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많은 교파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교파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성공회 등이 있다.  장로교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교파는 화합이 잘 되서인지 서너 개로 갈라진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유독 장로교만 수백 개로 갈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스코틀랜드 장로교나 미국 장로교는 300-400년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너 개 교단으로 나누어졌지만, 거기에 비해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 100년간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한국 장로 교회들을 갈라놓기로 작정하신 것인가? 아니면 목사들이 자신의 탐욕과 정욕에 이끌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인가?      

한국 장로교는 말로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인 신본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이들의 모습 속에서 인본주의와 처세술, 그리고 세력다툼과 이해관계, 더 나아가 목회자의 도덕성 문제에 있다.  교단 분열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신학적 견해 차이로 내세우는 Calvin의 사상과 교리가 가장 큰 문제로 작용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들은 신학적인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Calvin을 내세우는데, 마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그가 한 말에 맞춘다.  이들의 전형적 사고방식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공장에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듯 오직 자신이 배운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성경을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흑백 논리가 강해 항상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의 기질이 있다.  더 나아가 개인적 나르시즘으로 인해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친다고 확신한다.    

왜 사람들이 목사를 먹사라고 부르는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지, 교회가 분쟁과 분열 되고 갈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양심에 화인 맞는 목사들이 신학적 논쟁으로 뿌려 놓은 열매다.  이들은 이단 못지 않게 변론과 언쟁, 투기와 분쟁,  훼방과 악한 생각을 가지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다(딤후 6:4-5).  나는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잘 알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3:39-43).  장로교회가 수 백개로 분열된 이유는 바로 이런 목사들이 하라는 목회는 안하고 논쟁을 업()으로 삼고 편을 가르며, 거의 발광(發狂)에 가까운 기()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준수에 관심이 있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다.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며 싸웠다.  이렇게 모이기만 하면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4:7)고 일깨워 준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논쟁되어 온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정론이다.  신학자와 목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지를 보면 우리는 그들이 신학적 spectrum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핵심이 되는 조직 원리로 삼는 교리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무조건적 선택이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6:44, 고후 4:3-4, 2:1-3).  곧 하나님은 주권자이기 때문에 인간 구원에 있어 유일한 행위자이며(2:9), 그분은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를 선택하고 예정하신다(9:11-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택자들의 미래 결정에 대해 지식을 근거로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3:48, 9:19-21).  한 마디로 구원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1:17).

칼빈주의자들은 Calvin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가르쳤는지에 대해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이 택함 받을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7:2, 6, 9, 24).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영원히 버림 받을 자들의 죄와 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하신다.  후대 칼빈주의자들은 Calvin이 제한속죄론을 믿었는지 혹은 일반속죄론을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증거를 따라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기독교강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방대한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사도 요한의 진술을 충분하게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상세하게 푸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Calvin은 이 주제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선택과 유기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다루는 과정에 있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그는 이 구절들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무시하고 지나갔다.  후택설 지지자의 한 사람인 Louis Berkhof 역시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을 한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주의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그 분의 사랑의 표현이다(9:13).  D. A. Carson은 『The Difficult Doctrine of the Love of God』에서 사랑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나누면서 요한복음 316절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선택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이사야서 43 1-4절과 에베소서 5 25-27절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반적인 사랑의 정의와는 다르게 오직 제한된 ‘특별하고 선택적이며 차별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Carson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은 특별하고 선택적이며 차별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천국으로, 다른 사람은 영원히 버림 받는 지옥으로 보내는데 있어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편견 없는 평등한 사랑에 대해 가르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6:32). 

나는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분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사랑하시는데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5).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된 이들에게만 적용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무한하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음이니라’(요일 4:10),  성경은 가족, 이웃,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한다(6:35, 19:19).  우리가 우리의 적들까지 사랑한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며(5:45),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 질것이라고 하셨다(5:48).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한적 선택(속죄)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을 미워하신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3:20).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이시라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데 실패한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 4:21).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사랑했던 이삭이(25:26),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삭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인 것이다.  한 마디로 개혁주의 신학 안에는 논리적 모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랑에 비추어 보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한 타락 전 선택론(전택설)은 엄격하다 못해 ‘살벌하고 비참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해 신학적 오류가 많은 이중예정론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Dave Hunt가 말한 것처럼 칼빈주의의 잘못된 해석들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Calvin의 색안경을 통해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의미에서의 배타성은 깨기 어려운 전통인 동시에 쓸데없는 논쟁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교리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들으면 불쾌할 수 있겠지만, 인문주의 역사가인 Will Durant는 『The Reform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에서 기독교강요에 대해 말하기를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며 영향력 있는 굉장한 책”이다  하지만 그의 예정교리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불합리한 분으로 만들고 그분을 욕되게 만듦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정론은 신학적 교조주의로 인해 수 세기 동안 기독교 복음의 기초적인 교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날카로운 논쟁과 그리스도의 몸에 분열을 낳았다.  나는 인류를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나누는 좁고 배타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유린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과 관련된 그 분의 성품 및 활동에 대한 통합적 이야기다.  특정한 교리들은 성경의 다른 요소들로부터 추출되고 서로 기여하면서 연결된다.  이 말은 하나의 교리가 다른 교리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신학은 잘게 쪼개어 파편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악하게도 빗나간 해석이 온전한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 온 예정론 교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신학적 오류가 많은 교리다.  분명 성경은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반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분의 보편적인 뜻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진리 모두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나아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우리는 자유롭고 책임있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상호 모순되지 않는 양립 가능한 진리다.  이 두 진리를 다 인정해야 성경적이다. 

Jonathan Edwards는 『The Freedom of the Will』에서 자유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경향성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각 사람은 자신의 요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각자에게 있다.  즉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각자의 삶에서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사도 베드로도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16).   

 이상 중세시대 때처럼 ‘똥파리’ 신학 문제로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였던 것 같이, 오늘날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밖으로는 다른 교단을 향해 ‘우리 대 그()들’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선택과 유기’ 문제로 소모적 교리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14:3).  결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1:3).  그리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Euclid of Alexandria가 제자에게 한 말을 남기고 싶다.  There is no other Royal path which leads to geometry  이 말은 기하학을 잘할 수 있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신학(神學)에는 왕도가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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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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