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감정론/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4.04.24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2. 2014.03.12 자신의 구원 확신
  3. 2014.01.28 찬송을 열심히 부름
  4. 2013.12.11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5. 2013.10.30 감정의 체험 순서
  6. 2013.09.18 감정의 강도
  7. 2013.08.08 사랑의 피상적 표현
  8. 2013.06.26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9. 2013.05.15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10. 2013.04.01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11. 2013.02.23 몸의 격렬한 반응
  12. 2013.01.16 감정의 강도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이들은 많은 신앙 감정을 함께 경험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죄에 대한 슬픔과 신앙과 영혼을 유익하는데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일 수도 있으며 엄청나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입으로 아주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곳에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핀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져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뿐더러 반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가 된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렇게 판단하라는 말은 단 한마디로 하지 않고 주로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상태를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성경에 배치되는 것이다(계 2:17).  로마서 2장29절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한다.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이 내면적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사람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임을 보여준다(고전 4:5).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삼상 16:7, 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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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성도들 또는 성경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성도들에게 확신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니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혜를 계시하신다고 증거 하셨다.  욥은 자신의 신실함과 정직함을 최고로 확신하고 그것을 자신 있게 말했으며(욥 19:25-27), 다윗은 시편 전체에 걸쳐 주저 없이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자신의 분깃, 유업, 반석, 방패, 구원이며 높은 망대와 같으신 분으로 묘사한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진실과 진심으로 행하였음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느냐고 호소한다(왕하 20:3).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주님이시자 왕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언제나 확실하게 말하고 자신이 장차 받을 보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자신 있게 말한다(갈 2:20, 빌 1:21, 딤후 1:12, 딤후 4:7-8).

 

그리고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을 말씀한다(고후 13:5).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하신 상급을 확신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크게 책망 받아야 할 만큼 나태하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라고(고전 9:26),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주는 은혜가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2:12, 요일 2:3, 5, 3:14, 19, 24, 4:13, 5:2, 19).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감정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이 위선자이며 그들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감정은 신령한 것이라고 넘치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이 성도이며 그들의 감정은 은혜로운 것이라고 판단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태도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성도라는 사실 그것도 가장 탁월한 성도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갔으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들의 눈을 높이 올려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해 주신 것을 감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소경이며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암시했을 때 그런 암시를 경멸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  만일 그들이 세리의 심령과 비슷하게 확신했다면 그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소망하는 사람이 확신하는 것과 더 닮았을 것이다.

 

자기의 업적과 대단한 체험,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체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며

신앙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엄청난 부도덕함보다 하나님의 눈에 더 혐오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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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진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싶어 하며 자신들의 입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라고 권면하고 싶어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이 은혜롭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듯 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을 반대하는 논거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은혜를 받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이 체험하는 김정이 강해지면 스스로 감화 받는 일들을 매우 진지하게 많이 말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은혜로운 감정에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듯 하다는 역시 그 사람을 지지하는 논거로 합당하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그런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 사실은 더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예수께서 설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에 함께 했던 군중 가운데서 종종 이런 사례를 접하게 된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하더라’(막 2:12, 마 9:8, 눅 5:26).  그리스도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셨을 때에도(눅 7:16), 그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거나 그를 극도로 칭찬하는 것을 읽게 된다(눅 4:15).  또한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을 때(행 4:7), 안디옥과 비시디아의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거부하시고 이방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크게 감동되어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렇게 한 모든 사람이 참되게 믿은 것 아니었고 오직 일부 선택된 사람들만 믿었다(행 13:48).

 

여전히 교만하고 하나님께 적개심이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나님에게 특별한 친절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외치고

그들에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사울처럼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신해서도 아니고

어떤 높은 원칙에 근거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삼상 24:16-19, 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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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부적인 의무들에 열심히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에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지가 아니다.

 

최근에 사람들이 성경 읽기, 기도, 찬양, 설교듣기 등에 시간을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신앙 감정을 부정하는 주장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매우 부당하다.  참된 은혜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신앙적인 일들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한다.  참된 은혜는 여선지자 안나에게도(눅 2:37),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영향을 미쳤다(행 2:46-47).  또한 은혜는 다니엘로 하여금 하루에 세 번식 엄숙하게 행하는 기도의 의무를 기쁨으로 감당하게 했다(단 6:10).  그것은 다윗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시 55:17).  은혜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시 135:3).  그리고 시편 147편1절은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참된 은혜의 본질이다(시 84:1-7, 10).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을 외적으로 많이 행하고 그 일들에 열심히 헌신하며 그 일들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성향을 은혜를 입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지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이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었다(사 1:2-15).  그것은 바리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눅 18:12).  거짓된 신앙은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게 하고 진지하게 만든다(사 58:4).  영적이지 않으며 구원받지 못할 신앙도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의무와 규례를 기뻐하게 만든다(사 58:2).  그것은 에스겔의 청중들(겔 33:31-32), 헤롯 왕(막 6:20), 세례 요한의 다른 청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요 5:35).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진정 그들은 그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자신들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일에 바친다.

