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한다.  한국을 두고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전 고문 William Schaffner 박사를 비롯해서 전 세계 외신들이 빠른 준비, 광범위한 검사, 위치추적, 사회적 거리두기로 코로나 19 방역 대응을 극찬했다.  한국은 오늘 기준으로 372명이 죽었고, 그에 비해 미국은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만나 지금 현재 201,348명이라는 엄청난 사람이 죽어갔다.  사재기 없는 유일한 한국은 작지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만약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미국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런 나라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간첩이고, 415일 총선을 조작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공산화된다”, “정부와 방역 당국이 교회를 탄합하기 위해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종교 집회를 가장하여 분별력이 없고 공산주의 귀신(?)에게 두려움에 떠는 노인네들을 선동하여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질이 좋지 못한 자칭 선지자인 전광훈씨다.  정치적 편향성과 자기 중심적 신념을 가진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종북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정치판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더 가관인 것은 <옥중서간>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독일이 낳은 행동주의적인 신학자이며 보수적 신학과 진보적 실천이 균형을 이룬 본회퍼 목사를 자신과 비교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과대망상증환자를 따르는 피해망상증추종자들과 맹신적인 교인들이다.  메스컴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이들은 입으로만 사랑제일교회신자이지 행동은 거의 조폭 수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나는 이 교회를 ‘코로나전파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비말(droplet)을 튀겨가면서 통성기도는 큰소리로 세게, 찬송은 목이 터지라고 크게, 예배는 거의 신들린 것처럼 요란하게 드린다.  심각한 문제는 너무 시끄럽고 덕스럽지 못한 행실로 인해 교회 인근 지역 상권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주변 상인들은 매출 90% 감소와 생계 위협으로 인해 손해배상 청구를 추진중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지겹게 해를 끼쳤으면 주변 식당들은 한결 같이 그 교회 교인들을 받지 않겠다고 팻말을 써붙였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자칭 믿음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들이 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종의 영이 아닌 거룩하고 존귀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믿는다(8:15-16).  하지만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7:16).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지어 주는 주된 표지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고전 13).  한 마디로 다른 영(another spirit)을 받은 것이다(고후 11:4).    

모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평균적으로 그리스도인 중에는 성령,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에 관해 아는 바가 지극히 적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의 성령’(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중에는 아들의 영’(4:6), 즉 성령 하나님의 관한 말씀 듣는 것을 몹시 불편해 한다.  마치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가 은사주의자들이 오직 예수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성령’(8:2)에 관해 더 많이 가르치고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장까지 하나님의 성령’(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고, 성경 말씀 어느 곳에서나 성결의 영’(1:4)이신 성령’(51:11)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이 약속의 성령’( 1:13)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인가?  심지어 자기 자신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조차도 아들의 영’(4:6)이며대언의 영’(19:10)이신 영원하신 성령’(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난 성령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와 무식이 충만한데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령’(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하고 있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한다(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 8:9)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고(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삼위의 삼위를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아가 양자의 영’(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확신을 시켜주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16:7).  솔직히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지 의심스럽다.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성령을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보혜사’( 14:16, 2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동거동락(同苦同樂)하며 말씀을 배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4:49).  영광의 영’(벧전 4:14), 은혜의 성령’(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단언컨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예수의 영’(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20세기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A. W. Tozer가 현대 교회를 향해 날카롭게 지적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하나님의 신’(1:2),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5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차이점을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글을 접했을 때 빌립보서 33절을 생각하며 조금 끔찍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예언적인 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인지 안다.  Tozer의 말에 반발하여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만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교회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송장 같은 교회말이다(3:1). 

요한복음 1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진리의 성령에 관해 듣는 것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두려움과 위협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도대체 이들이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반기지 않고 불편해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14:1-4).  한 마디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잃는다는 뜻이었다.  성령에 관한 언급은 예수님의 떠나심을 수반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달갑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던(24:25), 이들은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따라 부르거나 기도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거나 영광을 돌린다는 가사가 나오면 어떤 이들은 머뭇거리고 또 다른 이들은 어색해 하며 부르기를 두려워한다.  마치 성령께서 예배와 찬양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나 성부와 성자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께 직접 기도와 찬양,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삼위 안에는 어떤 시기심이나 질투, 경쟁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과 대화를 하면(6:18),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모두가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령을 존중하시듯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과 예수님을 존중하신다.  한 마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지극히 높이신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주의 은사 지속론자’가 되기 전에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탁월한 교수들로부터 은사중지론적인 체계 속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그다지 심도 있게 공부를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A.D. 1세기 말에 모든 은사가 끝난 것처럼 배웠고, 그것을 굳게 믿었다.  한 마디로 ‘골수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은사주의적 성향이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고 나서 성령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구약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신’이 메시야 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언했던 성령 강림 사건이다( 6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14:16) 있게 될 변호자이시고 상담자이신 그 분은 어떠한 분이신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창조에 통참하셨고(1:2),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적용시키는(14:26, 요일 2:27), 성경의 저작권을 갖고 계신 분으로(딤후 3:16, 벧후 1:2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신다(16:14).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은 영원하신 성령이시다(9:14).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은 매우 민감하시고 예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둘기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3:16). 마가는 이것에 대해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말하고(1:10),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1:32).  비록 공관복음서의 모든 기자들이 성령의 강림을 비둘기에 비유하였지만 그들은 성령과 비둘기를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누가는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강림하였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고(3:22), 그는 이러한 성령 강림을 이사야 611절과 같은 기름부음으로 이해했다.   

