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고(출 15:26, 호 7:1), 그분은 인간의 요청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치유하시기에(삼상 2:6, 시 72:18, 103, 3, 136:4), 사도행전에서 스테반(행 6:8)과 빌립(행 8:5-8), 그리고 베드로(행 3:1-10)와 바울(행 14:8-10)이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하여 증거 할 때(행 5:12),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0:1, 눅 10:1-20).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결코 치유자로서 명성을 얻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으며(행 행 3:12), 이것에 대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주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거나(행 2:43, 5:12), 단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4:3, 15:12).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병 고치시는 사역(마 4:23-24)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어떤 여건 하에서 치유가 자유롭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요 5:19),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 3:17)조차도 항상 임의대로 치유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막 9:7)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막 2:10), 그분에게 질병을 고치는 능력이 과연 필요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성경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마 8:16), 여러 번 “그는 그들 모두를 다 치료하셨다”(마 12:15)라는 말을 우리는 접할 수 있지만(눅 6:19), 유독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을 고치셨습니다(요 5:1-15).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연못가 주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직후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에 개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5:15-18), 이 논쟁 도중에 예수님은 연못가에서 “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날 연못가에서 한 사람만을 고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만을 고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고(요 5:30), 만약 아버지께서 그 병자를 치료하시길 원하지 않으셨다면(요 12:49), 아마 예수님 자신도 병자를 고치실 수 없었고(요 14:10),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고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습니다(요 8:28).

 

이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여건 하에서 마음대로 치료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사건이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났는데, 주님은 그곳에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시지 않고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것을 마가는 증거하고 있고(막 6:5), 마태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3:5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아들의 치유사역이 제한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임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독립하여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자신의 전능하심(마 8:3)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을 통해 철저히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빌 2:5-11).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사도들은 더 말할 나이가 없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5:5), 주님은 동일한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행할 직무를 위임하셨지만(요 5;22), 아들은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독자적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제자들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도록 베드로를 사용하셨을 때(행 3:1-3),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자들을 바라보았지만(행 3:11),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이 치유로 인해 자신들을 높일 것을 두려워하여 병자가 고침 받은 것은 자신들의 사도적 능력이나 거룩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적이 있었는데(행 3:12), 한 마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롬 9:16).  이와 동일한 원리가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도 하나의 기적에 의해 예증되는데,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 저자 누가는 바울은 그에게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고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행 14:8-10).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치료받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 치유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마 9:27-30).  또 다른 예증은 제자들이 간질병이 든 소년을 고치지 못한 경우인데(마 17:14-21), 이 사건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것과 모든 질병에 대한 권세를 받은 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는데(마 10:1), 이것은 치유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마가복음 16장17-18절과 야고보서 5장 14-1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병든 자가 다 고침을 받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치유의 은사는 개인이 임의대로 원하는 장소나 시간에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이 사이비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신실한 사역자라면 그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날 것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지식의 말씀이 치유를 위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19절 말씀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고침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시고,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의 종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사역자는 누가 치유될 것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음성(지시)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사역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처럼 간절히 고침(마 15:21-28)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의대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 사역자를 찾거나 또는 찾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사도들조차도 임의대로 고칠 수 없었다면 오늘날 치유사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대단한 능력의 종인 것처럼 자랑하거나(고전 1:29), 높이지 말아야 하고(눅 16:15), 만약 누구든지, 언제나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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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과정에서 자신을 개방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면 사역 반에서는 좀 더 빨리 자신을 오픈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개방의 정도에 따라 훈련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1. 자기 개방의 필요성

실제로 자기 개방은 훈련의 성과를 높이는데 크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을 오픈하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훈련을 제대로 받는 지름길입니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알게 되면 괜히 나만 손해를 보는 듯 한 느낌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다른 모양으로 포장하면 할수록 훈련의 효과는 떨어지게 됩니다.  나를 포장하고 숨길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고, 이러한 노력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결국 훈련을 위해 쏟아야 할 힘을 빼앗고 말 것입니다.

