 교회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친구들이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날 신었던 신발 짝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밤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신발 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테레시아에게 부으신 기름부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축복을 헛되이 받지 않았다.

테레시아는 사역의 능력을 받으려고 왔기에 사역을 것이었다.

1988 우후루 공원에서 울던 여자 테레시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오 하나님, 본케 목사님에게 10 명의 영혼들을 주실 있으시다면

제게 100명을 100명이라도 주세요.

주여, 그러면 저는 행복한 여자가 되겠습니다”

 

테레시아는 오늘날 매우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아프리카 사람들 입에 그녀의 이름이 회자된다.

나는 그녀의 승리를 전해 듣고 주님께 물었다.

“왜 주님께서는 위대한 사역에 이혼녀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 성경학교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많은 훌륭한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신 테레시아를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을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테리시아를 선택한 것은 내가 깨어진 그릇을 취하여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말씀이 나를 얼마나 겸손케 했는지 모른다.

 

오슬로 집회 2 그리고 내가 우후루 공원에서 설교한지 정확히 10 후인 1998

나는 아내 아니와 나이로비를 방문했다.

우리는 공원 옆의 호텔에 묵었다.

나는 일부러 첫째 주일에 그곳에 찾았다.

그날 우후루 공원에는 20 명이 모였다.

테레시아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설교했고,

수천 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마치 사도행전이 계속되고 있는 같았다.

 

라인하르트 본케 『부흥, 성령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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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인

나는 그분께 마음의 집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지저분한 마음의 서재를 깨끗이 치워 주셨고,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주방을

하나님의 양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아늑한 거실은 그리스도와 대화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재능과 기술,

작업실에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게 되었고,

모임, 교재 활동과 여흥들인 오락실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즐길 있는 침실에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나는 나의 존재와 모든 소유인 집문서를 그분께 맡겼습니다.

그날. 그분은 삶을 받으시고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이보다 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릴 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하시고,

삶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이제 영원토록 나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은 나의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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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은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 후에 하셨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가?

예수님은 가지 모두가 이유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할 없음”과 “하고자 하지 않음”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진술하든

우리는 어느 쪽도 무시해서는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인간 존엄성과의 양도할 없는 측면이다.

책임은 심판 날에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형을 선고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위해하든지 미미하든지에 관계없이

사회적 계급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억압적으로 짓눌려서 끓어 엎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최후의 존경의 표시로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진술할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다 책임은 인간에 있다.

가장 우매한 죄인에게도 일말의 결정 능력은 여전히 있으며,

실로 하나님을 향한 방자한 반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책임을 벗어날 없다.

운명이니 형이상학적 구조나

그의 연약한 본성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중심인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다.

나치 전범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단지 명령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언제나 동일하게 책임을 그들에게 물었다.

실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 책임,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그분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그것도 희생의 피를 들고 들어가는 외에는

어떤 사람도 휘장 속으로 들어갈 없었으며

만약 들어간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서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엄밀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가 사이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언약궤) 가까이 하지는 말라’( 3:4).

웃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주제넘은 행동의 위험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와 정결케 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말보다도 가장 두려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내게서 떠나가라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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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패배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수많은 교회 일꾼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참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원인은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정말로 기도가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가?”

기도가 세상에서 최고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기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고 믿는가?”

정말 하나님의 기도 명령에 관심이 있는가?”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는가?”

 

사실 영적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있어서 실패들은

모두 기도의 결핍과 부족에 기인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생활할 수 없고, 올바르게 봉사할 수 없다.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말이 사실인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기도하는 일임을 잊지 말자!

 

그 이유는 기도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기도 중 가장 놀라운 기도를 하시기 직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론하면서 약속하셨다.

어떤 사람의 입술에서 이런 약속이 나왔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하신 이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4:12-1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약속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겠는가?

그 어느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이 약속은 제자들뿐 아니라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케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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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조롱과 비방을 당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다.

