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인 문제/결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1.23 결혼과 그리스도인
  2. 2015.10.31 결혼과 독신
  3. 2015.08.22 결혼이란?

모든 사람은 결혼에 대한 꿈과 기대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상대방의 욕구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은 결혼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시작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평생을 유지한다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 후의 너무나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좌절하거나 실패를 경험하는 부부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결혼해서 함께 살다보면 각종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이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는 가정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결혼을 하면 육신의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고(고전 7:28), 이 결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걷던 남녀가 한길로 함께 걸어가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배경과 가정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자신들의 뜨거운 사랑이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만일 결혼생활도 연애시절처럼 뜨거움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한 인생의 경험자인 부모들이 앞으로 결혼할 자녀/예비 배우자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실상 그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고 말하는데(창 2:18), 이 단어를 놓고 다양한 성경번역본에서는 ‘돕는 자’, ‘적절하게 돕는 자’, ‘적절한 동반자’, ‘조력자’, 심지어 Anchor Bible에서 “내가 그에게 맞는 조수를 지으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에제르’는 구약에서 20번 이상 나오는 명사로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지칭하는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신명기 33장26절에서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라고 개역성경은 번역을 했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너의 힘이 되시려고’이고, 신명기 33장29절에서도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라고 했지만 ‘그는 너의 힘의 방패시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데 한 마디로 ‘돕는 배필’이란 힘/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와 동등하게 그리고 완전한 남자의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동등권을 강조하는 이 같은 논리전개 방식은 창세기 2장23절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한말 ‘내 뼈 중의 뼈요’라는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관용적 의미는 “우리 중의 하나” 혹은 “우리와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수(assistant)나 시중을 드는 배필(mate)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남자를 위해 힘이나 혹은 능력으로 지음 받아 그 모든 면에 있어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동물들에게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자기와 부합한 존재, 즉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창 2:19-20), 자기와 동등한 존재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필요를 공허감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 주셨는데(창 2:21-23), 그것이 바로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나 노예로 만드시지 않고 남자와 동등한 힘으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Matthew Henry의 말을 인용하면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  이 결과로 생겨난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고(창 2:24), 이 결혼이라고 하는 성적 만남을 통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울 뿐 아니라 넘칠 만큼 채워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결혼을 동반자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고(말 2:14), 이 동반자의 관계란 생각과 목표가 같으며 또한 육체의 관계에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친밀하게 연합한 자를 가리킵니다(엡 5:31).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위해 한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시고 이들이 언약의 보호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외롭지 않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만남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삶이 시작하기 위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데(창 2:24), 사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것이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남자(아담)와 여자(아담)인 것을 생각해 볼 때(창 1:27), 부모와 자식관계는 일시적인 것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부부관계는 영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출생(창 3:16)이나 양자(출 2:10)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육(엡 6:4)하거나 공경(엡 6:2-3)해야 하는 의무는 있지만 결혼의 관계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적인 약속은 없고, 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구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마 19:6).  이처럼 결혼이 언약적인 동반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발전시켜야 하고, 만약 이 관계에서 무슨 좋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간음, 폭행, 술, 도박, 등등)들이 생겨서 결혼생활이 비참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두거나 혹은 아내가 남편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둘 때 언제나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하는데, 물론 혈육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보다 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쌍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평생을 깨알 쏟아지는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것은 극히 드문 것이고 결혼생활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부부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부부의 사랑이 언제나 로맨틱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문제인데,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아내)을 볼 때 남자의 소유물이거나 성노리개, 혹은 집에서 일하는 기계(?)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생활에서 뜨겁게 사랑하던 시기가 지나면 실망과 좌절이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때에 부부가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게 되겠지만, 만약 자기의 주장이나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내세운다면 이런 부부는 거의 이혼이나 별거의 상태로 들어가고 남은 인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짝을 찾아야 하겠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면 남은 인생을 순탄(?)하게 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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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사실 많은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연분이 완벽하게 맞아서 사는 부부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낳고 살다보면 미운정과 고운정이 들어 무난한 한 쌍의 아름답고 성숙한 부부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상당수 결혼생활이 쓰라린 경험과 악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결혼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가 옥중에서 자기 조카의 결혼 축하를 위해 쓴 편지에서 결혼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간결하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써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인류를 영속시킬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네사랑은 네 자신의 소유물이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란다.”  Bonhoeffer의 말대로 결혼이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라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만약 결혼의 존엄성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담이 상대할 사람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이 불충분하고 부족한 상황으로 간주하신 것으로 여기서 ‘좋지 못하니’ 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이 그와 같은 상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일반 규칙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이 동반자의 관계는 결혼의 본질로서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돕는 배필 혹은 배우자인 그와 ‘한 몸’을 이루어 이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고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창 1:28).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반자인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좋지 못하니’라고 평한 남자의 독신 상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들이었고(창 2:19), 그러나 아담은 그것들에게서 외로움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적합한 동반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동반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을 원료로 사용하셨지만(창 2:7),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의 신체 여러 부위 가운데 심장에 가까이 위치한 갈빗대를 취했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서로 간의 인격에 있어 동등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 즉 성(性)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 됨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자의 성(性)에서 여자의 성(性)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안에는 본능적으로 서로 하나 되고 싶은 성적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를 볼 때 ‘이는 내 빼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고백을 한 것이고 그 결과 생겨난 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제도입니다(창 2:24).