과거에 로마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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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와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매우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이고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이 사람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출 2:23, 5:19, 신 8:2, 16, 눅 8:43-44, 마 15:26, 고후 1:8-10).

 

하나님께서 옛 성도들에게 자신을 특별히 나타내신 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을 두려운 분으로 나타내신 후에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창 15:12-13), 모세(출 3:7), 엘리야(왕상 19장), 다니엘(단 10장), 사도 요한((계 1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교회를 다루시는 것처럼 성도 개개인을 두려운 천둥과 번개 속에서 율법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교회를 몽학 선생 아래 두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시온 산에서 나오는 기쁨 복음의 소리로 교회를 위로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죄와 비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의 크고 두려운 죄악과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에 큰 고통과 근심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행 2:38, 16:30).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와 지옥에 대한 놀라운 두려움에 뒤이어 왔다는 것이 반드시 그 위로와 기쁨이 바른 것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양심의 죄를 자각할 때 종종 공포감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죄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며 공포감은 종종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각성케 하셔서 큰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이 반드시 참된 위로를 낳을 것이라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사실은 거짓 겸비함과 거짓된 굴복과 가짜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된다.  사울은 비록 위대한 왕이었지만 이 교만한 왕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가 미워했던 신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서도(삼상 24:16, 26:21), 여전히 계속해서 그에게 원수로 행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각하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원수로 남아 있으며 끝까지 계속 그렇게 남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

경험상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과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에서

성령을 헤아릴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령이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단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두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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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러 신앙 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아합,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삼상 24:16, 26:21, 왕상 21:27,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동시에 우상들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시편66편 3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때문에 원수들도 그께 굴복하지만 그런 경외와 굴복은 가짜다. 홍해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문둥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앗수르의 나아만처럼 그분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도 모조품이 있다.  돌발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마 13:20),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처럼(요 5:35),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다.  예후와(왕하 10:16), 회심하기 전의 바울과(갈 1:14, 빌 3:5),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행 22:3,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고양될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나사로를 기적으로 다시 일으키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맞이한 다수의 군중들은 동시에 아주 많이 신앙심으로 감동된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찬탄으로 가득한 것 같았고 또한 그리스도가 밟고 가시는 길에 옷을 깔면서 까지 큰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크고 선한 일을 크게 감사하며 큰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열망했으며 그 나라를 크게 소망하고 많이 기대하면서 그 나라가 곧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크게 고조되어 온 예루살렘이 그들의 소동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아 기뻐하라 너의 죄가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때 이전에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고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드린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이 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또는 연이어서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은 경탄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그는 입을 열어 그가 체험한 것을 늘어놓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경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감을 가지게 되며 노골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마치 자신의 편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듯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게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됨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모조품에서 다른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양자의 경우 모두 사랑은 감정의 원천이며

다른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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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랑은 지식이나 예언이나 기적이나 사람과 천사들의 방언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이며 참된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며 요체다.  사랑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게 되며 지옥과 마귀의 모습에 가장 반대 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성질 때문에 사랑에는 모조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의 모조품들은 더욱 많다. 그래서 철이나 청동보다는 금이나 은의 모조품들이 더 많다.  가짜 다이아몬드와 루비는 많지만 누가 흔한 돌의 모조품을 만들려고 할까?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 본질과 내적 성질을 닮은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그 모조품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 외형을 정확하게 모방하려고 더 많은 공교한 기술들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의 미덕과 은혜도 마찬가지다.  사탄이 교묘함과 사람에게 있는 기만성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이런 미덕들과 은혜를 모방하는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 보다 더 많은 모조품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랑의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히 보여주는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지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높이 칭송하였으며 고기나 물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따라다녔으며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했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불순하고 영적이지 않게 사랑하고 있었음을 바울이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이도

사람들은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이 그 좋은 실례일 것이다(갈 4: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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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감정이 성경 본문을 마음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은 자체는

그 감정들이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성경 말씀이 생각남과 동시에 일어날 때 그것이 그 감정을 구원하는 은혜로운 감정이라고 판단 내리는 적합한 근거가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특히 고양된 감정이 소망이나 기쁨 또는 즐거움과 기쁨과 연관된 감정일 경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 감정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알리는 표지라고 여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마음속에 아주 달콤한 약속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한 본문 다음에 그 다음 본문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성경 전체에 걸쳐서 관련된 말씀들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런 감정이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올바른 것이며 그들의 영적 상태가 건전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잘못된 것이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이 성경 말씀과 더불어 생길 수 있지만 성경을 오용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하여 참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의미로 볼 때 성경에서 합당하게 나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성스러운 것이어서 마귀는 감히 그것들을 만지지도 못하고 오용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너무나 담대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붙잡아 광야로 높은 산으로 성전 꼭대기로 끌고 다닌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악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한 능력을 소유한 사단에게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타락한 이단 교사들이 성경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벧후 3:16).  우리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분문이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기들을 사용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따라서 사단은 성경과 자신의 도구들을 그렇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결론내릴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이 그런 일을 할 때에 그들은 사단의 도구와 종으로서 그리고 사단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남과 더불어 생기는 고조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인해 자극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돌밭과 같은 심령의 소유자들처럼

