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은사중지론)자들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를 목표로 한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28:19-20), 논쟁을 하기 위해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은 기적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도 시대조차 기적이 항상 일어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영적 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비위와 자주나는 병 문제를 위해 물 대신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고 했다(딤전 5:23).  치유의 은사를 가진 바울(28:8)이 왜 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치료할 수 없었고(2:25-27), 디모데후서 420절에 드로비모가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는 분명 초자연적인 역사가 중지된 때가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항상 치유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철회하셨기 때문인가?  왜 한 세대에는 그분의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시고 다음 세대는 그냥 지나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말씀처럼(45:15), 하나님께는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수 있는 주권적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9:15).   

예수님께서 평생을 걷지 못했던 남자가 있던 성전 미문을 많이 지나다니셨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주님은 그곳을 다니셨고 오순절 이후 제자들도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 그는 즉시 나았다(3:1-10).  왜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치유하지 않았을까?  말씀 한마디면 문둥병자처럼 즉시로 고침받을 수 있었을 뗀데(8:3), 그냥 지나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적의 은사가 사라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은사중지론의 토대가 된 원리다.  개혁주의자들은 정경이 완성된 이래로 기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들은 기적의 부재를 정당화 하고, 어떤 특정 기간을 제외하고 하나님은 결코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교리를 내세웠다.  이런 가르침의 결과로 이들은 기적은 모두 부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이론을 지나치게 지키려다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다.

은사중지론자들은 교회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성령의 은사가 사도들이 죽은 이후의 신자들에게 유효하다면 왜 그런 현상이 교회사 전체의 걸쳐, 혹은 많은 기간 동안 상실될 수 있겠는가?”  만일 기적적인 은사가 다른 시기에는 빈번하지 않았다면 이유를 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11:29), 현 시대의 남은 자들에 대한 그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살전 5:19), 근심케 만드는데(4:30), 기여하는 불신(6:5)과 배교(74) 그리고 신학적 무지(3:10)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3:10).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많은 병든 자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와 나병환자를 고치신다.  2장에서 중풍병자를, 3장에서는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4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다.  5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죽은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쳐주신다.  그러나 6장에 와서는 예수님조차도 아무런 권능을 행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기적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던 것은(6:5)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않으셨기 때문이다(13:58).  한 마디로 치유의 사역이 제한된 이유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불신앙 때문이지, 기적의 부재를 정당화 하기 위해 내세운 어떤 가정된 신학적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교부 Chrysostom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Augustine방언의 은사는 그 시대(초대교회)에 맞춰진 표적이라고 했다.  이것을 근거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약 초기의 교부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은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령의 은사들을 사도들이 살아있는 기간에만 한정하는 것은 상당한 양의 증거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한 역사적인 문헌들을 연구한 D. A. Carson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론적인 근거로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가 위조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인 이상의 결과라는 교조주의적 이유들을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  그러면서 그가 『Showing the Spirit』에서 은사들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고증하기 위한 연구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꽤 많은 형태의 카리스마적은사들이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의 여러 세기에 걸쳐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 소멸되었는가?  Augustine, Luther, Calvin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것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사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성경이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모든 신자가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29-30).  즉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주의의 성경해석학을 충실히 배웠다.  탁월한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쌓았던 적이 있어 조직신학의 가치를 알고 있다.  이들의 조직신학에 관한 저서나 글들이 나에게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때때로 성경 본문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성경 내용을 여과하는 장치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조직 신학은 효과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본문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자기해석, 즉 자신의 사상을 개입시키는 해석방식으로 성경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를 도출해 내는 방식인 주해와 다르다.  따라서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오류와 왜곡을 낳을 뿐 아니라 교만을 불러 일으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이나 책을 읽을 때 본문 안에 있는 의미를 본문 밖으로 끌어내는 exegesis(석의)와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는 eisegesis(자기해석)를 구분하지 못해 빗나간 해석을 하면서도 가장 성경적이라고 우겨대는 양심에 화인 맞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딤전 4:2).  이런 주관주의적 사람들은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Sproul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내가 믿고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나의 견해라고 해서 내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대표적인 교만의 형태다  한 마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정보는 강하게 거부하는 그릇된 신념에서 발현되는 위험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4:30), 개인적으로나 목회사역에 있어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성전에 올라온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3:1-11).  그러나 자신들의 은사중지론적인 신념 때문(12:22-37)에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교수들로부터 어떤 은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매우 정교하고 주경적 시도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를 들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고전 14:22)라는 사도 바울의 진술은 은사중지론적인 체계에서 SkateboardRoller Coaster를 타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논리적인 비약을 하게 된다.  즉 방언은 이사야서 2811-12절 때문에 먼저 유대인의 불신앙과 연관되며 다시 그 불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와 연결된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부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주님의  예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멸망은 실제로 주후 70년에 발생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이 주후 70년에 멸망한 이후로 유대인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표적이었던 방언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가 폐기된다.  그렇다면 모든 은사가 다 끝난 것인가?  내가 지금 기도 시간에 하는 방언은 성령이 아닌 귀신의 역사인가?  이러한 탁상공론적인 은사중지론에 대한 논증은 D. A. Carson, Gordon D. Fee, C. Samuel Storms, Michael Green, R. T. Kendall 외에 많은 은사지속론 신학자들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받는다. 