 

2. 자기 개방의 수준

그러나 자기 개방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개방이 훈련에 효과적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개방은 함께 훈련받는 훈련생들에게 위로와 격려, 도전과 경고가 되는 수준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치명적인 개인문제, 배우자와의 부부싸움 또는 배우자의 부도덕한 생활 등 부정적인 부분을 오픈하는 경우에는 정말 이 이야기를 오픈하는 것이 함께 훈련받는 훈련생들에게 유익한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훈련생들과 비교되는 것은 오픈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개방은 신세 한탄이나 자기 자랑의 기회가 결코 아닙니다.

 

3. 자기 개방의 자세

자기 개방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인식 속에서 삶을 오픈해야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적용과 결단이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를 개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서는 아직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훈련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심으로써 나의 가정과 생활을 변화시키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한번 밖에 없는 훈련의 기회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기 원하십니까?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고 싶습니까?  아니면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훈련을 받으시겠습니까?  이 모든 차이의 결과는 바로 당신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개방을 통해 변화와 성숙의 기회를 만들어보십시오.  자기 개방을 통해 열매를 맺도록 많은 노력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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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결혼에 대한 꿈과 기대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상대방의 욕구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은 결혼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시작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평생을 유지한다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 후의 너무나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좌절하거나 실패를 경험하는 부부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결혼해서 함께 살다보면 각종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이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는 가정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결혼을 하면 육신의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고(고전 7:28), 이 결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걷던 남녀가 한길로 함께 걸어가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배경과 가정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자신들의 뜨거운 사랑이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만일 결혼생활도 연애시절처럼 뜨거움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한 인생의 경험자인 부모들이 앞으로 결혼할 자녀/예비 배우자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실상 그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고 말하는데(창 2:18), 이 단어를 놓고 다양한 성경번역본에서는 ‘돕는 자’, ‘적절하게 돕는 자’, ‘적절한 동반자’, ‘조력자’, 심지어 Anchor Bible에서 “내가 그에게 맞는 조수를 지으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에제르’는 구약에서 20번 이상 나오는 명사로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지칭하는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신명기 33장26절에서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라고 개역성경은 번역을 했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너의 힘이 되시려고’이고, 신명기 33장29절에서도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라고 했지만 ‘그는 너의 힘의 방패시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데 한 마디로 ‘돕는 배필’이란 힘/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와 동등하게 그리고 완전한 남자의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동등권을 강조하는 이 같은 논리전개 방식은 창세기 2장23절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한말 ‘내 뼈 중의 뼈요’라는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관용적 의미는 “우리 중의 하나” 혹은 “우리와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수(assistant)나 시중을 드는 배필(mate)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남자를 위해 힘이나 혹은 능력으로 지음 받아 그 모든 면에 있어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동물들에게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자기와 부합한 존재, 즉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창 2:19-20), 자기와 동등한 존재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필요를 공허감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 주셨는데(창 2:21-23), 그것이 바로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나 노예로 만드시지 않고 남자와 동등한 힘으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Matthew Henry의 말을 인용하면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  이 결과로 생겨난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고(창 2:24), 이 결혼이라고 하는 성적 만남을 통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울 뿐 아니라 넘칠 만큼 채워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결혼을 동반자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고(말 2:14), 이 동반자의 관계란 생각과 목표가 같으며 또한 육체의 관계에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친밀하게 연합한 자를 가리킵니다(엡 5:31).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위해 한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시고 이들이 언약의 보호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외롭지 않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만남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삶이 시작하기 위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데(창 2:24), 사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것이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남자(아담)와 여자(아담)인 것을 생각해 볼 때(창 1:27), 부모와 자식관계는 일시적인 것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부부관계는 영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출생(창 3:16)이나 양자(출 2:10)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육(엡 6:4)하거나 공경(엡 6:2-3)해야 하는 의무는 있지만 결혼의 관계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적인 약속은 없고, 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구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마 19:6).  이처럼 결혼이 언약적인 동반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발전시켜야 하고, 만약 이 관계에서 무슨 좋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간음, 폭행, 술, 도박, 등등)들이 생겨서 결혼생활이 비참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두거나 혹은 아내가 남편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둘 때 언제나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하는데, 물론 혈육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보다 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쌍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평생을 깨알 쏟아지는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것은 극히 드문 것이고 결혼생활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부부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부부의 사랑이 언제나 로맨틱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문제인데,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아내)을 볼 때 남자의 소유물이거나 성노리개, 혹은 집에서 일하는 기계(?)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생활에서 뜨겁게 사랑하던 시기가 지나면 실망과 좌절이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때에 부부가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게 되겠지만, 만약 자기의 주장이나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내세운다면 이런 부부는 거의 이혼이나 별거의 상태로 들어가고 남은 인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짝을 찾아야 하겠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면 남은 인생을 순탄(?)하게 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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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없기 때문에

