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치료하셨을 때, 가장 심하게 대적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선생 바리새인이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대놓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독설을 퍼부었다(12:22-24).  예수님도 이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인 것을 알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책망하신다(12:34).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 당시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들만 거듭나지 못한 지옥의 자식인가?(23:33).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교인 하나만 생기면(23:15), 자신보다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우맹이요 소경들(23:17)인 현대판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8:44).  당시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3:10),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거짓을 일삼는 마귀의 하수인이며 신학의 암살자들이었다.

Calvin을 성령 신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Calvin만큼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에서는 성경을 버리고 계시를 좇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시킴이라는 제목으로 한 장을 썼다.  그런데 로마서126절에 대한 주석에서 예언의 이중적인 성격 즉, 예언적 성격과 해석적 성격을 언급하면서 예언적인 예언은 명백히 복음서가 기록되고 있던 동안에만 번성한 반면 해석적인 예언은 교회 안에서 지속되었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주석에서 단지 자취나 그림자 외에는 너무 오랫동안 교회에 존재하지 않아서 지금도 찾아야 할 은사와 직분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점을 불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필요가 요구할 때비상한 은사들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런 유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거나 일반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난독증에 걸리지 않은 이상 Calvin의 해석은 참으로 아리송하고 오락가락 하는 것 같다. 

그는 방언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나타냈다.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한 마디로 갈팡질팡 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Calvin의 계승자들인 세계 3대 개혁주의 신학자 Abraham KuyperHerman Bavinck, 그리고 Benjamin B. Warfield가 있다.  Warfield는 변증학을 버리고 성령의 증거를 더 신뢰하는 시대적 경향을 혐오했고,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사람이다.  성경을 확고히 믿는 그는 시대의 오류와 싸웠고, Charles G. Finney 의 후기 사역 속에 나타난 극단주의와 피상적인 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광신주의의 확산을 막을 가르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신칭의, 그리고 건전한 가르침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운 이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오늘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3명의 신학자 외에 정통 장로교의 주요 설립자인 John Gresham Machen의 탁월한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듯 수용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은사중지론을 교리로 바꿔버렸다.  은사중지론은 대부분 이들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나 역시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대표하는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은사중지론에 관한 한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지적인 깨달음에 지나치게 만족하면서 오직 성경 속의 초자연적인 기적들만을 기꺼이 수용한다.  다만 바리새인 같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계시를 통해 자신을 즉각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으신다고 확신있게 믿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삶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않는다.     

이신론자는 한 분 하나님을 믿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 칼빈주의자는 성경 속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  이들의 신학에는 하나님은 직접적인 초자연적인 방법을 오래 전에 중지하셨다(히 13:8).  새 언약 아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환상과 꿈과 예언은 이미 끝났다(2:17).  더 이상 기적이나 치유도 필요 없게 되었다(약 5:14-16).  고린도전서 1210-12절에서 설명하는 은사들에 대한 개념은 안중에도 없다(고전 13:10).  오직 질서의 하나님만 있지(고전 14:33),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없다(1:37).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고쳐서는 안 되는 것처럼(4:13), 이들에게 있어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들만큼 진리의 말씀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들만큼 입만 열면 Calvin들먹거리며 성경말씀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없다.  정말 궁금한 것은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면서 말씀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4:14).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  한 마디로 입으로만 주여 주여, 진리의 말씀을 외쳤지(6:46), 믿음은 개떡이다(2:26).   

오늘날 Calvin의 계승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조직 신학들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덧입을 기회를 놓칠 것인가? 아니면 성령께서는 오늘날 그런 식으로 역사할 수 없어. 우리의 신학적인 범주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라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계속할 것인가?  기억하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신학이 허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교회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자신의 뜻대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7, 11).  그 분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있어 인간이 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로마서 920절 말씀은 이럴때 사용하라고 쓰여진 구절이다.  나의 요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우리의 신학적 관점으로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을 살지 말자는 것이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자.  스데반이 오순절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유대인들 앞에서 증명할 수 있었는가?  공회 중에 모인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믿었다( 7:54-58).  그렇다면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 만난 것( 3:2)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었을까?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거나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들의 말을 믿거나 거절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다(고후 12:6).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사(고전 12:7-11)를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적인 근거가 뚜렸하며(고전 14:26), 신뢰할 만한게 나타나는 모든 은사를 허용해야 한다(고전 14:39-40).  아마도 칼빈주의자는 종교적 자긍심에 사로 잡혀 참으로 겸손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로 겸손한 척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설()을 풀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주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적이며 건전하다고 여기는 신학적 논거들 때문에 하나님의 은사들 가운데 일부를 철회하기로 결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할례받지 못한 입으로 왈가왈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 같은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12:34).  우리는 은사들이 성령의 현시로 묘사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2:7).  성령을 길들이려는 칼빈주의자들은 교리적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과 편 가르기를 조장하면서 장광설들을 계속 늘어놓는다.  나는 오늘날 모든 지면을 통해 쓰여지는 언어상의 폭행들이 어떤  특정 신학을 사수하기 위한 선한 행위의 증거가 아니라 실제로 성령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울(딤전 1:13)이 교회를 핍박할 때(9:1),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표적의 은사들이 1세기에 소멸되었지만 성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 특히 표적의 은사들은 내주하고 계신 성령의 현시라고 명확히 정의한다.  그것들은 교회에서의 자신의 주권을 확장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의 증거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적 은사들을 제거하는 것만큼 똑같은 정도로 성령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명칭 가운데 한 가지가 바울이 말한 예수의 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6:7).  한 마디로 칼빈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은사중지론은 헛점이 많은 신학 체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적인 신학은 우물 안에 갇힌 한정된 신학이고, 초교파적인 신학은 풍성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독선적인 신학이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닮아가는 일들을 상실하게 만든다.  성경말씀 그대로 인용한다면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회칠한 무덤같은 신학이다(23:27).

