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 은사중지론자로서 오랜 기간 동안 Calvin 5대 교리를 견고히 붙들었던 Charles Carrin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초대 침례교회의 목사였다.  어느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세요. 하지만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저는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도 끌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방언도 싫어요. 이 세 가지를 염두해 두시고 이루어 주세요.  제멋대로 기도를 드린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소재한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교도소의 교목이었다.  그는 교도소에 들어와 회심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죄수를 맡게 되었다. 

Carrin는 매주 그 사람에게 사역하러 갔지만, 언제부턴가 그 성령충만한 죄수가 Carrin에게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반전이었다.  Carrin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Carrin는 결국 간수가 보는 가운데 그 죄수에게 안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죄수는 어떤 조건도 없이 성령께서 Carrin에게 임하시도록 기도했다.  바로 그날 Carrin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학과 교리라는 박스 안에 갇혀 살았던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외부로부터 거친 반응이 나타났다.  Carrin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일로 그는 교회로부터 사임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 소설 같은 실화는 Charles Carrin의 소책자 『On Whose Authority?: The Removal of Unwanted Scriptures』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심한 논쟁이 일어나는 부분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사실 성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고 높여야 할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7:51).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논쟁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왜 철회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부류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심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지속론자의 경험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신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육체적인 반응 즉,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이것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다시 두 부류로 갈라지면서 한 부류는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고, 다른 한 부류는 악령의 역사라고 쉽게 판단해 버린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은혜가 넘치고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은(고전 4:6), 진리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예배는 드리되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없는 죽은 전통 신학에 사로잡혀 있는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산송장과 같은 교회였다( 3:1-6).  이렇게 죽어 있는 송장과 같은 현대교회에서 오순절 날처럼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임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오순절 날( 2:1-4)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인간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 일들로 인해 분명 그리스도인들 간에 논쟁이 일어나고 충격을 받거나 갈등이 생길 것이다( 2:6-8, 12).  이런 현상은 Calvin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러운 하이에나가 먹이를 만난 것처럼 살기(殺氣) 어린 눈으로 자신이 배운 신학적 잣대와 바리새적 욕망을 가지고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비판한다(4:11-12).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있고(3:12), 초자연적인 기적 속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반면 악령의 역사도 있다.  오랫동안 ‘강신술’(降神術)에 심취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된 Raphael Gasson이 『The Challenging Counterfeit』에서 말한 것처럼 사탄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모방한다.  그에게는 거짓 크리스천과 선지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거짓으로 가득찬 증표와 불가사의한 일들, 그리고 기적들을 전하도록 힘을 부어준다(24:24, 16:14).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며(고후 11:14),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6:12, 12:9), 엄청난 표적과 기적을 행한다(살후 2:9-10). 더 나아가 거짓말하는 영을 그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부어 사람을 속이게 하고(왕상 22:21), 어떤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정확성이 있는 예언의 영을 주어 미래를 예언하게 하여(16:16), 바로 왕의 술객들( 7-8)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열광시킨 마술사 시몬( 8:9), 그리고 점치는 여자( 16:16)처럼 사람들을 심히 놀라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이유다(요일 4:1).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던 복음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 Lloyd Jones.  그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중에 특히 기도 받고 쓰러지거나 몸의 경련(진동)을 일으키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흥이 있을 때 항상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무질서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의 깨달음 속에 신음하고 아파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부흥이 있는 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Jonathan Edwards 역시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분별하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눈에 거슬리고 낯선 것일지라도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해야만 한다.  “첫째,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둘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셋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넷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다섯째,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그 뒤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6:44).  

나는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 중에 이성주의적인 서구 세계와 B. B. Warfield 계승자들에게 냉대를 당하고 있는 예언/계시와 꿈과 환상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구약시대 때에는 소수의 예언자들이 있었고(대상 29:29, 대하 9:29, 12:15), 예언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예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은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2:1-4).  이렇게 믿는 자에게 성령이 강하게 부어지면 눈에 가려졌던 영적인 세계가 열리면서( 1:17-18),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2:17).  오순절 날 베드로가 백성에게 선포한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예언적 선포였다.  요엘서 228-32절에 기록된 옛 예언의 성취가 방금 시작되었다.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 마디로 성령 강림으로 계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세대별로 몇 명의 선지자들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언과 환상과 꿈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며 선물이다(고전 12:7, 1:17).  이천년 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이란 무엇인가?(고전 12:10).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격려의 말로서 개인, 혹은 교회 공동체에 전달해주는 것으로(고전 14:26),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 위로하고 세워주기 위해 전해주는 말이다(고전 14:3).  그러나 사람들이 예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으면 성경이 계속 쓰여지는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이것을 ‘직통계시’ 라고 운운하며 이단 혹은 사이비로 매도한다.  특히 John MacArthur를 비롯해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 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 혹은 ‘계시하다’ 라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 16:17), 베드로는 그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바울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1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 11:27, 고전 2:10).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시’(1:17)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은사 중단론 신학자나 무경험 목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히스테리컬한 신학적 망상이다.  내가 아는 한 신비주의자가 아닌 이상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완성된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가 다를 뿐 아니라, 오늘날 주어지는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된다.  즉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요일 4:1).