오늘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시대가 죄인들로 넘치는 시대가 된 것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오늘날 교회 주변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넘친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사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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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Deere가 말하길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으며,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고 개개인뿐 아니라 교회전체에 도움을 주고, Bill Hull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자질구레한 신학적 논쟁을 끝나게 만들고, Charles Craft 역시 성경 어느 구절에도 표적과 기사가 기독교 초기시대 이후로 중단되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은사들이 종식되었다는 이론들은 인간적인 해석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은사중지론 교리를 믿다가 지금은 은사지속론 입장에 서 있는 Samuel Storms는 표적과 기사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을 희석시키지 않을뿐더러, 만약 기적과 말씀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문제는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Lloyd Jones도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상기시켰고, 성령의 권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R. T. Kendall은 신학적으로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신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합니다.  지금 이들의 공통점은 양쪽진영에서 신학과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접해본 사람들이기에 개혁주의와 오순절은사주의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Talbot School of Theology를 나온 John MacArthur는 줄 곳 한 신학과 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학이기 보다는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신학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 같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만이 정통이라고 줄기차게 우겨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안에는 다양한 신학과 교단/교파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서로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연합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학의 폭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너무나 좁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신학의 틀을 가지고 다른 신학/신앙을 비판하거나 이단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기편에 속한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편에 선 사람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으로 마녀사냥 하듯 몰아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연합을 깨트리는 기독교 폭력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열매는 아닐 것입니다.  R. A. Torrey는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성숙한 신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고 확인하는 신앙인 반면에 미성숙한 신학은 분쟁을 일으키고 당을 짓는 집단정신을 초래하는 불안전한 신학”이라고 지적했는데, 사실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목사들은 복음주의 우산 안에 있는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오직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데, 이런 사람은 Gregory A. Boyd, Paul R. Eddy의 『복음주의 신학논쟁』이라는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2013년에 MacArthur가 Strange Fire Conference를 준비한다는 말을 들은 은사주의자들 진영의 목회자들은 그에게 은사운동에 대해 공격(비판)하지 말 것을 제안했지만, 막상 컨퍼런스가 시작되면서 그는 오늘날 은사운동 하는 사람들이 마치 버림받은 자들인 것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MacArthur와 네 명의 목회자들이 Panel Q & A, Session One 시간에 은사운동에 대해 결론내리기를 이들(은사주의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성령을 모독하고 복음을 모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혹평을 했는데, 다섯 명의 목회자들이 한 시간이 넘는 토론에서 결론짓기를 한마디로 은사주의자들은 사탄의 노예들이고 길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패널 질의응답에 나온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 보시기에 죄인이고(롬 3:9), 기회만 주어지면 죄짓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인데(사 59:7), 어떻게 하나님도 아니면서 똑같이 마음에 악이 가득하고(렘 17:9), 평생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을 인간들(전 9:3)이 어떠한 영적분별력을 가졌기에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을 향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롬 14:4).  이러한 독설들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말일까요?(잠 18:21).  사실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자들의 착각은 은사주의자들 모두가 그리스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은사만을 추구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판단할 때가 많은데(요 8:16), 이것은 대단한 오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들이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자 개혁주의 신학과 은사주의 진영에서 풍부한 사역을 감당했던 R. T. Kendall은 Strange Fire Conference 패널토의를 다 듣고 나서 편지 한 장을 MacArthur에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Charisma Magazine 2월호에 나온 Kendall이 보낸 편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신은 은사중지론이 진리인 것처럼 신봉함으로 무서운 운명에 처할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당신은 가설에 불과한 은사중지론을 마치 교리인 것처럼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나의 전임자였던 Lloyd Jones 목사가 마치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암시하고 있는데… 그분은 은사중지론자가 아닐뿐더러 은사중지론을 혐오하셨다. 오늘날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체험한 모든 간증들을 당신이 마귀적인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사실에 대해 그분은 아마 전율하실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교리처럼 고수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가능한 빨리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공개토론의 가능성을 내비 춘 적이 있었는데, 사실 Kendall은 『Holy Fire』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초대교회 시대로 한정되었다고 성경을 뒤튼다면 나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신학자/목회자들 중에 Lloyd Jones의 후임목사인 Kendall에 대해 왜 신비주의적 과대망상증 환자나 귀신에게 미혹 당해 거짓방언으로 옹알거리는 자라고 낙인을 찍는 신령(?)한 사람들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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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어 만든 우상

