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 체계를 철저하게 신봉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믿고 가르쳤던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의 신자들의 삶 속에서 개입하셨던 것만큼 지금 우리들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경건하고 훌륭한 칼빈주의 교수들로부터 성령의 은사들이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었다는 신학적 전통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했던 것은 완성된 성경이 내 손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한 방법 외에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한 마디로 은사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성경과 신학, 그리고 교회사의 증거로써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철회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팔을 불어댔다.   

성경은 귀신론 교과서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귀신들의 세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물론 귀신을 믿지 않는 목사와 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신구약 성경은 특정 귀신(영)들을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군대 귀신(막 5:9),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막 9:25), 더러운 귀신(마 12:43-45), 점하는 귀신(행 16:16), 거짓말 하는 영(왕상 22:21-23),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거짓 이적을 행하는 귀신이 있다(계 16:14).  그 외에도 정사와 권세(엡 6:12), 악한 신(삿 9:23), 악한 천사들(시 78:49), 범죄 한 천사들(벧전 2:4), 한글 개역성경에는 ‘숫염소’로 번역되어 있지만 음란한 귀신도 있다(레 17:7).  그렇다고 모든 영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교의 영’이라는 단어나 용어를 접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신학교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교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없다.  본고에서 동의어로 사용하게 될 ‘종교의 영’(spirit of religion), 혹은 ‘종교성의 영’(spirit of religiosity), 또는 ‘종교적인 영’(religious spirit)은  성서 용어 색인에서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성경적 용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존재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었다.  종교의 영의 희생자인 동시에 목회 사역에서 이를 겪어본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상 낯선 존재는 아니다.  ‘종교’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단 두 번 정도 나온다.  한 번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할 때(행 26:5)와 다른 한 번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헛된 경건이 무엇이며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이다(약 1:26-27).  이들의 말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종교란 서너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마 6:1-18)와 외식 혹은 위선적인 삶(마 23:5-7), 그리고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막 7:1-9).    

나는 형식이나 관습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을 지배했던 영을 하나로 묶어 ‘종교적인 영’ 혹은 ‘바리새파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마 16:6).  실제로 종교의 영은 교회 안에서 빵의 누룩처럼 역사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질서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강력히 저항한다(마 12:22-37).  이 영은 사람들을 속여 겉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안은 변한 것이 없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만드는 영으로 교회 활동과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  믿지 않겠지만 종교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복음대로 살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변화를 거부하는 종교의 영이 제도화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태복음 4장 23절 말씀을 수도 없이 읽으며 가르쳐 보았지만 이 구절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몸으로 경험하고 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치유는 교회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약 5:14-16).  그래서 진리의 말씀만을 강조했던 우리 교회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교회에서 처음 성령의 사역을 시작할 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문제인 것처럼 교회 안에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매주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의 떡을 떼며 성령의 놀라운 임재가 나타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열망하며 갈급해 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받으려고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다.  하지만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제를 나누던 다른 사람들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눈에 거슬리는 어떤 종류이든 분명한 성령의 임재를 싫어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값없이 주시는 은사를 원치 않았다(고전 12:7).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키려고 할 때마다 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외양적으로는 이 두 부류의 신자들 모두 주님께 헌신된 것처럼 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귀한 일꾼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이 성령의 은혜 속에 들어가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강력히 반대를 했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교제를 잘 나누던 사람들이 왜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실 때 바리새인들이 사함 받지 못할 정도의 심한 말로 대적했던 사건이 성경에 나온다(마 12:22-35, 눅 11:14-15).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심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함부로 지껄어대는 이들의 말이 참으로 비위가 상한다(마 12:36-37).  예수님 당시의 일어났던 이 사건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이것이 보기 드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겉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과정에 대하여 극도로 저항하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엡 6:10-12).  평상시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눌 때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은혜로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목사와 직분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거룩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여전히 종교의 영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종교의 영은 무엇이며 또한 그 움직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이어 나오는 ‘가라지 비유’는 교회 내에 알곡 신자들과 가라지 신자들이 함께 섞여 마지막 추수 때까지 공존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역할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일차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38절에서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 내의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 문제 이상의 것으로서 세상 가운데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는 폭넓은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비유가 ‘종교의 영’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진짜 곡식들 사이에 원수 마귀가 뿌려 놓은 ‘가라지’이다(25-28절).  가라지(지자니온)는 팔레스틴 지방에 서식하는 식물로서 밀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이삭이 필 때까지는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 잡초다.  결실할 때가 되어야만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실 때 밀과 가라지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신다.  밀은 ‘천국의 아들들’(38절)을 의미하고, 밀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기생하는 가라지를 ‘악한 자의 아들들’(38절)로 정의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씨는 세상이라는 밭에 인자에 의해 뿌려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셨다(24, 37절).  또한 이 세상에는 천국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사탄의 아들로서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이다(25, 39절).   여기서 주님의 언급은 천국에 대한 것이지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만 아니라 교회도 세상 속에 있으며 따라서 그 진리는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 두 나라의 사람들을 밀과 가라지에 비유함으로써 그 두 부류가 외양적으로 똑같이 보인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에는 곡식과 가라지,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있어, 얼핏 보아서는 양자 행위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님의 자녀처럼 보이지만 결코 진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눅 6:46-49).  비유의 전체적인 요점이 무엇인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도 영락없이 천국의 아들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사탄의 주된 전략은 자신의 악한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탄은 언제나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나타났고, 목표는 단 한 가지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속이고 죽이기 위해 그분의 나라를 완벽하게 위조하여(요 10:10),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 천국의 자녀들의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사탄이 만든 하나님 나라의 모조품을 ‘종교’(Religion)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깊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심신 수양을 위해, 마음의 평안을 위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맞는 것 같지만 틀린 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종교적인 사람, 혹은 종교성이 강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 분 자신과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다(막 12:28-3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사울처럼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고(행 9:1-19),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롬 8:14), 세리와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있어야 한다(눅 18:13).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활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신 적이 없다.  성경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활동 그 자체를 좋은 것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사 1:10-20)와 예레미야의 시대(렘 7:8-15), 아모스의 시대(암 5:21-27),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종교성을 무슨 큰 벼슬이라고 얻은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들, 즉 제사, 기도, 예물, 찬양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것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호세아가 말한다.  ‘나는 인애(사랑,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신앙의 본질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한분만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호 4:1, 6).  한 마디로 계명을 지키며 살라는 것이다(요 14:21, 막 12:33).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가 없이 외적인 형식, 즉 껍데기 같은 종교에 길들려 진 백성들을 향해 말라기 선지자는 외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 1:10).   이 말씀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악을 바락바락 쓰며 대면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 말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삶의 열매를 통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롬 12:1-2).  암모스 선지자는 조금 더 세게 말한다.  ‘화 있을 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암 5: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한 삶을 살면서 선택받은 백성인 것만을 자랑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요즘 말로 표현하고 싶다.   “예배에 환장한 인간들아! 주일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죽으려고 기를 쓰는구나”  만약 지옥이 저주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 것이 확실하다면(마 25:4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창 19:14).  요점이 무엇인가?  생명이 없는 동물 박제와 같은 외양적인 종교 형태는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종교적으로 중독되어 교회에 나가기만 하지 말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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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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