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하고 싶은 이야기 2019. 3. 16. 17:34

리는 주보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묘지에서 드려지는 하관예배와 같은 분위기 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은사를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인데(고전 12:7),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은사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다면 교회에서 얻는 유익은 전무할 것이다.  우리가 모임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며( 34:3), 서로간의 상호 격려를 얻기 위한 것이다( 3:42).  따라서 교회는 성령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며(고전 14:26),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만을 기념하는(고전 11:26), ‘죽은 예수 추모(?) 동호회’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 20:19-29),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28:20), 즉 예수의 영( 16:7), 성령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3:3). 

사도 바울이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로마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5:18).   고린도 신자들에게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한다(살전 1:5).  사데교회처럼 메마르고 죽은 교회( 3:1)가 아닌 이상 진리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분명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4:12).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두 개의 비정상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는 변태방언’, ‘좀비로 만드는 방언’, ‘무당 헛소리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방언기도에 대해 신비주의적 행동이 나타날 정도로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John Calvin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에 대해 병적인 증세를 보일 정도로 미치게 열광하는 것이다.  자세히 눈여겨 보면 이 두 가지는 열광(熱狂)하다 못해 거의 발광(發狂)하는 수준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보다(15:3-7), 어느 특정 신학이나 은사를 더 우선시 하며 흥분한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들을 두루 경험했다.  두 가지 불, 곧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놀라운 임재인 거룩한 불(Holy Fire)과 아래로부터 오는 사탄의 역사를 따라 나타난 이상한 불(Strange Fire)을 모두 보았다(살후 2:9).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5:23),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신비주의적이며 감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말씀의 기초가 없거나 성숙하지 않는 상태에서 은사를 받았던지(11:29) 아니면 ‘거룩한 불’이 아닌 ‘이상한 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인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참된 성령의 역사를 평가절하 하거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기가 쉽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복음주의자이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7: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행실을 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는 주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면 안 되듯이(고전 11: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배워야 한다(살전 5:21).  하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내세워 상대방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기 위해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3:14-16).  이 신앙의 특징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26), 서로 물고 뜯고(5:15) 편가르기(19)와 논쟁(딤전 6:4), 그리고 싸움과 중상모략(4:31)을 일삼는 한 마디로 답이 없는 기레기같은 신앙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골치거리 중 하나이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부류이기도 하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하려는 시도는 절대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한 것처럼(10:1-2), 명령받지 않는 일에는 상급은 없고 오직 무서운 심판만 있다(25:24-3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방언의 주요 기능은 개인의 경건 생활을 도와주는 유익한 은사다(고전 12:7).  방언은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위어(僞語)로 문장과 단어로 이해하는 우리의 이해 체계를 통해 걸러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언은 간구와 중보로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며(고전 14:28), 그분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합당한 방법이다(고전 14:16).  바울은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말한다(고전 14:16-18).  만약 방언이 필요하지 않거나 유익이 없다면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방언이 고넬료 집안의 사람( 10:44-46)들 같은 새 신자뿐만 아니라 성숙한 신자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의 은사로 인해 놀라운 축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은 의문에 여지가 없다. 

성경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 덕을 세운다고 말한다(고전 14:4).  기독교적 활동(예배, 찬양, 기도, 봉사, 성경공부, 전도)이 자기 교화(敎化)의 효과적인 수단인 것처럼, 방언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영적으로 바르게 세우는데 크게 유익하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기도 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방언기도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20).  사람마다 신앙의 성숙도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방언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유익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영으로’(15) 기도하고, ‘영으로’(16)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다.  에베소서 618절에서 그는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에베소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우리가 이해하는 말로 하는 기도와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모두 포함된다(고전 14:15).  여기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을 언급하는 바울의 권면은 방언 기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포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경험한 바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누르고 있을 때, 축귀사역을 진행하고 있을 때, 성령 하나님은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방언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고린도전서 1419절의 말씀인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구절을 들어 반론을 제기한다.  이 말은 결코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고전 14:28), 방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14:39).  아이로니컬하게도 성령의 은사들을 오남용하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더 많은 은사를 갈망하고 사모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4:1, 39).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가지 지침을 내려준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고려하면 바울은 집단적인 모임이 아닌 상황에서의 방언기도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이 통역되면 그것은 예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고전 14:5),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방언 말하기를 원했다(고전 14:5).  이 은사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척도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이다(7:16).  한 마디로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데 유익한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전 14:12).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 외국어인가?  나는 방언이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자기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분명히 이해되고 알아듣는 외국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인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또한 방언이 인간의 언어라면 오순절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었다(2:8-14).  하지만 다국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도시였던 고린도에서 굳이 외국어를 주셔서 하나님께 이야기 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그리고 외국어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떻게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더 나아가 알아듣는 외국어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왜 굳이 통역의 은사를 구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13).  결론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한 마디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는 증거다(고전 14:23). 

