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6.02.27 현대판 바리새인
  2. 2016.02.24 Dwight L. Moody
  3. 2016.02.20 십자가란?
  4. 2016.02.17 즉각적인 순종
  5. 2016.02.13 예언이 중요한 이유
  6. 2016.02.10 이것이 교회다
  7. 2016.02.06 이혼이 허용되는 경우 2
  8. 2016.02.03 본질을 아는 것

만약 어느 목회자가 성경을 몇 백독 이상을 하면 굉장히 신령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사역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이름난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신학적 배경과 그 목사가 하는 말을 거의 진리인 것처럼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을 수 백독을 하거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명무실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고 개중에는 중생하지 못한 신학자/목사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평생 성경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요 5:39), 이들은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고(요 3:7-10), 성경을 곡해하고(마 15:9),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막 7:1-10),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 8:44).  성경 말씀대로 인용한다면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마 3:9),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요 3:3), 몸속에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적인 미움의 피가 흐르는(창 4:8), 독을 뿜은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마 23:33).  쉽게 말하면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거나 원어성경을 막힌 없이 좔좔 읽어 내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나 목사가 신학적인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Lloyd Jones는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예측했는지 자기 고향인 South Wales 지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개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위로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는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Iain H. Murray의 『Life of Martyn Lloyd Jones』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면 Lloyd Jones는 웨일즈가 낳은 복음전도자들인 Daniel Rowland, Howell Harris, William Williams, John Elias, 예를 들면서 이들이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신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행 4:13), 사도바울 빼놓고(행 22:3), 거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는 공식적인 훈련이나 사회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고전 1:26).  물론 주님께서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운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신 특별한 이유는 이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고(마 5:16),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배경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들을 택하신 것입니다(고전 1:29). 반면에 세상적인 지위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많고(마 23:2),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진리인 것 같이 어떤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사실 John MacArthur가 계획하고 준비한 Strange Fire Conference에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을 했는데, 여기서 Panel Q & A, Session One 시간에 나온 다섯 명의 목회자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목회에 성공(?)을 했거나 인기가 있는 목회자들이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어떤 신학적인 정의가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맹종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자 Todd Friel 로마 가톨릭교회로 인해 보름스 국회에서 문책을 당했던 Martin Luther를 예로 들면서 이 시간이 마치 그런 것 같다는 뉘앙스를 비추었는데, 솔직히 다섯 명의 목회자들이 한 시간 넘게 토론 하는 것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증거를 찾는 것처럼(마 26:59), 은사주의자들을 마녀 사냥하듯 몰아세우는 것을 볼 때 한편의 현대판 산헤드린 공회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다양한 주제(불, 기름부음, 영광, 예배, 찬양, 지배, 등등)를 가지고 논하였는데, 마치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거듭난 사람이 은사주의 운동에 2초 동안 머무를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재판장(하나님)의 입장에서 거리낌 없이 판단을 내리면서(약 4:11-12), 결론짓기를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이들이 진정한 복음을 듣기 전에는 이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이 고린도전서 15장1-4절의 말씀인데, 이 구절을 생각한다면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확신 있게 독사의 자식들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마 12:34).  만에 하나 은사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두 가지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와 ‘함부로 지껄인 모든 말’에 대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2:36).  만약 이들이 입에 파숫군을 세우지 않거나(시 141:3), 자갈을 먹이고(시 39:1), 지키지 않는다면(잠 13:3),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입니다(잠 18:21).  왜냐하면 입으로 내뺏은 모든 말은 심판의 근거가 되고, 그 말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정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마 12:37)에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Jonathan Edwards의 말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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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ight L. Moody

기도의 사람 2016. 2. 24. 15:29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 전도자인 Moody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9남매의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생계를 잇는데 급급하여 정기교육은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고,

구둣방 점원 노릇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강력한 권능을 부여받고,

엄청난 스케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비록 목사 안수조차 받지 못했지만,

이 평신도는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목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애정으로 청중을 대하고,

또 청중으로 하여금 그 영향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능력을 타고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그가 믿었던 그리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의 주제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삶에서 위대한 권능이 드러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데 있다.

