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이것만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교리 체계 속에서 박사과정 교육을 받았다.  은사중지론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영적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만 연관되어 있으며, 마지막 사도인 요한과 더불어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주후 90년 경에 이미 소멸되었다고 믿는다.   은사중지론에 따르면 초자연적인 표적의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  또는 주후 70년경 유대인의 불신앙의 근거지인 예루살렘이 로마 장군 Titus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필요했다고 한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 중에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실 수 있으며 이따금 그렇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병 고치는 은사는 더 이상 교회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한때 은사중지론적 입장에 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이 교리의 신학적 원리나 특정한 본문에 기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가 성경시대에 조차 관습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구속사에서 중대한 계시적 활동의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John F. MacArthur가 『Charismatic Chaos』에서 노골적으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주장한 것처럼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즉 세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논리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자신이 영적 체험이 없는 메마른 상태에서 수많은 난제들을 가진 무경험자들의 논리를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한 마디로 표적과 기사에 대한 욕구는 죄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James Montgomery Boice를 포함해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과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에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또한 신비주의자나 주정주의(主情主義)에 빠져 통제력을 잃는 광신주의(狂信主義)로 평가받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놓지 못할 경우 그것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 내가 소속된 교단과 주변에 많은 동료 목회자들에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왕따당할지 모른는다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교육과 나를 가르쳐 주신 정통 Calvinism 교수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은사주의적 성향이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광범위한 주경적인 재고뿐만 아니라 진지한 목회적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지닌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성경해석을 존중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들의 본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의심하게 되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들이 진지한 주경적인 연구보다 쓸데없는 성령에 대한 두려움, 즉 성령공포(?)을 더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연구와 목회적 분별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솔직 담백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약 영적 은사들에 관한 주요 성경 본문들에 대한 주의 깊은 재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은사지속론적인 복음주의가 옳다는 확고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가운데 바리새인 같이 은사중지론자로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마 12:22-37). 

나는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은사지속론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은사에 대해 MacArthur가 정의한 성령체험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오순절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나는 은사중지론적 견해가 교회에서 행하는 성령 하나님의 잠재 능력을 축소시킨다고 믿는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제한하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은 영혼의 정관수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청승맞게 드려지는 장례식 같은 예배이지만 성령께서는 그들 가운데 인지되고, 그 예배를 통해 충만히 채워달라는 간구를 들으시며, 기록된 계시 즉 성경의 근본적인 출처로서 존경을 받으신다.  사실 은사중지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지속성을 제외하고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인정한다.  그 지속성이란 점은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간단한 문제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정관수술 역시 간단한 수술이지만 그 파급 효과는 크다.

성경을  통해 초대 교회에 분명히 나타났던 능력과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읽고 들었지만, 은사중지론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그것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사람들은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그와 동일한 실제들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평신도보다 목회자가 더 갈급해 할 것이다.  이런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 속에서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길 바라는 사람들의 깊은 갈망을 둔화시킬 수는 있지만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조차 바리새인 같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열심히 가르친다(12:22-37).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는 충성스럽게 그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존의 실제를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를 은밀히 갈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왜 사도들과 초대 교회에만 주어지고 오늘날에는 주어지지 않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잃어버린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 속에 표적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 예언적 계시, 치유, 방언,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 초대 교회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삶의 상태와 교회의 낮은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들도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탄의 현혹(6:10-18)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3:9), 그리고 타락한 세상 체제의 냉혹한 파괴(2:2)와 맞서 싸워야 한다.  분명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완성된 성경이 있는 동안에도 교회가 모든 면에서 세상을 닮아가며 쇠약해졌음을 본다.  마태복음의 글을 인용한다면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고있다(5:13).  그런데도 유감스럽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6:3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은사중지론자들은 그런 성령을 소유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사람들은 성령께서 1세기 때처럼 완전하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배운다.       

Dallas Willard는 성경의 정경을 제외한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목회적인 관점에서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라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독단적인 논리와 특정 신학에 발목 잡혀 있는 균형 잡히지 않은 목회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우리는 목회적으로 비참한 결과들에 직면하지 않으면서 교단 신학이라는 명칭 아래 오늘날 단지 몇 가지 은사들은 유효하지 않다는 식으로 성령의 사역을 조금이라도 억제시킬 수는 없다.

은사중지론적 견해를 가진 목회자들은 은사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이 성령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딤후 1:7)라는 구절을 망각 속에 묻혀 버린 채 의심의 눈초리(7:22)로 두려워하는 논거들만을 말한다.  그것은 귀신의 장난이다” “무속인들의 무당 신내림 현상과 같다” “변태 방언이야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은사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이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처럼 이상한 눈빛을 가진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도취들만을 추구하거나 귀신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조금 더 열정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다.

은사중지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왜 오늘날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주거나 그것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이 확실한 진리를 게가 거품을 물듯이 거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질문들은 분열과 의심을 일으키는 두려움의 증상이다.  이러한 의심을 일으키는 두려움은 Dallas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이었던 Charles SwindollChristianity Today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볼 수 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가 언제가는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형제들과 교류를 할까요?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저서 『Flying Closer to the Flame』를 읽어본 사람은 성령에 대한 나의 견해가 완화 되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학교가 부지중의 두려움 (오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통제를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교리적 차별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견지에서 움직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허용했던 것보다 폭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이런 지각있는 목회적 반응을 보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두려움이 없는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는 Charles Stanley 역시 『The Wonderful Spirit-Filled Life』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주님께 맡긴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기꺼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두려워하거나 위협받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협을 느끼시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생명의 보좌 위에 주님으로서 앉아 계실 때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결코 성부의 뜻에 위협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모든 은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은사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고전 12:7).  그리고 모든 은사들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다(4:13).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의 삶 속에 자신의 열매를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때때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발현하실 때 더 많이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초자연적인 발현들을 부인한다면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고전 12:7), 그 은사들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방해하고(4:11-16), 십자가의 원수(3:19)로 최악의 경우엔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노골적으로 성령을 대적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12:31-32).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자유 가운데 소위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새 언약 아래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예언(2, 2)과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14-17), 그리고 사도행전과 신약 서신들의 증거와 똑같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역사하고 계신다(13:8).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닐 뿐더러(고전 14:33), 질서있게 행하신다(고전 14:40).  하지만 우리의 세밀한 신학적인 차별성에 있어서는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시지 않는다(행 11:5, 고후 12:4).  예수님은 신학자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3:8).  그 누구도 야바이(やばい) 같은 특정 신학으로 바람을 통제하거나 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분의 활동 영역의 한계를 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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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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