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가 좋은 나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들고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붙이는 것을 보면 너무나 좋아진 세상인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의 흑역사(黑歷史)가 말해주고 있듯이 과연 역대 대통령들,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몰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오래 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가 되었는데, 6-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고문으로 얻어낸 진술을 근거로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조작부터 사형까지 박정희의 작품이라는 인혁당 사건은 야만적 사법 살인 의혹 32년만에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만약 지금처럼 대통령를 비판를 하면 그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모진 고문를 당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12·12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며, 전 재산 29만원 밖에 없다는 사람이 만든 인권 유린의 상징 삼청교육대는 어떠했는가?  당시 전두환을 비방하는 자는 가차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예배 중단 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 회장은 "신앙을 생명 같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 라고 강조하면서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듯이 코로나 확진자의 상당수가 신천지와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반발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지금 선에서 확산을 멈추고, 빠른 시일 안에 안정시켜 모두의 활동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최선이라며 정해진 기간까지만은 꼭 좀 협력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지금의 현실은 나라가 기독교를 탄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나라를 겁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렇다면 대면(현장) 예배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열 명 가운데 여섯 명 정도는 정부의 종교 집회 자제 요청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고 답했다.  도대체 대면 예배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일부 교계 지도자와 신자들이 예배에 생명을 거는 것일까?  이웃에게 해를 끼쳐 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교회와 교인들, 심지어 순교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불편한 말을 쓰기는 싫지만 지금은 개나소나 순교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볼 때, 주님이 오실 때가 다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혹은 4단계로 격상한다면 사실상 대한민국 셧다운을 의미한다.  일상이 정지되고 많은 일자리가 무너지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모이는 예배를 중단하고 각자의 처소에서 가정예배의 형식으로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대면 예배 금지 조치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중에 일부 목회자들은 예배를 드리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으면 그것이 바로 순교’(殉敎)라고까지 말한다.  정말 궁금한 것은 스데반 같이 순수한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아닌(7:54-60), 그저 신천지 같이 사이비 믿음을 가진 것처럼 침(비말)을 튀겨가며 드려지는 현장 예배만이 참된 예배이고,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비대면(온라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비대면 가정예배를 드리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바라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기가 지나가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현장 예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성도들간의 교제가 없는 온라인 예배도 괜찮다는 습관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만큼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대면 예배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가능한 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43: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들, 즉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43:21).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모든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79:9).  

Bruce Leafblad예배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우선으로 삼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배는 생명과 같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솔직하게 말해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있는가?  지면상 여기서 일일히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미국인 교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예배가 너무 많다.  예배 종류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가?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은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35:1, 4:24).  한 마디로 교회에 모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0:2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배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냐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아니하는 예배가 있다(4:1-5).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1:11-1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에게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셨고(99:5),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그분께서 이들이 드리는 각종 예배, 즉 월삭, 안식일, 대회, 성회로 모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다(1:13).  한 마디로 예배가 지겹다는 것이다.  분명 율법의 요구에 따라 성전에 모이는 것을 열심히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제물 타는 냄새를 역겨워 하시고 정한 절기를 싫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함께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어떤 악을 행했는가?  내 목전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4-17).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외형적인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선행, 즉 실천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 그분께 받은 사랑을 증명하라는 것이다(5:16).  달리 말하면 성경 말씀을 지겹게 강조하면서 경건하게 드려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5:23-24).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리는 것에 있어 상습(常習)에 가까운 백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들은 제사를 드릴 때 부정한 제물, 눈먼 짐승, 다리를 절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받친 전력이 있었고(1:8), 무조건 하나님께 제사만을 드리면 기뻐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많은 제물을 드렸으며(1:11), 더 나아가서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22:3)의 약점(?)을 이용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같이 많은 사람이 동원된 성가대의 웅장함과 교회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5:23)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예배가 꽹과리 소리 같이 시끄럽다는 것이다(고전 13:1).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모스는 말한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5:24).  ,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말고 먼저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법을 올바르게 지켜며 살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처럼 방역 본부장을 살인죄로 검찰에 고발하고, 검사 거부, 병원 탈출, 방역 거부, 보건소 직원 껴안고 침 뱉으며 난동, 심지어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줄행랑 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교회당에 와서 예배만을 드리면 구원 받은 백성으로 착각하는데 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말한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로하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양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7:9-11).  구원 받은 생각, “꿈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못지 않게 신약에 와서도 대면 예배를 드리겠다고 고집하는 교인을 예수님께서 만나신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예배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이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과 제도에 매여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이다.  특정한 장소, 즉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믿었다(4:20).  사마리아 여자의 전통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오직 산에만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눈여겨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의 그릇된 예배 스타일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자가 조상 야곱의 우물을 최고로 생각하고,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받는 것처럼 믿었듯이, 꼭 대면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목사와 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약의 예배란 어떠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4:24).  이 말씀은 예배의 장소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여자가 말한 것처럼 산에서만, 즉 건물로 지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받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 마당뜰만 밟고 다닌 꼴이 된다(1:12).  이 어려운 시기에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비대면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8:20).  문제는 오랫동안 교회당 위주로 사역을 한 목사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장소와 건물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3:8).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듯이’(고후 3:17), 어느 곳이든지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4:23). 