그는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여호와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인생길에 놓인 온갖 어려움들을 기도로써 이긴 사람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에는 반드시 기도의 뒷받침이 있었다.

 

기도는 져야 할 짐이나 감당해야 할 지겨운 의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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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란?

십자가와 부활 2016. 2. 20. 15:29

아주 오랜 전 에콰도르(Ecuador)에서 다섯 명의 젊은 청년들이 와오라니 부족들에게 순교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자신의 귀한 생명을 대가로 지불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복음을 모르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이들에게 있어 십자가란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었기에 순교한 다섯 명의 선교사들 중 한 명의 미망인 Elizabeth Elliot는 『영광의 문』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다섯 남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다. 자신들이 아는 한 그들은 평범한 선교사였다. …결국 한 남자의 개인적인 선택은 중대한 고비에 이른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둔 평범한 보통 선교사들이 생사에 달린 결단에 직면했다. …하나님을 방패와 방벽으로 믿었던 그들이 왜 창에 찔려 죽도록 방치돼야 했을까? 우리 미망인들에게 그것은 매끄럽게 최종적으로 답해질 수 없는 문제였다. 1956년에도 그랬고 지금에도 잠잠해 진 것은 아니다.”  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안전을 고집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과 양립할 수 없다.”라고 썼는데, 그래서 십자가는 진리에 대한 공식적인 어떤 주장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산 체험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에(롬 5:8), 다섯 명의 선교사들처럼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한 것입니다(약 2:17).

 

성경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와 함께 ‘십자가 중심주의’가 복음주의를 검증할 수 있는 네 가지 독특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David Bebbington“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의 교리를 규정하고, 메시지(설교)를 지배하며, 헌신을 고취시키고, 선교의 동인됨으로써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이 되어왔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복음주의의 핵심은 Devek Tidball 박사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 20:28).  이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Charles Simeon은 그리스도의 속죄야말로 기독교 영성의 기초라고 주장했고, C. H. Spurgeon은 십자가는 우리 믿는 자녀들 세계의 중심이며, Campbell Morgan 역시 기독교의 모든 산 경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J. C. Ryle도 대리적인 대속이 없다면 기독교는 기름이 없는 등잔과 같다고 상기시켰습니다.  즉,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롬 5:8), 타락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며(고전 1:18), 악의 세력을 정복할 뿐 아니라(롬 6:6), 하나님 없이 사는 소망이 없는 자들을 그분과 화목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엡 2:12-16).  무엇보다도 십자가란 그리스도인의 삶이 개인이나 이기주의자로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엡 4:16), 몸의 지체인 형제들과 화목 된 관계를 맺으며(엡 2:16),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고전 12:21), 세상 욕심과 야망을 날마다 못 박는(갈 5:24), 다시 말해 옛 성품에 대해 죽고(고후 5:15), 그리스도 안에 다시 사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갈 2:20).

 

먼저 이 십자가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데, 성경에서 인간의 죽음은 절대로 무의미한 현상이 아니라(히 9:28), 오히려 죽음은 항상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엡 4:18).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히 하나의 개인적 사건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 관련된 것이기에(히 2:15), 성경은 창세기(창 2:17)부터 요한계시록(계 20:14)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별을 끊임없이 다루고 있는데, 한 마디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롬 6:23)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본성상(요 8:46), 그리고 행위상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히 4:15), 죽으실 필요가 없지만 그분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신(요 10:18),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마 20:28).  즉, 우리가 우리의 죄 값으로 마땅히 치려야 할 형벌로 인해(겔 18:4), 그분이 육체적 죽음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마 27:50),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끔찍한 어두움 속에서 지옥의 고통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맛보신 것이고(막 15:34),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단편적인 몇 몇 구절을 통해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상관 관계를 밝히는 성경전체의 맥락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버지의 사랑과 마귀의 증오, 그리고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여기서 단 하나의 뜻만이 효력을 발휘했는데(갈 1:4), 그것은 하나님의 뜻(마 18:14), 곧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눅 1:77).

