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감정론/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7.03.09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2. 2016.12.01 하나님을 향한 갈망
  3. 2016.07.14 신앙의 균형
  4. 2016.01.06 하나님을 두려워함
  5. 2015.09.30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6. 2015.06.10 성품의 변화
  7. 2015.02.18 참된 겸손
  8. 2014.12.10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9. 2014.10.22 하나님을 아는 지식
  10. 2014.09.03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11. 2014.07.23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12. 2014.06.11 성령의 내주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힌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


믿음의 신실성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데 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요구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악한 삶을 살면서도 또는 그들의 행위로는 전적인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도 신실함 마음이 있는 척하는 것은 극도로 터무니없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과 맞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죄의 길을 따라 살면서도 자신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자랑하거나 거룩한 삶과 실천이 없이도 죽은 뒤에 성도들과 같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심판자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실천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참된 은혜임을 보여 주는 최고의 증거라는 주장은 실천할 때 은혜가 온전해지고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서 온전케 된다(요일 2:4-5).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때 사도가 특별히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행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만큼 참된 은혜의 표지로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는 감정적 미덕이나 성향은 없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랑은 행함으로 또는 사랑의 행위로 행사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의 큰 증거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하여 느끼는 내면적인 감정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양심에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모든 표지 가운데서 가장 주된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큰 증거라는 점이다.  이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고,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상태가 분명해질 것이다.  장차 하나님께서 영원한 보응을 위해 사람을 심판하실 때 사람의 영적상태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헤아려 보고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선포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판이 더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의 양심과 세상에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래서 최후 대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이라고 불린다(롬 2:5).


거룩한 실천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는 근거가 된다거나

그것이 가치 있고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천이 믿음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로서

믿는 이의 신실함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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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 사이의 차이점은 크고 뚜렷하게 구분해 주는

또 하나의 다른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들이 더 높이 고양되면 될수록

영적인 만족을 위한 영혼의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들은 그 자체로도 만족해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본성이 어머니의 젖을 갈망하게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아이의 본성은 거룩하게 자라기를 갈망한다.  갓난아이의 건강 상태가 최상일 때 가장 강한 식욕이 생기는 것이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큰 영적 깨달음과 감정들을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더 성장하기 위해 은혜와 영적인 양식을 더욱 간절히 갈구하는 거지가 된다.


영적인 즐거움을 조금 경험한 사람은 어떤 다른 즐거움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에 온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된다.  영혼은 결코 물리거나 실증내지 않는다.  이런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같은 즐거움을 더 많이 갈구하게 된다.  영혼이 정적인 선을 경험하면 할수록 영혼은 영적인 선의 탁월하고 비할 데 없는 고상하고 만족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알게 되며, 영혼의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더 많은 영적인 선을 더 간절하게 갈구하고 갈망하게 된다.  따라서 영적인 감정들은 본질상 그 감정들이 크면 클수록 은혜와 거룩함을 더 많이 원하고 갈망하게 된다.


성도에게는 거룩하고자 하는 불타는 갈망이 있으며 이것은 생명력 있는 열기가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도에게는 거룩을 더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더 거룩하게 열망하고 갈증을 느끼는데 이것은 호흡이 살아 있는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거룩한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거룩 또는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고자 하는데 더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말씀으로 그들이 거룩하기 자라기 위해서이다.


위선자들은 깨달음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향력보다는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나타나는 것과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현재의 위로 때문에 깨달음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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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거짓된 감정들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그것들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성도들이 경험하는 미덕들과 은혜로운 감정들의 균형이 이 땅에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균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거나 말씀을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성적인 기질의 독특한 결점 때문이기도 하고, 교육의 결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 외에 다른 많은 약점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혜로운 감정들과 성도들이 가진 참된 믿음 사이가 소름끼칠 정도로 조화롭지 못한 경우는 결코 없다.  이런 부조화는 위선자들의 거짓된 믿음과 가식적인 은혜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성도들과 위선자들 사이에 있는 한 가지 큰 차이는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에는 특별하게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애통함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있다.  성도들은 처음 회심할 때도 죄를 슬퍼할 뿐 아니라 회심하여 그들의 기쁨이 자리 잡은 뒤에도 죄를 여전히 슬퍼한다.  성경은 참된 성도들을 죄를 애통해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애통해 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죄를 애통해 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거짓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을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히 있다.  하지만 참된 열심을 가진 사람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지배적이고 위험한 악을 대항하기 위해 적절하게 열심을 내지만 주로 그 열심을 자신의 죄와 싸우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악을 크게 혐오하는 척 하고 자신의 내적인 부패함에 대해 많이 울부짖는 척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며 죄를 짓지 않으려는 분투나 죄를 애통해하지도 않으면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마음과 삶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신앙적인 교제에 큰 열심을 내지만,

신앙의 골방에는 열심히 적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종종 감정적으로 높이 고양되지만,

그들이 단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대화할 때는 감화를 적게 받는다면

그들의 믿음은 매우 어두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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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온유한 마음을 동반하고 산출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 또는 경건한 슬픔으로 깨어진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경건한 슬픔은 약해진 살이 부드럽고 쉽게 상처가 나는 것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경건한 슬픔은 이기적인 원리에서 비롯되는 단지 율법적인 슬픔보다 더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데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구주께서 그런 사람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되었다.  어린 아이의 살은 매우 부드럽다.  또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의 마음도 매우 부드럽다.  이것은 선지자의 지시에 따라 요단강에서 씻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왕하 5:14).