성령의 은사들에 나타나는 권능은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뿐만 아니라 주님을  닮은 사역을 하도록 인도한다.  1세기의 것으로 격하되는 이 은사들은 단지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현대교회에도 주어진 것이었다( 13:8, 14:12).  이러한 은사들은 오늘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은사지속론을 지지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은사와 관련된 위험성에 대해 피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때 표적과 기사가 복음을 확증하는 것은 사실이다( 16:19-20).  하지만 방심하면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을 진리의 말씀과 믿음보다 더 중시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들도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돌봄, 그리고 목회사역과 분리될 때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은사지속론 전통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한 과도성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오순절 학자인 Gordon D.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말한다.  “성령께서 능력과 은사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쉽게 그 능력과 은사들이 성령의 임재의 실재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활동의 긍극적인 표준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높이는가 하는 여부에 있다”  나아가 그는 『바울,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서 “바울은 표적들은 자신의 복음이나 사역을 받아들이는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런 기준을 어떤 종류의 사역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도 거부한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이야말로 바울이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전부”라고 말한다.

오늘날 영적으로 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그는 현대판 니고데모가 아닌 성령의 바람에 민감한 사람일 것이다(3:1-10).  이런 목회자야말로 새로운 활력이 넘치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적적인 역사 사이에 아무런 분리도 없는 총체적인 목회로 이어갈 것이다.  이런 성령의 민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은사들이 교회에 부여되었음을 보여준다(4:23).  따라서 교회에는 분명히 말씀 선포사역능력 현시사역에 있어 모두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14:12).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덧입은 목회의 모범이 되셨고(벧전 2:21), 자신의 교회를 성령의 참된 권능으로 덧입혀 작은 목자들을 자신과 동일한 목회로 이끄신다.

예수님의 전지하심의 발현과 그분의 신성에 대한 논거라고 해석되는 복음서의 본문들은 종종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 주어진 예언적 계시와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편이 아닌 사람과 동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부끄러워 무릎을 꿇거나 내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앞에 있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라고 말한다.  그녀가 예수님을 성경상의 선지자로 분류한 것은 주님께서 상세하게 계시된 정보, 즉 그녀가 영원히 마음 속에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정보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직접 지적하신 예배 뿐만 아니라(4:23-24), 신학의 다른 면에 있어서는 율법적이고 부족했지만(4:20), ‘선지자에 대해서는 바른 성경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은 은사중지론적 주장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 행위는 은사중지론자들의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는 계시에 필적하거나 그것을 위협하지 않는다.  Wayne Grudem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예언의 은사에 대해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에서 예언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하지 않으며 단지 성령께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것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보고였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한 마디로 오늘날 예언적 계시에 대해 hysterical한 병적인 증세를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언의 은사가 Grudem의 주장대로 성령께서 자연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것을 인간의 언어로 보고하는 것이라면, Charles R. Swindoll이 신자와 상담하는 과정 중에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감동들을 계시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Christian Counseling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계속 내면에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성경의 원리들과 진술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알지 못했을 어떤 설명들 가운데 하나를 떠오르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말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계시하신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시될 때 성령은 그 계시들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보장한다

내 생각으로는 Swindoll은 권위에 있어 기록된 말씀이 동등한 진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보다는 성령께서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을 인간의 말로 전한다는 보다 덜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분별이 필요하지만(고전 14:28), 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 성경의 진술들과 원리들(14:26), 그리고 이해들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 은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문제 삼는 바리새적 비판의 영을 소유한 무경험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비판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앙의 유비(analogy of faith) 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성령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은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어떤 복음주의 교파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인 전통의 맥락에서 우리의 차이점들을 서로 인정하고 보다 유화적으로 그것은 차이일 뿐이며 그 차이를 용납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거나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성경의 주된 속성인 권위’, ‘명료성’, ‘필요성’, ‘충분성’, 이 네 가지 완전한 속성은 불가분리적이고 상호 규정적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불안전한 신학적 범주 속에 집어 넣으려는 잘못된 전통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신컨대 은사적인 요소을 걸러내는 역활만하는 신학적인 체계를 사용해서는 성경의 권위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고찰이다.  아직도 누군가 성경 외에 초자연적인 발화의 은사(예언, 방언, 방언통역)을 인정하고 환영하면 이것이 성경을 필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교회의 덕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듣보잡’ 같은 신학적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분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나아가 어떤 특정 신학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기 위해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 3:14-16).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성경적 근거나 신학적 근거가 결여된 삐뚤어진 시각으로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목회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성령의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정의에 대한 지나친 열심은 언제나 악마로 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단순함과 미숙함, 그리고 모든 사소한 차이와 결점의 이면에서 고소할 조건(8:6)과 책 잡을 것(8:46)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사악하기 그지 없는 극단적 귀신의 행위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귀(逐鬼)사역  (0) 2019.08.18
성경적 치유사역  (0) 2019.07.21
방언  (0) 2019.03.16
칼빈주의 신학  (0) 2019.03.03
선택과 유기  (0) 2019.02.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