 

이것이 성경에서 증거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이고(고전 1:23), 또한 십자가만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롬 1:16).  그러나 문제는 ‘십자가의 도’(고전 1:18)가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뿐더러(갈 3:13), 십자가가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걸림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바울도 고린도교인들에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유대인의 자기 의나 헬라인의 지성주의를 불쾌하게 만든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고(갈 5:11), 이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에(요 15:5), 죄인들은 십자가를 싫어(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 15:18-20).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한 것처럼(고전 2:2),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적 복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해가는 현대사회에 직면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람(죄인)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이 타락하고 패역한 시대에 바울과 같은 신앙고백을 듣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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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순종만이 올바른 순종이다.

머뭇거리며 순종하는 것은 불순종과 같다.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브라함이 행한 것처럼 ‘이 날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창 17:23).

 

그러나 우리는 임무를 자주 연기하며 즉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혀 행치 않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이며 불충분한 임무수행이다.

따라서 연기 되었던 임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행하는 모습 속에 그분의 완전한 축복이 깃들 것이다.

‘이 날에’는 창세기의 가르침이다.

 

-찰스 카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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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계시(예언)와 찬양과 방언을 할 만큼 영적인 은사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지만(고전 14:26), 종종 그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과는(고전 14:12), 무관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시에 예언을 하기도 하고(고전 14:31),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메시지를 전하였는데(고전 14:28), 한마디로 은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혜와 질서가 결여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4:4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고 어떻게 해야 공적인 모임에서 은사를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가르치기는 했는데(고전 12-14),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은사들을 추구하지 말라거나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고전 14:39), 오히려 이미 은사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에게(고전 1:6),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전 14:1).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 1439절을 KJV으로 보면 예언의 은사를 ‘갈망’(Covet)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갈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으로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너무나 갖고 싶어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예언이 중요한 몇 가지 이유 중에 첫 번째이고, 이 예언의 은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범주 안에서(고전 13: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언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시기 때문인데, 사실 하나님께서 AD 95년까지만 말씀하시고 그 이후로는 침묵하시고 계시다는 개혁주의 신학을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제일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문제가 잘 풀렸는데,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명백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해서는 성경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3-15).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개인적인 방향을 결정할 때에는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A B라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곳으로 갈 것인지 저 곳으로 갈 것인지?, “직장을 옮겨야 되는데 이 직장과 저 직장 중 어느 곳을 택해야 하는지?” 등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에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2:13),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인데( 6:66-69),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려니 하는 추측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는 개인의 생각이나 정욕으로 행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4:13).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선한 뜻을 알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삼하 2:1), 그들의 발걸음을 환상( 18:9), ( 2:13),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예언적인 꿈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혹시 잘못되거나 미혹되지는 않을까 생각해서이지만( 24:11), 성경을 보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가장 흔한 방법 중에 하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첫 두 장만 봐도 하나님은 예언적인 꿈을 통해 다섯 번이나 방향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1:20, 2:12, 13, 19, 22).  무엇보다도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슨 특별한 공식에 의지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상담을 통해 방주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었고( 6:13-22),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경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1:2), 바울이 사도의 사명을 발견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해 얻은 것은 아닙니다( 9:3-7).  한마디로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13:8), 자기 자녀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10:27),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3:15), 바리새인처럼 불순종하고 마음이 완악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5:37).

 

예언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예언은 진리를 전달할 뿐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에스겔은 마른 뼈의 환상을 보고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예언을 하자 뼈들이 서로 맞춰지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37:7-10).  이것은 예언이 단지 깨달음과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생명과 능력이 풀어 놓아지고 처해진 상황에 엄청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예언을 지도했으며(딤전 1:18-19),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수나 삶의 환경들과 싸우기 위해 예언의 말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그 예를 구약성경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람 왕의 침략으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레위사람 하시엘에게 임하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예언하자 여호사밧은 그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받고 극적으로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쉽게 말하면 아람군대 앞에 울부짖고 두려워하고 전멸을 예상한 오합지졸과 같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시엘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용사들로 즉각 변화되어 노래를 부르며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대하 20:14-23).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언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Wayne A. Grudem은 “예언의 은사가 억제되거나 의심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기대를 유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은사에 대한 많은 잘못된 견해와 생각은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 예언을 하면 신경이 예민해져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잘못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벧후 2:1-3), 그래도 주님께서 바르게 쓰는 사역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도 기도할 때마다 기적이나 치유의 은사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온전하고( 4:12),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데( 5:18), 예언은 치유와 새롭게 되는 과정을 돕는 훌륭한 동반자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영을 소성시켜 주는 소중한 은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4:3).  따라서 예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이고(고전 14:1, 39), 성경은 이 은사에 대해 일시적이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폐하지 않으며(고전 13:10), 또한 멸시치 말고 그것을 자세히 분별하여 좋은 것으로 취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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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친교’이다.

