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신학적인 사고는 하나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 이미 치유나 기적의 역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한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가르치고 있듯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후, 즉 감독들이 모여 신약성서의 내용을 확정했던 주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 이후 표적과 기사의 필요성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교회가 세워진 이상 치유를 비롯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은사들을 모두 거두어들이셨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기적의 중단이론을 일반화 시켜놓았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Martin Luther는 그의 초기 저작인 『Sermons on the Gospel of St. John』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의 시대는 초대교회로 한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했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별한 기적이나 계시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Luther는 확실히 은사중지론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의 저작들에서는 입장을 바꿔 기적들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는 Luthers Work』에서 이렇게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그분의 이름을 기도속에서 부름으로써 병든 자들이 치유되는 일은 지금까지 무수히 일어났으며 또한 지금에도 역시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약 200년 전의 사람인 John Calvin은 성령의 은사들이 주후 1세기 이후에는 중단되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 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라는 어떠한 위임도 받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능력을 가진 Calvin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살후 5:21).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을 볼 때( 3:6), 이러한 주장은 Calvin 자신만의 생각이지, 말세에 성령의 은사를 물 붓듯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2: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55:8-9).    

내가 『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Catholic 교회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가진 Calvin이 종교 개혁기 시대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 특히 거짓 이적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Calvin이 지목한 거짓 이적들 중 당시 Catholic 구마(驅魔) 사제들이 활발히 행하던 exorcism 의식, 푸닥거리도 포함돼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역사적이고 교회사적인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

교회사에 나와 있듯이 당시 교황은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 것(2:8) 위에 행위를 포함시켰다(2:16).  무엇보다도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기독교 진리를 크게 왜곡시켰고, 여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Dominican 수도사였던 Johann Tetzel이다.  면죄부’(免罰符)  혹은 면벌부’ (免罪符)판매가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Martin Luther를 크게 자극했던 Tetzel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러했다.  “면죄부(indulgence)는 하나님의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오시라. 나는 여러분이 범하려고 하는 죄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잘 인()쳐진 문서를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동전이 부모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purgatory)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옮겨집니다.  길거리 약장사 이상으로 과대선전을 하면서 가짜 약(면죄부)을 팔았던 그는 모든 죄에 대해 완전한 면책을 보장해 주며, 적당한 돈을 지불할 경우 면죄부의 혜택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심지어 면죄부가 비싼 것일수록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이 단축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대략 알고 있는 교회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시 Catholic 교회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면죄부 판매를 위해 세운 전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면죄부 판매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 기록과 당대 면죄부 판매에 용왕매진(勇往邁進)했던 사제들의 행각을 비판한 문학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대다수의 경우 이들은 면죄부의 효력을 과장하기 위해 감정적인 호소에 가까운 만담 수준의 설교와 거짓된 이적을 통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진다면 평민에게 1 플로린, 35-45만원에 면죄부을 판매했던 것이다.  하위 귀족이나 고위 귀족인 경우에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사야만 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역사학 교수 Yuval Noah Harari는 면죄부 판매를 가리켜 구원팔이라고 비꼬면서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이런 구원팔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Johann Tetzel은 모금함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실제 Martin Luther와 대립각을 세운 바 있던 면죄부 판매사 Tetzel 등의 설교 기록과 스페인의 Picaresque novel인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 판매사들은 청중에게 호소하는 인간적인 설교와 함께 자주 회중 앞에서 초자연적 이적을 선보이며 면죄부 판매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작품은 반승려주의(Anticlericalismo) , 사제에 대한 고발로 하층계급 출신의 주인공 소년이 부패한 성직자들을 만나고 나서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교활한 맹인(盲人)을 필두로 여러 주인(신부, 수도사, 수석사제, 포교사, 전속사제)을 만나 섬기게 되는데, 면죄부를 파는 포교사가 어떻게 구마예식(驅魔禮式)을 통해 판매를 성사시키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작품 속 내용 가운데 포교사는 면죄부의 효력에 대한 길거리 약장사 같은 장황스러운 설교를 진행한다.  설교를 듣던 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면죄부는 거짓이라며 포교사를 신랄하게 공격하며 비난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모든 눈은 공격하고 비난하는 신자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귀신들린 것처럼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심하게 떠는 증상을 보이면서 쓰러진다.  옆에 있던 면죄부 포교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귀신을 내어 쫓는 의식(exorcism)을 행하여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킨다.  사람들 눈 앞에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교사를 비난했던 사람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면죄부가 참으로 죄를 사해주는 증서라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이에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을 버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이며 획기적인 기획상품인 면죄부를 의심없이 사들인다.  주인공 Lazarillo는 이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나중에 여관에서 포교사와 귀신들린 행세를 했던 사람이 서로 돈을 주고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한 마디로 구마(驅魔) 의식과 귀신들린 것은 면죄부 팔아 먹기 위해 조작된 거짓 연기였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단지 소설 속 허구(虛構)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스페인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서, 훗날 세계적인 뛰어난 작가이자 『Don Quixote』 의 저자 Miguel de Cervantes 등에게 심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다.  시대적 정신 운동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Renaissance) 당시 사회의 지도층인 Catholic 사제들의 위선을 고발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群像), 즉 오늘날처럼 물질적이고 성적으로 타락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당시 실제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야고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깍아내렸던 Martin Luther와 개신교 신학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저술했지만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 ‘잔인하고 절대적인 독재자’라고 불리웠던 John Calvin은 누구인가?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이들은 이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느끼며 성장해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이들은 성경의 축귀 사역이 이교적 Occultism과 결합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의식으로 변질된 것도 눈여겨 보아온 자들이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에게 구마(驅魔)의식이란 조작된 사기극 아니면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행한 것처럼 이교적 주술(呪術) 정도로 각인(刻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학 용어로 말하면 외상성 신경증Trauma 후유증으로 인한 과민반응이 유난히 치유와 축귀사역에 대해 hysterical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축귀 사역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확고하게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다.   