 

그와 그의 동생 찰스와 조지 휘트필드는

영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막는 사람들이라고

현대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웨슬리의 설교는 압제를 받으며

힘없이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불렀고

교회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그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그는 온갖 죄목에 붙여져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정부와 사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를 반대하는 책과 전단이 나돌았다.

 

또한 그는 수십 번이나 그를 반대해서 일어난 폭도들에 의해 죽을 뻔하였다.

웨슬리는 이와 같은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즉 자신이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루는 웨슬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며칠 동안은 아무런 핍박도 당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어느 한 사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곧 말을 멈추고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하나님, 혹시 제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그 반대쪽 울타리 한쪽 끝에서 그 기도를 듣고 있던 한 사나이가

그가 바로 웨슬리임을 알아보았다.

“잘 됐군, 저 감리교 목사를 내가 손을 좀 봐야겠어!”

그는 벽돌하나를 집어 웨슬리에게 던졌다.

벽돌은 웨슬리를 살짝 빗겨갔다.

그러자 웨슬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었군요.”라며

펄쩍 뛰며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벽돌을 던진 지 얼마나 되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로렌 커닝햄 『네 신을 벗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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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 성이다.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명약관화하거니와,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한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 내의 특정한 당국

또는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백성이며,

왕다운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통하여

믿고 순종하며,

완전한 사랑으로 헌신하라는

요구를 받은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구별은 있고,

또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본 동등성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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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마 11:28-29).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평온과 사랑과 기질로 옷 입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전가하신 의로 옷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롬 13:14).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어린 양이며,

성도들 역시 어린 양이다.


이런 미덕들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의 본성이거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덕들의 독특한 본성을 상징하시려고

비둘기를 택하셨다.

가장 적절한 상징은

사물의 독특한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영을

그들의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신비스러운 몸과 머리와 지체들에게는 한 영이 계신다(고전 6:17, 엡 4: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요 20:22).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것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 옷깃까지 내림과 같다.

양자의 경우 모두 그것은 평화와 사랑의 영이다.


참된 성도를 구별하는 표지로서

신약성경이 가장 자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은

사랑의 미덕과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고,

자신들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알게 해주는

특별히 뚜렷한 표지로서 종종 제시된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분명하게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성경은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싸움을 즐기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무정하며, 인색하고, 교만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수 있다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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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력들

즉 눈물, 경련, 신음, 고함소리, 육체적 고뇌,

또는 기력의 소진 같은 것으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체에 나타난 그런 영향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데에서도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외적 양상을 보고서

그 사람들이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성경에는 그런 신체상의 영향들을 배제하라는

영분별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문제에 대해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잡음이 많이 들린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난 어떤 역사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창세 이후로 어떤 일에서건

대대수의 사람들이 크게 감동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란이나 소동이 없었던 적이 있을까요?

인간의 본성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받은 인상들이

그들의 신체에 영향을 크게 미치곤 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대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몸을 떨곤 했다고 해서

바울이 된 사울과 빌립보의 간수가 떨었던 것이

양심에 죄를 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크건 작건 신체에 미치는 영향들을 반대하는

모든 반박은 너무 경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거도, 기준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요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 버린

교만하고 가식적인 위장꾼들이며,

평화의 파괴자들로

감옥이나 족쇄에 갇혀 마땅한 자들인 것처럼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부흥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마음에

소중한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며,

또 부흥이 자신들로 하여금 잘난 체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에게서 정욕의 대상들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라사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 지역에 오셔서

그분의 영광스런 능력과 은혜를 발하심으로

군대 귀신을 물리치시고

오랫동안 군대 귀신의 포로가 되었던

가련한 사람을 구원하셨을 때

모두 경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자신들의 돼지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모든 무리가 와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지경에서 떠나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신들의 더러운 돼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자기 동네에 군대 귀신이 들어 있는 돼지 떼를 가지는 것이

그것들 없이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흥의 흠집들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목사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집행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받게 될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 일을 그리스도께 맡겨 두어야 합니다.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자요

원수 갚는 것은 그에게 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아 휘두르는

주제넘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부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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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넘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악의 권세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악의 희생물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확인하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우리는 영들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도 성령님과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천상의 권세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의 권세들과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가공할 힘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귀는 스스로를 ‘빛의 천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고후 11:14)

마귀는 그 정도로 교활하며 교묘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교(邪敎)의 가르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단들은 항상 언제라도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런 악의 권세들에게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성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점성술과 강신술,

여러 다양한 사교와 거짓 가르침과

마귀의 교리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관심이 부흥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저들의 표적들이 됩니다.