그 외의 대답으로는 ‘훌륭한 설교’, ‘음악’, ‘프로그램’,

‘자녀들을 위한 청소년 활동’, ‘편안한 마음’ 등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맥처치’(MaChuech) 심리이다.

오늘은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먹고, 

내일은 웬디스에서 ‘샐러드’를 즐긴다.

 

이처럼 교회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략해 버렸다.

현대인들은 교회와 목사를 자주 바꾼다.

심지어는 거래 은행이나 단골 식료품 가게를 갈아치우듯이

쉽게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 소비자들의 욕구는 여론 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에서 시행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미국인 중 56퍼센트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그 중 45퍼센트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26퍼센트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 결과 교리 문제는 그리 중요시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순수성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하고 실제적이 질문이며,

기독교 신앙이 형성된 이래로 계속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기준은 성경이 제공하고 있으며,

초기 교회의 신조들은 

그 성경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에서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이야기 하고 있다.

 

교회는 우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곧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곧 모든 교인은 의로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곧 그 범위가 우주적이다.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 

곧 사도들의 가르침에 뿌림을 두며 그 가르침들을 선포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적인 믿음에 일치하며 

교회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며,

제자훈련과 그 맡은 바 책임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주일 아침마다 친숙한 얼굴로 눈에 띄지 않게

교회 문을 슬그머니 들어오는 

세상의 문화적 가치와 관행의 교묘하면서도 점진적인 수용이다.

세상적인 타협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는 

언제나 복음의 날카로운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교회는 문화와 세대에 예민해야 한다.

복음 전도의 방법은 

상대방의 배경과 연령과 이해 수준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교회가 전도의 테크닉과 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진리를 변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과 그 역사적인 신앙고백 위에 서 있다.

성경과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는 교회는 

세상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언제나 세상의 반감을 샀다.

 

오늘날의 교회는 반감을 사는 대신,

거의 무의식중에 점차 세상적인 것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것, 

거의 의식할 수 없는 것부터 시작된다.

 

가령 죄와 회개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쳐 본 일이 없는 목사라든지,

성경에 나오는 날카로운 말씀의 칼날을 변질시켜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목사로부터,

‘풍성한 삶’이 곧 중상류층의 풍족한 생활을 의미하는 양, 

적당히 설교하는 목사들,

죄와 사악한 행동을 책망하기 꺼리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그 타협은 시작된다.

 