연구자료 2016. 1. 13. 15:04

히브리어로 <마셰카>라고 하는 ‘부어 만든 우상’은 용해된 금이나 은, 혹은 철이나 청동 등을 미리 만들어 둔 틀에 부어 제작하였다(신 27:15, 사 40:18-20).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상(像)들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동물의 모습을 가진 것과 금이나 은을 입힌 사람의 형상을 지닌 입상(立像)들이 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는 ‘드라빔’이라는 가정의 수호신이 있었다(창 31:19, 34-35).  드라빔은 점을 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겔 21:21, 슥 10:2).  그러나 역시 가신(家神)이기 때문에 새긴 신상이나 부어 만든 우상, 혹은 입체 신상(왕하 23:24)과 마찬가지로 우상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었다.  그 형상에 관한 성경 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드라빔은 보통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인간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조그만한 가족 수호신은 진흙을 가지고 주형(鑄型)을 떠 만들거나 손으로 모양을 빚어 제작되기도 하였다.  작은 바알 상은 대부분 주조로 떠 만든 후에 금으로 도금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부어 만든 우상은 새겨 만든 우상(graven image)과 마찬가지로 섬기는 것이 금지 되었으며(왕상 14:9, 출 32:4, 34-37), 도리어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파괴할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다(신 7:5, 12: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출 32:23, 삿 17:3).  따라서 이러한 사악한 우상숭배는 선지자들로부터 계속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사 30:22, 40:19, 호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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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코스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큰 오순절 교회를 섬겼는데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 여러 번 나를 크게 도와주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사님과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것을 알았지만 항상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못하고 나는 러시아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목사님의 부인인 헬레나가 영국식 발음이기는 했지만 영어를 매우 잘했습니다.  1993년 선교여행 중에 처음으로 주일에 모스크바 방문 일정이 잡혔고 목사님은 나를 자기교회에서 설교하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강단에 낫과 망치가 걸려 있는 큰 강단이었는데… 예배가 시작되자 목사님은 마이크로 다가가 양손을 들고 또렷한 미국 본토발음으로 “성령님 오늘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계속되었고 나의 벌어진 입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소련 사람을 만나본 분은 아시겠지만 몇 년 동안 훈련과 연습을 거치지 않으면 소련인이 미국식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헬레나에게 “저는 코스댜 목사님이 영어를 전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완벽한 영어로 기도하시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남편은 영어를 못해요. 그것은 방언기도입니다. 뭐라고 기도했는지 목사님도 모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방언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코스탸 목사님이 영어로 방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군중들이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타국인들이 자기들 본토 방언을 하는 것을 듣고 느꼈을 감정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방언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었고 신학교에서는 방언의 부당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결과 목사가 되어 사역할 때 교인들에게 방언의 부당성을 가르쳤고 처음 십 년간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일 년에 몇 번씩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히 찾지도 않았는데 성령께서 저와 아내에게 방언을 주셨고, 문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가 제 가정을 덮었습니다.  처음에 나로서는 이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 입장을 가르쳐왔던 내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나의 방언 체험을 사람들한테 말했는데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방언만큼 그분께 나를 더 가까이 이끌어 준 것이 없습니다.  지난 십 사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방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개인기도 시간에, 운전하면서도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위의 간증은 『Experiencing the Spirit』에서 나오는 것으로 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활발하게 사역하면서 헝가리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소재하는 Messianic Jewish Bible Institutes에서 초빙교수로 섬기고 있는 Robert Heidler 박사의 고백입니다.  