 

이렇게 결혼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평가에서 나온 것이지만(창 2:18), 하나님은 몇몇 사람에게 친히 세운 규칙에서 예외를 두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독신의 은사를 주셔서 배우자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신 것이고(마 19:11-12), 사도 바울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고전 7:1)고 말한 적이 있듯이 비록 결혼이 하나님이 세우신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혼자 살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셨지만 이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독신을 강조하셨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까’라고 물을 때(마 19:10),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9:11), 이 대답에서 창세기 2장18절과 24절에서 주신 규칙에 예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관해서는 특별한 교훈을 하거나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 선포한 규칙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라는 말씀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다른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는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들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명령하셨는데(렘 16:2),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 바울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고전 7:7), 이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사는 것이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딤전 5:14).  물론 이들이 독신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았지만 만약 당시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렘 15장), 임박한 환난(고전 7:26, 29)이 없었다면 이들에게 독신의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결혼을 하도록 촉구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18절의 일반 규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예외는 특별한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정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고(고전 7:9), 반면에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데(고전 7:7), 만약 전자에 속한 사람이 일부러 결혼을 피하거나 후자에 속한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최선으로 행하시고(롬 11:29), 각 사람에게 무용한 은사를 한 번도 주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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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된 두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들이 Middle School 다닐 때부터 배우자를 놓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나의 배우자를 위해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20대 중반부터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결혼기도를 하는 가운데 가족과 지인을 통해 여러 번 선을 보거나 소개를 받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상대방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평생 동고동락할 확신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었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면서 한국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국제 청장년 금식기도회(지금은 전국 청장년 금식 대성회)를 해마다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보호식 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마음과 선한 눈을 가진 지금의 아내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후 세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고 주중 수요예배를 같이 드린 것이 전부였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전화와 편지를 통해 교제를 나누면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만난 지 사 개월 만에 양가 가족들이 모여 목사님의 주례를 통해 약혼식과 더불어 결혼식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20대 중반부터 시작한 결혼 기도가 30대 초반이 돼서야 응답되었지만 만약 결혼 기도를 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에 끌려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짝이 아닌 다른 짝을 만났다면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 요소로 만드셨고(창 2:18),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교회, 학교, 직장이 있기 전에 만든 제도이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결혼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막 12:25), 성경에 결혼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제시해 주셨습니다(마 19:4-6).  만일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뒤에 더 이상 결혼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규칙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지켜야 하며(창 2:20-24), 개인이나 국가조차도 어느 누가 결혼할 수 있고 어떤 근거 위에서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는 결혼에 대한 개인기록을 서류로 보관할 수는 있지만 결혼을 위한 어떤 규칙을 정할 권리나 권한은 없고 그 특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막 10:9).  사실 결혼은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출산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제도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출산을 결혼 안에서 그분의 의무로 수행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기는 했지만(창 1:28), 출산이 결혼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은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 이상이기에 결혼을 동물 짝지기로 혼동하지 말아야 하고 인류의 번성은 결혼의 하부 목적이지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6), 이렇게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서로 다른 특징을 주셨는데 남자는 보통 공격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에 의존하고, 여자는 직관과 기본적 신뢰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모습이고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요점은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그분의 상의한 측면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오는데(창 1:24-25),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몸’이라는 단어로 이 말의 의미는 결혼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결합, 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막 10:8), 이 결혼을 통해 두 가지 끈으로 결합되는데 하나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노라고 ‘언약’ 하는 것이고(창 2:24, 롬 7:2), 다른 하나는 영적결속을 이루는 ‘부부간의 성관계’입니다(히 13:4).  다시 말해 언약의 결속이 이루어지고 나서 두 사람의 몸과 혼과 영을 연합시키는 성적결속이 이루어져 그로써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5:31).  이 하나 됨에 대해 구약성서 신학자 Walter Brueggemann“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라고 주장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의 원래 목적은 부부간의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울처럼 보여주는데 있고 이 하나 됨을 이해할 때만 결혼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Tim Alan Gradner 역시 『Sacred Sex』에서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은 최초의 커플(아담과 하와)이 서로 나누고 즐기며 그들의 하나 됨을 축하하도록 특별하고 비범한 선물인 성행위를 주셨다. 또한 성행위는 거룩하다. 성행위를 안 남성과 여성의 온전한 연합에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이 말을 통해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면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엡 5:22-33), 결혼의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엡 5:23), 그런 복종이 학대를 자초한다고 믿는 여자들을 위해 이 원리를 오용하는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명령하시면서(엡 5:25-26), 창세기의 말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환언하면 결혼은 두 가지 결속을 만들어 주는데 하나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간의 헌신과 보살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건 없는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성적 친밀감을 누림으로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거룩한 행위라고 생각했고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평생을 사랑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를 만나야 하는데(창 24:67), 만약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삶에 있어 영적인 싸움은 매우 치열하게 일어날 것이고(엡 6:12), 부부간의 극복하기 힘든 위기가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같이 살고는 있지만 신자 안에 거하는 영(고전 6:19)과 불신자 안에 거하는 영(엡 2:2)이 서로 달라서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마 10:36).  물론 믿는 부부들도 살아가는데 있어 갈등과 어려운 위기가 닥치는 것은 사실이지만(롬 8:35), 이것은 얼마든지 두 사람이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고(요일 5:4), 말씀과 성령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롬 8: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반드시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창 24:3-4, 고전 7:39), 무엇보다도 기도 중에(창 24:63), 인내하며 기다리는 가운데(창 29:30),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야 되고(창 24:42-44), 상대방의 동의(창 24:8)와 부모의 뜻을 존중하면서(창 28:1-2),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롯 3:18).  그 이유는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제정하신 제도이고(창 2:18-25),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사 43:7, 고전 10:3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고(눅 11:28), 예수님도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에 대해 지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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