찰스 콜슨 『이것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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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혼생활 25년 동안 한 번도 싸움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참으로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 있어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 시점은 결혼한 지 한 십년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십 년간은 평온한 가운데 아내는 자녀들을 키우고 나 역시 공부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사느라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는데 결혼한 지 십년이 지나고 나서는 주기적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쌍방이 아닌 일방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논리정연하게 말을 하는 아내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기에 결국 마지막엔 큰 목소리로 집안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방적인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 아내와 달리 이혼에 대해 한두 번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이혼하고 혼자서 살까?”,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등등 쓸데없는 고민하면서 지내고 있을 때, 어느 날 하루는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걸어오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당시 이것이 주님의 음성인지 깨닫지 못했지만 마음에 이런 감동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네 아내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너에게 있어서는 천사와 같다.”  주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신 것은 짧은 메시지였지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네가 지금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는 아느냐 마음이 아름다운 아내 만난 것을 감사하라.”  한 마디로 “네 주제를 알라.”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이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라면(창 2:24), 이혼은 두 당사자가 서로에게 동반자의 관계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언약을 깨트리거나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혼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습니다(말 2:16).  사실 오늘날 교회는 이혼을 악으로 여기면서도 이혼에 대해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입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면, 먼저 이혼은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늘 있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이혼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견해인데, 이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가톨릭에서는 결혼생활 본연의 존엄성과 성스러운 가치에 의한 불가 해소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죽음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결혼이 해체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즉, 피해 당사자가 이혼해야할 법적인 이유(간음 또는 유기 등)가 확실하게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견해와 마지막으로 결혼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어 있거나 아니면 다양한 이유(신체적/정신적/언어적 폭력, 마약/술/성/도박 중독 등등)로 이혼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실 세 가지 입장은 결국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 부류는 결혼 언약은 부부가 서로에게 한 충성서약이기 때문에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언약도 결혼 당사자의 여러 가지 이유에 따라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정에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부부가 믿음으로 잘 극복만 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이혼을 생각하거나 또는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행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그리스도인 삶의 기준선이고(딤후 3:16),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께서 맺어준 배우자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신자가 믿는 배우자와 이혼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적인 죄로서 ‘음행한 이유 없이’(마 5:32), ‘음행한 연고 없이’(마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말은 매우 포괄적인 용어로 결혼을 해치는 모든 성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우자에 대한 불성실한 행위, 즉 결혼에 대하여 부부 일방의 부정을 말하는데 한 마디로 부부 관계 속에 제 삼자를 끌어 들여 동반자 관계 언약을 파괴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음행은 남편과 아내와의 항구적인 결합(결혼)을 정면으로 파괴하고 침소를 더럽히는 행위라는 것입니다(히 13:4).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24장5항에 보면 “약혼한 후에 범한 간음이나 음행이 결혼 전에 발견되면 그것은 순결한 편에서 약혼을 파기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준다. 만약 결혼한 후에 간음한 사실이 있을 때 순결한 편이 상대편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혼소송을 하고 이혼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이것은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에는 이혼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인데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교회가 지중해 지역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의 회심자들이 생겨났고, 이때 상대 배우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구원받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부부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가정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신앙의 문제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사실 믿는 자들의 이혼 문제는 두 당사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딤후 3:15)과 성령(고전 6:19)이 있고, 주님께 순종할 기본적인 헌신이 있기 때문에(롬 6:17), 소망이 있는 가운데(롬 8:24), 화해를 주장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히 12:14).  그리고 어느 한쪽 혹은 둘 다 문제 다루기를 거부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가동할 수 있는 교회의 징계과정이 있지만(마 18:15), 반면 불신자와 이혼을 생각하는 신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믿는 자에게 어떤 경우에든 믿지 않는 자와 이혼하면 안 된다고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기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 것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7:13).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문제로 더 이상 믿는 배우자와 같이 살기를 거부한다면 바울은 ‘갈리게 하라’고 말합니다(고전 7:15).  쉽게 말하면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믿는 배우자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신자 남편이 믿는 아내에게 이혼을 하고 요구하는데 아내는 이혼이 주님의 자녀로서 덕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생활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면 아마 그 생활은 평생 고통스러운 삶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 남편에게서 결혼을 유지할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아내가 그와 같이 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닌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성도를 화평 가운데 부르셨기에(고전 7:15), 만약 주님의 자녀가 불신자 배우자와의 신앙문제로 결혼생활이 고통에 빠지게 된다면 이혼하고 화평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신 배우자가 결혼을 유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이혼하기를 바랄 경우 믿는 배우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갈라서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하고, 자신을 버리기 원하는 불신 배우자의 뜻을 받아들여 이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자에게 있어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계속해서 살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은 불신 배우자를 ‘버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고전 7:12-13).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조금 지겹고 보기 싫더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살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버리고 떠날 때까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 배우자가 떠나도록 믿는 배우자가 문제를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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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 세 가지는

당신이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데 있어

특별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항상 최선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항상 당신과 당신을 불러내신 세상을 위한

최선의 길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옳은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말입니다.

그분의 인도는 항상 옳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의 능력, 힘 또는 자원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셔서 하라고 하신 일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당신에게 능력을 주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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