그들의 외관은 너무 그럴듯하고 너무나 가식적이며,

마치 우리의 친구들인 것처럼 나타나서,

우리의 영혼들과 기독교인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한몫 해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아야만 한다는

긴박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모른다면

마귀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면서

여러분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디모데후서 2장26절에서 ‘마귀의 올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희생물 또는 포로가 되어 끔찍한 결과들로 인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알아야 하며,

이것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전능한 권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전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때에만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에베소서 6:10-13)


로이드 존스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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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문제의 모든 측면 중에서

오늘날 성령의 권위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관심은 우리 주님의 인격과 권위에 쏠려 있다.

물론 성경과 그 권위에도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성령과 그의 권위에 대해서는 얼마나 듣고 있는가?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어떤 국면도 이와 같이 비극적이리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잘못 이해되어 온 것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 질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의 주된 근원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소홀히 취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체면과 위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위엄이란 말은 

내가 볼 때 19세기 중엽에 사용되기 시작한 치명적인 단어이다.

그 세대의 선조들은 큰 신앙적 각성과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였다.

그들 자신의 위엄 또는 지위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즈음에

이와 다른 사상이 들어와

사람들은 위엄을 갖춘 예배의식의 필요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사의 회심이나 성령충만함,

그리고 이에 따르는 영적 통찰력과 권위보다는

목사의 지적훈련이나 지식구비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것은

‘위엄을 갖춘’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교회가 점점 형식과 의식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종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중 교육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를 좀 더 유식한 목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구식설교’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체면’이란 일반적인 범주에 드는 것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밀접한 관계된 것으로서

또 다른 이유는 ‘열렬한 믿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지나친 행동이나 감정에 두려움을 품고 왔다.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매우 강조하는 여러 분파나 교단 이야기를 들을 때,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절제할 줄을 모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대편 극단으로 이끌려 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성령을 소멸하고 슬프게 하는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신이라는 비난이 복음주의자들에게 가해진 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은 200년 전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그리고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졌고,

이들은 끊임없이 감독들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때로는 거의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이

마치 근본적으로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 같다.

나는 결코 지나친 것이나 광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험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로이드 존스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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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준비에만 의지하여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어떤 이는 준비를 경멸하여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영감에만 의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는 결단코 되지 않습니다.

늘 둘을 겸해야 하고 “둘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기름 부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아는데 가장 훌륭한 접근방식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이 성령의 감동과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까?

설교에서 이보다 더 철저하고 노골적인 시금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아주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강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후에 이것을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셨는데,

그의 고향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그것을 설명하여 말씀하셨다고 누가복음 1장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내가 강조하는 싶은 것은 요단강에서 주님께서 있었던 일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 자신마저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이 독특하고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였다면

땅위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임무를 행사하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

그분의 설교와 교훈을 들어왔고 모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분과 개별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유익을 누렸던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지냄을 목격했습니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그의 육체적인 부활의 사실을 모두 다 목격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기를 이 사람들이야말로

이제 전도하러 나갈 완벽한 상태에 있구나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교훈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란 충분하지 않아 더 필요한 무엇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음과 나타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게마저 이것이 필요하였다면

이 일을 전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질실하게 필요하겠습니까?

 

“예,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고민할 것이 못 됩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니 우리와 관계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사도시대에만 국한시킨다면,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구별할 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판단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나의 답변은

성경이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을 의도하고 있으며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고,

준비할 때 면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설교한 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단지 도구요 통로이며 수단일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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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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