나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 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구약의 선지자(9:1, 삼상 10:18, 18:19, 33:7)와 그렇지 않은 신약의 선지자(고전 14:29-30)의 차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벧후 3:16).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15:14)이기에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3:1).  D. A. Carson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어떤 해석자가 ‘계시하다’를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늘 생각한다면, 그는 빌립보 315절을 해석하기가 힘들 것이다”  나아가 개신교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 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가?  구약성경에서 ‘꿈’은 주로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졌고( 12:6), 신약에 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2:17).  문제는 은사들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이 단 한 번도 없는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꿈을 비웃으며, 이러한 것들은 특별계시를 주실 때에 사용했던 계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완성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나팔을 분다.  Warfield의 말을 빌리면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기능이 사도시대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단시비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런 요상한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공갈(?)협박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목사도 있다.  오늘날 꿈과 환상, 그리고 계시를 인정하면 불법이고 용서 받지 못할 사악한 이단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성경을 모르거나 신학적 무지에서 나온 몰지각한 말이다. 

나는 성경 안에 꿈(20:2)과 환상(10:7)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성경 본문을 가지고 계시지 못했을 때에만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신학적 견해에 따르자면,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수중에 가지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열등하고 하찮은 수단을 사용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성경에 기록된 많은 꿈들 중에 하나는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계시적인 꿈이다( 1:18-22).  솔직히 이 꿈과 관련해서 놀란 사실은 그것이 불필요한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구약성경 이사야 714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더라말씀만 상기시켜주시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확인시켜 주셨다(1:23).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의 살인적인 진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시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셨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2:13).  아내 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안전을 오늘날 현대 신학자와 목사들이 비웃는 꿈과 같은 취약한 것에 의존하는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실제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 본문인 호세아 111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말씀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셨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통신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환상에 대해 말해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11:1-18).  이 환상은 사도행전 1516-17절 기록에 의하면 앞으로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구절 역시 하나님께서 그냥 아모스 911-12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지 않고, 이단 시비에 걸릴 확률이 높은 신비스러운 환상을 통해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핍박을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고린도로 갔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다(18:9-10).  이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바울의 마음에 상기시켜 주시는데 적합한 구약성경 본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417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를 상기시켜 주실 수도 있었다.  이미 구약성경 정경이 완전히 형성되어 있어, 이러한 신비스러운 환상이 불필요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날 이단 사냥꾼들이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환상을 보여주시는 편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고집스럽게 꿈이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 말이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8:2, 22:17),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1:1).  우리는 그 해답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12:6).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잘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33:14-18).  이 말씀의 의미는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성령이 사용하시는 정상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아 믿지 못하는 것이다(8:44).  듣는 것이 둔하거나 분별력이 없는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다(5:11-14).  하지만 가르치는 목사가 입만 열면 신학적 오류가 많은 잡다한 학설을 짖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예언과 꿈과 환상이 없다고 나팔을 부는 것은 그 배후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의 교묘한 전술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12:38).  조금 끔찍한 말이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신학자와 목회자를 포함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인 교리와 율법에 흠뻑 젖어 있던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들(마 23:33)은 이로 인해 눈이 멀어 진정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5:37).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이 배운 신학적 학문에 중독(addiction)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신학적 회의주의라는 주문(呪文)에 걸려 오랫동안 예언과 꿈과 환상을 믿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나의 불신앙을 정당화해줄 어느 특정 신학을 미친듯이 신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성령께서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교도소 교목인 Charles Carrin이 흉악하고 살벌했던 죄수에게 비록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겸손히 무릎 꿇고 안수를 받은 것처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겔 37:1-10)와 같이 메마른 교리만을 붙들고 있는 Calvin의 계승자들에게도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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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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