1세기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은 하속들에게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뺕는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7:48).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칼빈주의 신학을 떠나 오순절 신학을 받아들일 수 있어!”  물론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자도 성령의 존재를 남겨 놓는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한 한 가지 사역만을 하시는 분으로 제한되고 격하시킨다.  한 가지 사역이란 불충분한 예수님의 형상으로 목회자와 성도를 변화시키는 사역이다.  한 마디로 성품에 있어서만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함양하는 일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제한된 시각은 오로지 성령의 열매에만 집중하게 되므로(5:22-23),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을 형성시키는 일은 성령의 본질적이며 유일한 기능이 된다.  이것은 불안전하고 균형잡히지 않은 절름발이신학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주님을 닮는 것의 절반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칼빈주의 신학이 주요 초점을 성령의 열매에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참되고 지속적인 거룩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에베소서 413절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모든 부문에 있어 복음주의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닮았는지를 설명해 주는 통계에 근거한 절망적인 보고를 읽은 적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5:14), 불신자 이상으로 세상에 동화되어 있다.  빈혈에 걸린 것 같은 현대교회의 심각한 상황을 깨닫고 인정하는 어떤 목회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은 보다 말씀에 입각한 강해설교와 칼빈주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거룩하게도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며 전달하는데 있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않으려고 상당한 열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전 4:6).  그러나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면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삶을 전달하는 일로 이어지지 않을 뿐더러 구원파 같은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낸다.  

진정으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목회자와 교회는 단지 성품에 있어서만 예수님을 닮는 일에 만족할 수 없다.  목회자와 성도는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한다(14:12).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능력 없이 주님의 성품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5).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은 애석하게 그런 희망에서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논쟁만 일으키는 박제(剝製) 신학으로 변하고 있다. 

나는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했지만 교수들로부터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이단들처럼 꼬투리를 잡아가며 논쟁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누가 사사건건 논쟁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가?(딤전 6:3-5).  물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 겸손하고 성숙하며 존경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과 사랑과 남에 대한 배려를 배운 것이 아니라 어디서 못된 것(인신공격, 중상모략, 말바꾸기)들만을 잔뜩 배워 온 성숙하지 못한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목사들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권능을 덧입은 깨어 있는 목회자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만을 닮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 열망을 가진다.  이들에게 있어 무릎을 꿇고 나라와 민족(딤전 2:1-2)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은 있어도 변론과 언쟁할 시간은 없다.   

성령의 은사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 성공에 대한 설교를 하며 치유를 행하듯 속이면서 매스컴에 등장하는 이름난 목회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은사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 나라라고 선포한 거룩한 생기로 충만한 세계 속에서 말없이 주어진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이름 없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만약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사도들과 함께 소멸되었다면 우리는 이 사역의 상실을 무엇으로 대체하고 있는가?  보다 많은 교육과 세미나, 보다 많은 소통의 기술과 시장 분석, 보다 많은 설교의 기술과 시대의 흐름에 대한 고려, 무엇보다도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보다 많은 선정적인 비판과 비난, 그리고 정죄와 편 가르기 등으로 대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  성령께서는 기름부으사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사명을 이루게 하시고(4:18), 인성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귀감으로서 주님은 명백히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철저히 성령을 의탁하셨다(5:17, 10:38).  만일 그것이 예수님께도 필수적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14:12). 

천사가 타락하면 사탄이 되듯이(14:12-15, 28:13-17, 10:18, 12:9), 신학이 변질되면 교회가 타락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세기 종교 지도자들이 독선적이고 저질스러운 행태에서 보인 것처럼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해석학적 원리로 삼는 칼빈주의 신학이 아니다.  나의 변함 없는 생각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보다 많은 다스림과 그분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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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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