방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초대교회 때만 주어진 은사이거나 혹은 귀신에게 미혹당해 거짓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방언을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사람들 중에 성령이 주시는 방언을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을 받았다면 바리새인 같이 노골적으로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12:34).  자신은 오랫동안 방언기도를 했는데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다보니까 자신이 하던 방언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을 ‘개 짖는 소리’ 혹은 마귀의 주술’, ‘거짓 은사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사도 있다.  나는 이 분들이 성령께서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스스로 방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방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무경험자들의 공통점( 12:30)은 한결같이 빗나간 자기해석을 가지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인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데 있다(벧후 1:20).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해석하려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성경에 포함시키려는 주관주의와 싸워야 하는데 이들은 주관주의(subjectivism)에 굴복한 자들이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 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1:17) 라고 말한 것처럼 은사를 비판하거나 부정한다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 4:7)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주신 것이고(고전 12:7),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사모해야지(고전 14:1, 39), 결코 비판해서는 안 된다( 7:1).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고전 13:10) 이라는 구절은 신약의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것을 교회가 최종적으로 동의한 정경(Canon) 곧 성경이라고 본다.  나 역시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온전한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딤후 3:16).  성경의 정경은 닫혀 있다(22:18-19).  이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의도한 바는 그것이 아니다.  만약 온전한 것을 신약 정경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교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리면 신학적 강박장애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은사들을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시키거나( 2:17), 방언은 초대교회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전 13:8-1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은사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4:12-15).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가 ‘사랑’이라는 동기에 의해 활성화될 때(고전 13), 교회의 유익을 준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지금도 방언에 대해 의심이 계속 일어나는가?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충동질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2:2).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의심을 가지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14:23).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3:1), 하나님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딤후 1:7).    

바울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고전 13:1)이라고 말한 것처럼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과 이웃(22:37-40)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것을 사용한다면 은사의 본래 목적에서 어긋날 수도 있다.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다른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혹감을 안겨줄 수 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절제와 통역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전 14:23).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겠지만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교도로 살아가던 시절에 받았던 사탄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방언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고전 12:2-3), 방언의 출처에 관계없이 무비판적으로 강조하거나 그것만을 가장 높은 은사로 여긴다면 그 사람 역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나는 방언을 바르게만 사용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은 덕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고전 14:4).  자기 교화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다.  비록 방언이 논쟁이 심한 은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방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딤전 4:1),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방언은 무당이 작두를 타면서 헛소리 하는 이상한 불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방언의 은사가 우선적이거나 영성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것에만 몰두하거나 광적으로 집착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은사를 허락해 주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개인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이 소중한 은사가 내 기도생활에 무척 유익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배운 칼빈주의 신학은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오늘날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6:46),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3:7-10).  이들은 성령을 심히 대적하거나(12:22-37).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소모적 교리 논쟁을 일으킨다(8:6).  솔직히 우리는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각기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사시시대와 같다(21:25).  성경도 자기주관주의로 해석하는 시대다.  소경된 인도자인 이들이(23:16, 17, 19, 24, 26),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성경을 가지고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신학적 나팔을 계속 분다면 하나님은 종교성이 강하고 성경지식을 과신하는 이런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지 모른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말씀이 있다면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반복적으로 경고한 것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1:24, 26, 28).   지옥의 궁극적인 고통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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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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