특히 광야 생활을 했던 세례 요한이 비둘기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 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첫 상징물로  비둘기를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한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는 것이다(1:33-34).  정말 놀랍지 않은가?  비둘기가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온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고, 게다가 내려와서 머문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다.  여기에서 그 위에 머물렀더라라는 단어를 주위 깊게 눈여겨 보아야 한다.  Lloyd Jones는 설교 시간에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 하나님은 천천히 걸어오셨다가 빨리 말을 타고 떠나신다”는 청교도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만큼 성령은 매우 민감하시며 작은 일에도 근심하거나 슬퍼하고 예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  비둘기가 예수님 위에 내려와서 머물렀던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둘기가 두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는 집비둘기(pigeon)이고 다른 하나는 산비둘기(Turtle dove)이다(12:6).  구약 성경에서 양과 염소가 화목제의 제물로 사용된 것처럼(3), 이 두 종류 모두 가난한 자를 위한 속건제물로 제사에 사용되었다(5:7, 12:8).  신약 성경에서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정결의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들고 갔는데, 그것이 피죤이었는지 도브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2:24).  아무튼 이 둘은 같은 과()에 속하고 생긴 것도 여러모로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달랐다.  사실 모든 한글 성경은 비둘기라고 번역하지만, 영어 번역본은 피죤과 도브를 구분하고 있다.  분명 성경은 성령께서 피죤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다고 증거 하고 있지 않다.  만약 피죤이 사람에게 내려와 머물렀다고 했다면 하나도 특별하거나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광장이나 공원에 모여 시끄럽게 구구거리며 지저분 하고 더러운 비둘기가 피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라시아(Eurasia) 대륙 일부가 포함된 중앙아시아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도브는 전혀 달랐다.  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동물로 알려진 도브를 예수님께서는 순결하다고 묘사하셨다(10:16).   

조류 전문가들에 의하면 피죤과 도브는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된다는 사실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물론 피죤과 도브에도 각각 많은 종류들이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피죤과 성령을 상징하는 도브 사이에는 분명하게 뚜렷한 기질상의 특징과 차이점이 있다.  오십 년 이상 비둘기를 키워온 Pete Cantrell의 말에 의하면 피죤은 사람이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지만, 도브는 전혀 길들일 수 없다고 한다.  피죤은 시끄러운 것을 개의치 않고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반면 도브는 소음을 싫어하고 절대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피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도브는 사람이 곁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죤은 성질이 사납고 공격적이며 여러 마리와 교미하지만, 도브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오직 한 마리와 짝을 짓는다고 한다.  겁이 많은 야생 조류이고 과민하기까지 한 도브는 공원이나 광장에서 사람들이 주는 모이를 주워 먹고, 지저분한 환경에 잘 적응하는 피죤과 달리  절대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날아오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두 종류의 비둘기 중에 텃세가 강한 피죤은 절대 성령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 R. T. Kendall이 말했듯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의 피죤을 도브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종종 사람들이 거룩한 영이 나에게, 우리 교회에 임했다라고 나팔을 불거나 혹은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들 중에 하늘로부터 온 도브(거룩한 영)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도브와 유사한 피죤(다른 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것을 피죤 신앙이라고 불렀다.  즉 성령이 아닌 위조된 다른 영 말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임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그렇게 흔치 않다고 말한다.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피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브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일들이 도브가 아닌 피죤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끔찍스럽고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7:22).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13:22-27).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피죤 신앙을 가진 교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이들은 무엇이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한반도 평화를 주장하면 종북좌파로 몰리는 세상”, “대통령을 주사파로 모는 목사들 오늘날 가짜 뉴스로 인한 종북몰이의 희생양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만일 사랑제일교회처럼 분노와 싸움과 중상모략이 가득한 상태에서 성령이 능력으로 임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영을 받은 것이다(3:14-16).     

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의심 없이 믿는다(9:17, 13:1).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당시 로마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던 신자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바울의 국가관은 어떠한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바라’(13:1).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받치듯’(22:21),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예수님 위에 머문 도브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과 세상에서의 역할말이다(5:13-16).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인가를 보여주는 기준은 우리가 이웃과의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다(요일 4:20).  다시 말해 광신자(狂信者)처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나팔을 불지 말고, 이 어려운 시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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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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