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 율법의 구속력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의와 형벌의 요구를 그분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즉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반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 구약만을 믿으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지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율법절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나는 Sinclair B. Ferguson의 말을 인용하여 이들을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오늘 이사야서를 통해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 논하고 싶다.  

신앙생할을 하면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 성경에 가장 근접한 올바른 믿음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런 나의 거짓된 믿음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회 장소를 빌리기 위해 미국인 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내가 성경에서 나오는 바리새인 못지 않게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교회 목사의 머리 스타일은 반짝반짝 빛나는 민머리였고, 코에는 코걸이, 귀에는 귀걸이,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반지와 문신들.  혹시 내가 교회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속으로는 이것저것 판단하며 그를 정죄하고 있었고, 이런 펑크 스타일 목사와 대화하기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과연 이 분이 정말 목사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만 골라서 했을까? 담임목사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별생각이 다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에 나타났다.  목사 사모 역시 평크 스타일이었고, 자녀들도 똑같았다.  이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교회 중직자들을 만났을 때인데, 그들은 담임목사의 스타일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한결 같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림사 무술영화에 나올법한 그 목사를 말이다.  이것은 한국이나 한인 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의 이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좋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그 교회를 빌려 쓰는 동안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적으로 나타나거나 그 능력이 철회되는 것에 대한 이유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시거나( 14:14, 1:34, 41), 혹은 어떤 설명도 없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듯’(9:13), 구원하시기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왕의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12:2), 베드로에게는 인간이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구원하셨다( 12:5-11).  이것에 대해 성경은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일절 설명하지 않고( 50:21), 이 신비를 풀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11:33).  여기서 우리가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출은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삼상 2:6-7).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신가?(5:4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적인 능력을 값없이 베풀어 주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가?”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4: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55:8),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32:39).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왜 여러 상황 속에서 철회될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불신앙 때문에 오는 영적 무감각으로 인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해진 가장 비극적인 심판 들 중의 하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29:10).  구약성경에 보면 가장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며,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던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이 있었지만(삼상 9:9),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  이사야는 그 민족의 심판에 대한 환상을 보고 그들에게 메세지를 전했지만(1:1, 6:1-13), 그들의 눈멀음, 즉 향락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대한 편견과 자신들의 부패한 교훈으로 인하여 그것을 읽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29:11-12).  여기서 궁금한 것은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로부터 그의 계시의 영을 제거하시도록 하였는가?  이사야는 이 심판을 기록한 직후에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선지자와 선견자들의 눈멀음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그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29:13).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몰아냈다는 것이다( 3:10).  한 마디로 그들은 종교적인 외적 형식을 잘 지켰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7:6). 

이 율법주의에 관하여 최악의 것은 그것이 성령의 계시의 사역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사역의 초기에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가져오는 수많은 희생제사에 관하여 한탄하시는 것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1:1).  그는 하나님께서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1:11-13).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외면하시며, 그들이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1:15), 그들의 금식조차도 그분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58:3).  신앙 행위가 너무 위선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다(1:13).  한 마디로 지겹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43:7), 그분을 찬양하려고 창조된 백성들을 향해(43:21),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율법주의는 단순히 인간이 만든 율법을 따르는 것 혹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동안(7:6-8)에 외적으로만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것 이상의 것이다.  즉 율법주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인 행위들을 믿는다.  하나님의 한 위() 보다는 오히려 행위를 더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그 위()보다 행위를 더 사랑하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호세아 61-6절에 기록된 대로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오직 그분만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3).  즉 하나님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4-5).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예배드릴 때만 주의 자녀인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하고( 6:44),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지 않기 위해( 2:24), 생활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행실을 선하게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벧전 2:12).  올바른 삶이 뒤따르지 않는 예배는 말씀을 지겹도록 강조하고, 교회 전통과 종교적인 의식으로 엄숙하게 드려질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울리는 꽹과리 같고(고전 13:1),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21-27).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딤전 3:16),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거나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딤전 4:8).  하지만 이런 의식들은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삶이 부정과 불의로 형편없이 오염이 되어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진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 7:21-26)는 그것이 주일, 수요, 금요, 철야, 새벽, 각종 절기예배일지라도, 그 모든 의식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고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7:13), 오히려 그분의 심판을 불러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13:24-27). 