 

어린 아이는 외부의 악한 일들이나 자기를 해치려고 위협하는 것이 나타나면 쉽게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도덕적인 악과 영혼을 해치려고 위협하는 것이 나타나면 쉽게 공포를 느낀다.  어린 아이는 위험한 장소에 있는 악을 쉽게 의심하며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 하고 혼자 남아 있거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신의 영적인 위험들을 쉽게 알아차리고 방심하지 않으며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 두려워하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참된 은혜는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키지 않고, 그것을 더 민감하게 해서 죄악된 것이 죄악 되다는 것을 더 쉽게 철저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죄의 가증스럽고 두려운 본질을 더 크게 깨닫게 하며 죄의 가증스럽고 두려운 본질을 더 빨리, 더 깊이 인식하게 하며 자신의 심령의 죄성과 악성을 더 확실하게 느끼게 한다.  그래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의 양심은 불에 덴 적이 있어서 불을 무서워하는 아이와 같다.

 

은혜는 영혼의 죄가 하나님의 뜻과 율법과 그분의 존귀하심을

얼마나 크게 거역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혐오하시며 불쾌하시는지를 깨닫게 하며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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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과 기질을 가지도록 돕고

그것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이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마 11:28-29).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 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영을 그들의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  그리스도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분명하고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심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내재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자신의 원수들이 가장 맹렬하고 터무니없고 사악하게 역사할 때,

그 사람이 이 모든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어린 양의 겸손과 평온과 양선

그리고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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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을

다른 감정들과 구별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회심하기 전에도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회심하게 되면 그는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과 본성 자체가 죄에서부터 돌아서서 거룩함으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는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죄와 원수가 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는 처음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면서도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과거에 그에게서 보였던 나쁜 성질들과 악한 습관들이 두드러지거나 뚜렷하게 변화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그가 익숙해 있었던 것과 그의 본능적인 성향에 지배를 받으며 비그리스도인과 같이 이기적이고 육욕적이며 어리석고 사악하고 향기가 없게 보인다면, 이것은 그가 체험한 일들이 굉장히 영광스럽다는 이야기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부정적인 증거다.

 

만일 그 사람에게 잠시 동안 매우 크고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가 지속적이지 않고 그가 과거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 간다면 그것은 본성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본성을 가진 돼지는 씻어 주어도 돼지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는 비둘기가 더럽혀질 수 있지만 그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비둘기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 안에 있는 죄스러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킨다.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사람을 입게 된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본성적 기질 때문에 특별히 음란이나 방탕이나 악의에 쉽게 기울어졌다면 은혜는 이런 악한 성향들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래서 여전히 그가 이런 죄들을 저지를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이 죄들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이 죄들이 자기 인격의 주된 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은혜를 받을 때 영원한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영혼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

성령은 영혼 밖에서만 거하시면서 영혼을 강압적으로 자극하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도록 영혼 안에 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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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

 

복음적인 겸손은 그리스도인 자신과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 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신앙고백을 하든 그들의 신앙 감정이 얼마나 높게 고양되었든지 간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합 2:4).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자기를 높이는 성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거의 이해할 수도 없다.  유대인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 의를 위해서나 영적 교만이라는 이 몰록(Moloch)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신앙고백자로 통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 훌륭한 신앙고백자로 인정하려 하지만 천국에서 가장 밝게 빛날 탁월한 겸손한 성도들은 결코 자기에 대해 떠벌리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떠벌리며 자랑하는 사람 가운데 탁월한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 없다고 믿는다.  참된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라고 더 쉽게 고백하고 모든 성도들의 업적과 체험이 자신들의 것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교만한 위선자는 자기 형제의 눈에 있는 교만한 티끌을 보는 데는 빠르지만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의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생활양식을 흠잡으면서 그들이 교만하다고 매우 자주 비난한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있는 더러움 보다 자기 이웃의 아주 사소한 결함 때문에 열 배 이상 쉽게 감정이 격화된다.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다(슥 13:4).  그리고 위선적인 유대인들이 그러했다(사 57:5).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다고 말씀하신다(마 6:16).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사람을 향한 것이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겸손한과 상한 심령의 사랑이다.