호세아 선지자 역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바로 알고 오직 그분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고( 6:4-5),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22:37), 예배는 둘째로 치고, 먼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지 않기 위해( 2:24), 생활 속에서도 행실을 선하게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벧전 2:12).  이런 외형적인 의식(예배)은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이 핵심적인 사실을 놓치게 되면 현장 예배만이 참 예배인 것처럼 광기 서린 살인적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해 지는 것은 과연 대면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대면 예배의 진정한 목적 말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주일 예배를 집에서 드리면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먼저 부끄러운 과거 하나를 고백하려고 한다.  그때는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목회를 했었다.  당시 헌금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었던 적이 많았고, 나도 모르게 헌금을 많이 한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를 편애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겉은 거룩한 척, 은혜로운 척, 바리새인 같이 외식적인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고 말했지만, 나는 욕심을 이기지 못해 십자가에서 못 빼고 내려왔던 적이 많았다.  이제는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사는 훈련을 십 년이 넘도록해서인지 돈에 대한 자유함을 조금 얻은 것 같다.        

이 말이 비위가 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가 헌금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럴 가능성이 크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1)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에 지면이 많이 남아 기록된 글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돈의 맛을 알지 않고서야 그렇게 기를 쓰고 대면 예배를 고집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해 보자.  성전주의 혹은 건물위주의 예배만을 고집하던 목사가 교회의 운영이라는 현실적 측면에서 볼 때,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되면 헌금이 대폭 줄어드는 어려움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본인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 헌금 문제에 자유로운 교회 담임목사는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아니야!”라고 핏대를 세우는 거룩한 목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디도는 신자가 국가와 불신자인 이웃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를 이렇게 말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라’(3:1-2).  신자는 국가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필요하여 세우신 기관으로 인정하며 사회에 유익하고 선한 일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이웃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거나 싸우지 말고 용서하는 가운데 매사에  온유한 태도를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구약 성경에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불신자들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 사람이 다니엘이다.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신앙과 접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세상 왕에게 충성을 다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참소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바벨론 왕 벨사살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된 메대 사람 다리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6:19-22).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6:22).  신앙적인면 외에 대통령의 통치에 무조건 반항하거나 거역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혼자 가정예배를 드렸던 사람이다(단 6:10).  이 믿음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신 것이다.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예배관은 어떠했는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된 성경 구절은 없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그는 이미 삶 전체로 예배를 드렸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득죄 하리니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39:9-10).  한 마디로 일상생활 속에서 몸으로 예배를 드렸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종교의 자유는 정말 중요하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활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  나라 법을 무시하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서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두고 '너무 이기적이다' 혹은 '세균 덩어리', 심지어 개를 빗대어 개독교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에게서 환멸을 느낄 정도로 악취가 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5:16).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뱀같이 지혜롭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하는데(10:16), 예배를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것과 영구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 무조건 종교탄합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다.  지금 기독교가 비난의 대상이 된 현실에 대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하나님은 교회만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도 사랑하는 것일까 묻고 싶다.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목사처럼 하나님은 교회만을 사랑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어대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은게 현실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마치 유대인이 이방인을 개 같이 여긴 것처럼(15:21-28), “나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생각말이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종교단체와 사업장을 다르게 보실까?”  만약 다르게 보신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처럼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는 짓들을 보면 불신자 이상으로 악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신천지나 기독교인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반사회적이며 반신앙적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사회적 어려움이 하루 빨리 종식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기독교가 세상 앞에서 예수님의 희생 정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은 우리가 쓰는 이 말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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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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