물론 이러한 글을 접할 때마다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질 수 있는데, 한 부류는 마귀의 주술에 걸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옹알거리는 귀신방언을 한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사실 방언기도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방언을 허락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고전 12:11), 여기서 항상 궁금한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과연 마귀에게 조종 받아 시간만 되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옹알거리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목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가 된다고 장황스럽게 궤변을 늘어놓는데 왜 아직까지 나는 방언기도를 많이 했어도 좀비(?)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방언기도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이나 하다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포기한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R. T. Kendall의 말을 인용한다면 “진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 가짜에 관해 논할 자격이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성령이 주신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솔직히 이들이 받은 은사가 정말 하나님께로 왔다면(고전 12:11), 데마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딤후 4:10), 그 은사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다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없듯이(마 7:9),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은사)들 중에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안타까운 것은 그 받은 은사가 성령께로부터 온 확신이 얼마나 없었으면 쉽게 포기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가 보통 영악하기 그지없다는 것이고(고후 11:3), 사실 영적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상모략에 뛰어난 마귀(욥 1:9)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 즉 하와를 충동질한 것처럼 사람 마음속에 끊임없이 의심을 심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창 3:4-5).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개 눈에 똥만 보이는 것”처럼 계속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마다 의심이 일어나는데(눅 24:38), 이것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약 1:6), 미혹의 영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계 12: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으로 지켜주시는 것이고(사 26:3),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한 것처럼(행 27:22-26),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은사들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눅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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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온유한 마음을 동반하고 산출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 또는 경건한 슬픔으로 깨어진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경건한 슬픔은 약해진 살이 부드럽고 쉽게 상처가 나는 것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경건한 슬픔은 이기적인 원리에서 비롯되는 단지 율법적인 슬픔보다 더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데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구주께서 그런 사람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되었다.  어린 아이의 살은 매우 부드럽다.  또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의 마음도 매우 부드럽다.  이것은 선지자의 지시에 따라 요단강에서 씻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왕하 5:14).

 

어린 아이는 외부의 악한 일들이나 자기를 해치려고 위협하는 것이 나타나면 쉽게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도덕적인 악과 영혼을 해치려고 위협하는 것이 나타나면 쉽게 공포를 느낀다.  어린 아이는 위험한 장소에 있는 악을 쉽게 의심하며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 하고 혼자 남아 있거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신의 영적인 위험들을 쉽게 알아차리고 방심하지 않으며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 두려워하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참된 은혜는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키지 않고, 그것을 더 민감하게 해서 죄악된 것이 죄악 되다는 것을 더 쉽게 철저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죄의 가증스럽고 두려운 본질을 더 크게 깨닫게 하며 죄의 가증스럽고 두려운 본질을 더 빨리, 더 깊이 인식하게 하며 자신의 심령의 죄성과 악성을 더 확실하게 느끼게 한다.  그래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의 양심은 불에 덴 적이 있어서 불을 무서워하는 아이와 같다.

 

은혜는 영혼의 죄가 하나님의 뜻과 율법과 그분의 존귀하심을

얼마나 크게 거역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혐오하시며 불쾌하시는지를 깨닫게 하며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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