사도바울은 신명기 272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율법 행위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한다( 3:10).  이 좋지 못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여자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온다.  여섯 번째의 남자와 살면서도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이 사마리아 여자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했을 때( 4:20), 주님이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21-24).  여기서 ‘신령’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진정’은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진리, 즉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2:8)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1:16), 그분이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고전 15:1-4).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명확한 지식과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예배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이방신들을 영입한 혼합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에 있어 유대인들보다 신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4:2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이 크게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지식이 있어 사마리아인들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령하지 못한 형식적인 예배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유대인들보다 성경지식이 짧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는 예배가 있다(4:1-5).  무엇이 문제인가?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 4:22)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서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이다( 4:20).  특정한 장소(40:34-35, 왕상 9:2-3),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굳게 믿었다( 11:26-29, 27:12).  이 여자의 전통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오직 산에만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구절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시간에 맞추어 주보에 짜여진 대로 교회 전통과 제도에 따라 열심히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으로 믿었다.  실상 마당 뜰만 밟고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다( 1:10-17).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가증스러운 신앙생활(1:13)을 하는 것과 여자가 조상 야곱의 우물을 최고로 생각하고,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 사마리아인들의 그릇된 예배 유형의 신앙이 오늘날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죄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서 드려지는 진실 되고 온전한 예배를 말한다.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7:21)이 아닌 것처럼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6:46), 성령 안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참된 예배만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12:1-2).  나아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것처럼 산에서만, 즉 특정한 장소(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받는 것이 아니다.  환언하면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18:20),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6:6).  이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로마서 14장을 통해 비추어 보면 몇가지 좋지 못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성경적 원리보다 교회의 전통과 제도, 그리고 질서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 관습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둘째, 믿음이 약한 신자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때 영적인 잣대를 가지고 경멸하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 율법의 준행자인데 재판자인 것처럼 자신의 신분을 격상시킨다(4:11-12).  마지막으로 성경이 모든 윤리적인 문제와 신학적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에 심히 불편함을 느낀다.  

마지막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집고 넘어가고 싶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좋아하는 색은 검정색 아니면 흰색이다.  회색 지대가 없다.  풀어서 말하자면 나와 다른 모든 것은 다 적()이고 비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침묵에 불편함을 느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에도 굳이 신학적으로 나팔을 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이 없는데도 성경에서 침묵하거나 혹은 일부러 열어 놓으신 부분에 대해 제멋대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적용을 만들어내는 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다른 형제의 실수나 연약함을 찾아낼 때, 생존 본능을 활성화시키지만 동시에 중독성이 강한 아드레날린처럼 희열과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이다.  의학용어로 말하면 정신질환의 일종인 신학적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에 가깝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에서 술취함은 분명하게 금하지만(6:18), 금주(禁酒)는 요구하지 않고, 흡연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를 믿기 전에 이러한 것들을 즐긴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금주나 금연을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신앙의 초보이거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적당하게 술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비교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일에 일을 하지 않고, TV도 보지 않고, 인터넷도 하지 않고, 영화관람도 하지 않고 심지어 자동차에 주유하는 것과 마겟에 가서 장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들의 믿음 역시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일에 일을 하거나  TV를 보고, 혹은 영화 관람, 아니면 마겟에 가서 장을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처럼 그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복음 8장에서 나오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도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고자질(告者-)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12:2).  누가복음에서는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20:20).  마가복음 32절은 어떤가?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한 마디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허물이나 죄를 찾기 보다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거나 격려하기 보다는 약하고 잘못된 점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율법주의 신앙의 해악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신학이나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7:9),  바리새인처럼 성경에도 없는 자신만이 만들어 낸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쌍심지를 켜고 호시탐탐 엿본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트집을 잡고 비판하기 위해 태어난 바리새인 속성을 가진 자들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이런 부류에 속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 나아가 이 율법주의 신앙이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헛된 망상을 줌으로서 주님과의 친밀감보다는 여러 가지 의식과 교회 전통과 제도를 더 의지하고 믿도록 하여( 15:1-9),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행위를 신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18:9-14).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순서지에 적힌 대로 격조 높은 예배와 수준 높은 연주와 찬양을 웅장하게 드리고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드려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희생 제사를 이렇게 한탄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내게 벤제나 소베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5:21-24).   

실제로 율법주의 신앙이 심판을 초래하는 이유는 신약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기만족에 빠지는 신앙이기 때문에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토하여 내칠 정도의 역겨운 신앙이다( 3:15-16).  동시에 성령을 거스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단절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7:51).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목표는 온 마음과 영혼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는 것인데( 22:36-40), 율법주의 신앙은 우리의 관심과 믿음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종교적인 행위이기 때문( 23:1-7)에 모든 명령들 중에 가장 큰 명령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율법주의 신앙을 묵인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는 율법주의를 결코 묵인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날에도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율법주의 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묵인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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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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