Catholic 교회의 사기극에 가까운 거짓 이적과 이교도(異敎徒)들이 행하는 망자(亡者)의 혼을 불러드리는 의식에 참예하지 않으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나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의 확산을 막을 가르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 이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이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과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위해 열심히 싸웠던 신앙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이들이 귀신을 내어 쫓는 의식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나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축귀(逐鬼)사역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역은 기적의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 즉 사도들과 스데반과 빌립에게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킨 B. B. Warfield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 마귀의 역사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무당이나 박수 등 신접한 영매(靈媒)자들이 행하는 초혼(招魂)의식이 귀신이나 악령을 힘 입는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이들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을 무속과 협작하는 귀신을 쫓는 의식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한때 강신술사였던 Raphael Gasson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탄의 힘에 의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거짓으로 모방한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나타날 것을 알고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다(요일 4:1).  바울 역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21), ‘분변할 것’을 명한 것이다(고전 14:29).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Calvin이 성경적으로 바르고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체험한 치유나 축귀 사역에 대해서도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것임을 직접 확인했다면, 결코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정하거나 반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 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던 그가 성경에 기록되고 약속된 사역(16:17-18, 14:12, 2:17)의 실현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고 하는 것은 Calvin 자신에게 있어 성경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22:18-19). 

나는 성경에 기록된 치유나 축귀 사역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쫓아내는 귀중한 사역이라고 믿는다( 12:28).  Catholic 교회에서만큼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개신교 내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균형잡힌 목회자는 성경에 입각한 치유와 축귀 사역을 행한다.  이런 목회자들의 공통점은 신자들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귀신에게 눌려 자유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치유와 축귀 사역에 대해 여전히 불신과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일부 무경험자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본질을 놓쳐 버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벗어난 껍데기 같은 신학적 궤변으로 나팔을 불어대는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사도행전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말초신경의 손상으로 인해 다발성 신경병증을 가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면(3:1-10), 그 놀라운 기적을 박제화된 신학으로 해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4:14).  신학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횡설수설 하는 와해된 언어를 가진 조현병 환자가 아닌 이상, 그 기적을 설명하려고 기를 쓰는 석두(石頭) 목사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19:31)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영매자들과 무당들의 초혼 의식이 인간을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귀신들이나(10:10), 엔돌의 신접한 여자에게 임한 악령(삼상 28:3-25)을 힘입는 것이라면(10:10, 살후 2:9), 성경에 기록된 축귀 사역은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4:10)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11:20).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종교개혁기 당시 개신교회의 역사적이고 교회사적인 정황을 충분하게 알지 못한 데서 생겨난 심각한 오해이고, 동시에 이것은 신학적 망상장애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인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과대망상 속에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 특히 은사주의자들이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하고 신비주의적 과도성, 즉 성경적 신앙과 무관하게 축귀 사역의 현상적 측면에만 치우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이미 영적/육체적으로 황폐한 상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 즉 귀신들렸거나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선생인 목사와 신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8:44).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 당시  질병과 귀신에게 억압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1:32-34).  그렇다면 현대의학과 첨단과학 기술이 발달된 오늘날은 어떠한가?  성경에 의하면 마귀도 제 때가 얼마 남지않은 것을 알고 있다(12:12).  지금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벧전 5:8), 그만큼 이 시대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귀신에게 포로가 되어 눈 멀고 눌린 자가  많다는 것이다(4:18-19).    

이러한 문제들은 모든 교회들이 가지고 있다.  물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만큼은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바리새인 같은 영적 소경인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다(9:40-41).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말라비틀어진 북어처럼 메마른 말씀만을 강조했지, 병든 양이 교회를 찾아와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도와주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입만 열면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나팔을 불면서도 치유와 축귀 사역이라는 영적 전쟁에 있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정황을 성경적이고 교회사적이며 역사적으로 깊이 숙고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들의 진술을 약간 비틀어 자의적으로 해석해 결국 성경이 약속한 예수님의 사역 일부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복음에 대한 지적인 깨달음에만 지나치게 만족했지(고전 8:1),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일절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14:12). 

예수님께서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3).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5-7), 열 두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9:1), 칠십인의 제자들에게도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고’(10:19), 예수님 자신도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1:32-34).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 20:30).  뿐만 아니라 앞으로 복음(고전 15:1-4)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을 자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며 뱀을 집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16:17-18).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벧전 2:21),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반드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기도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5:14-16).    

사족이긴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을 병에 걸리거나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음의 문을 쉽게 연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처럼 불치의 병만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5:25-34).  그래서 Douglas MacArthur가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 무신론자는 없다”  오늘날 치유나 축귀사역에 대해 잡설에 가까운 무익한 말을 쏟아내는 바리새인의 영을 가진 신학자와 목사들(마 12:22-37)은 한 번쯤 본인 자신이나 가족이 히스기야처럼 죽을 병에 걸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서 보는 것도 좋다.  혹시 누가 아는가 내가 경험한 것처럼 아날로그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지 말이다(왕하 20:1-11). 

내가 성경에서 발견하고 확신하는 것은 치유나 기적들은 일시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전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스스로를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교회 안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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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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