성도들의 갈망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겸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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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복음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견고하고 온전하며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확신한다.  그들은 두 가지 견해 사이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복음에 속한 위대한 가르침들은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복음에 있는 위대한 가르침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에 속한 위대한 가르침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감정으로 크게 고조되어서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의 진리성에 대해 과거에 확신한 것보다 더 크게 확신하며 살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  그들은 복음이 계시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들을 생생하게 확신하는 능력과 영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참되게 확신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영적이거나 중생하여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특유한 영적인 믿음이 있고 복음의 진리성을 확신하는 특별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원리로 그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달하신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는 확신은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갖는 그 확신에 따라 착한 일을 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자체의 질이 다르다.

 

성경에 계시된 이 모든 것들과 다른 많은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은

신적인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맛볼 때만 영혼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그것들은 영혼에 가려져 있어서 영혼은 그것들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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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전보다 신적인 이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하나님의 탁월한 본성과 놀라운 완전성을 새롭게 이해할 때 생기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탁월함과 충만함을 새롭게 생각하고 지성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에 속한 일들을 새롭게 알 때 생긴다.  이런 조명을 통해 성도는 과거에는 그에게 어리석게 보인 신적인 일들과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성경은 성도들만 특별히 알 수 있는 신적인 일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지식이 있다고 말씀한다.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알 수 없다.  이것은 확실히 신적인 일들을 알고 이해하며 인식하는 것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말씀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요일 3:6, 요삼 11, 요 6:40, 14:19, 17:3, 12:45, 마 11:27, 빌 3:8, 10).

 

그리고 영적인 본질과 종류에 있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는 지식과 완전히 다른 신령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성경은 영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신적인 지식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입증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 따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인 것의 본질과 종류를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영적인 지식은 일차적으로

신적인 일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또는 미각에 내재한다.

따라서 이런 감각에서 생긴 것이 아니거나

이런 미각이 없는 지식은 영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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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거룩한 감정들은 주로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달리 표현하면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들의 시작이며 원천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도덕적 속성이다.  다른 하나는 본성적인 속성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능력이나 지식들이다.  따라서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이중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덕적 또는 영적 형상으로 그분의 거룩하심 즉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을 닮은 형상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으로 사람의 이성과 지성, 자연적 능력과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들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이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는 것처럼 모든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성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성도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도의 거룩함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름답고 밝은 것은 그들이 마귀가 아닌 거룩한 천사이기 때문이다(단 4:13, 17, 23, 마 25:31, 막 8:38, 행 10:22, 계 14:10).  모든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가 탁월하고 아름다운 것은 기독교가 매우 거룩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탁월한 것은 말씀이 매우 거룩하기 때문이다(시 119:140).

 

다양한 피조물들의 본성은 자신들이 좋아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서 서로 다른 본성을 드러낸다.  참된 성도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도 그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룩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맛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거룩한 일들의 선함과 거룩함을 알 수 있다.  성도들에게는 초자연적인, 가장 고상하고 영적인 감각이 있는데 성도들은 이 감각으로 신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준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뻐하는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지,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은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들뿐만 아니라

이런 속성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아름다움은(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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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이 생기는 가장 객관적인 근거가

신적인 일들이 가장 탁월하고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는데 있어야지

그 일들이 자기 이익과 관련되었다는데 있어서는 안 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이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강하고도 습관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런 감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악인 가운데도 작용하는 원리이다(마 5:46, 눅 6:32).

 

그래서 사울은 종종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다윗에게 크게 감동했고 다윗에게 감사하면서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습적인 적개심이 여전히 있었다.  자연적인 본성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듯이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그와 같은 감정이 있을 수 있다.  자아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작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과 느부갓네살 왕과 홍해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경우가 그러했다.

 

반면에 참된 성도가 갖는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하나님이시며 그분 본성의 탁월함에 대한 사랑이 모든 감정의 원천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는 그분의 선하심에 감동되어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기초는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혜택이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유일하고 주된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있는 아름다움의 일부인 그분의 선하심이 그 주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참된 성도는

자신이 보는 바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사로 잡혀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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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그들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갖기 전에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신시키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려고 위로되는 성경 본문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즉 참된 신앙은 어떤 특별한 본문 말씀이 어떤 때에 하나님이 직접적인 능력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었다는 판단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떠오른 말씀은 완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할 때 사도가 뜻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양자의 영과 아들의 영으로서 인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를 대함과 같이 행동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영을 말씀하는데 하나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나 속박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인 아들의 영이나 양자의 영으로 사랑의 영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해주며 그분의 자녀로서 행동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증거는 어떤 속삭임이나 직접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이나 직접적인 계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은혜롭고 거룩한 영향을 주시는 것이며 자녀가 지녀야 할 성향과 기질을 주는 것이고 어린이 같은 달콤한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는 그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연합을 명백하게 보고 느낀다.  그것은 너무나 강하고 생생해서 그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마음속에 자녀의 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주입하고 심음으로써 증거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영 즉 우리의 양심은 즐겁게 이런 증거를 받아들이고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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