그 감정 안에 참되고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믿음의 본질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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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일어난 감정이 스스로 지어내거나

자신들이 고안한 방식이나 자신들의 힘으로 자극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감정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에베소서 1장18-19절에서 사도는 하나님께 성도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가 강력한 능력으로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이야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이 능력을 체험적으로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능력을 느끼고 지각하며 의식한다는 말과 같다.  즉 사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작용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감정들이 그 감정의 주체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며 비성경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주체인 사람이 일부러 불러일으키지 않았다거나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감정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것이라는 표지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그 체험이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령 외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영적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시험해야 한다.  많은 거짓 영들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면서 종종 자신들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간교하고도 강력하게 그리고 많은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사단의 수많은 역사가 있다.  사단의 능력은 공포와 두려운 생각을 삼는 일에서만큼 거짓된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일에서도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독일의 재세례파들과 많은 다른 열광주의자들이 경험했던 황홀한 기쁨은 사람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속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악한 영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일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경험한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히 6:4-5), 맛보았지만 9절에 언급한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떤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 상상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원인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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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매우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된다.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이 너무 말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바리새인이나 잘난 체하는 위선자로 정죄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즉시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이며 성령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무지하고 성급하게 단정해 버리곤 한다.  이 사람들은 신앙적인 일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여러 사건들에서 충분히 본 것처럼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리고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원칙으로 만들고 자신의 지혜와 분별력을 믿기 때문에 종종 범하는 실수다.  비록 성경에는 우리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사태를 판단할 때 사용할 원리로 가득 차 있지만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건전한 영적 상태에 있다고 판단 내릴 수 있는 원리가 된다는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단지 입과 혀에 달린 믿음일 뿐이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뭇잎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지 사람들이 강한 감정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 체험을 많이 말하게 될 뿐 아니라 매우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풍부하고 매우 열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으로 단지 그들이 신앙적인 일들로 크게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은혜 때문에 생긴 감동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거짓된 감정들은 만일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본질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현상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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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지가 아니다.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만일 모든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감정이 크면 클수록 활력 있게 발휘되면 발휘될수록 몸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 감정과 영적 감정 모두 매우 크게 고조될 수 있다면 이 두 종류의 감정이 모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도 안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어떤 본성적 감정만큼 높이 고조되고 그만큼 강하고 생생하게 작용할 때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참되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 많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감화를 받고 그 몸은 압도당할 수 있음을 분병하게 가르친다.  시편기자는 그가 경험한 강렬한 신앙 감정을 말하면서 그 감정이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이 구절은 마음과 육체를 뚜렷이 구분하고 있으며 각각이 감정에 영향을 받았음을 말한다(시 63:1).

 

나는 성경이 거룩한 영적 감정의 강도들 표현하기 위해 몸에 미치는 영향들을 분명히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단 10:8, 계 1:17).  예를 들어 떨림(시 119:120, 스 9:4, 사 66:2, 합 3:16), 탄식(롬 8:26), 병약해짐(아 2:5, 5:8), 부르짖음(시 84:2), 헐떡임(시 38:10, 42:1, 119:131), 피곤함과 쇠약함(시 119:81) 등이다. 만일 이런 표현들이 감정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런 표현들은 감정이 얼마나 고양되었는지를 성령께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적절하고 적합한 수사라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 바란다.  하지만 정반대로 감정이 몸에 끼친 영향들은 슬프게도 거짓된 감정과 마귀의 속임수의 표식이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고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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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매우 높이 고양된 감정들을 품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율법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마치 말로는 그 정도를 표현하기 부족한 듯이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런 말씀도 있다.  ‘의인을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같은 시편에서 성도들은 종종 ‘즐거운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고 요구받으며 누가복음 6장23절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최고로 완벽한 경건을 소요하고 있는 천국의 성도들과 천사들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을 보고 묵상할 때 감정적으로 크게 감화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 감정이 단지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무오한 기준인 성경은 매우 높이 고양되기 했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 감정이 있음을 분병하게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 4:11).  이스라엘 자손들도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크게 감화되어 그분을 찬송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무리는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떤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요 12:18).   하지만 그리스도께는 당시에 참된 제자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이 야단법석이 끝이 나 버렸던가?   그리고 이전처럼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이 크게 외쳤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침이었다.  “호산나, 호산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었다.

 

신앙 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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