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3.28 사도의 특징과 표징
  2. 2015.03.25 양심
  3. 2015.03.21 분별할 수 있는 능력 2
  4. 2015.03.18 중요성
  5. 2015.03.11 반드시 가져야 할 각오
  6. 2015.03.07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7. 2015.03.04 말씀의 손 예화

A. B. Bruce는『열 두 제자 훈련』에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들어 열매를 남긴 위대한 사역자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고난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세상의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도덕적 위대함과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대가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신 특권 중 하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필수적이고(요 15:18-20),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 16:1-3).  그리고 사도 바울이 쓴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도에게는 ‘특징’과 ‘표징’들이 있는데(마 10:1, 막 6:7, 행 2:43, 5:12, 6:6, 8:14-17, 19:6, 고전 12:12), 이러한 특징과 표징들은 다른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사도는 아니지만 소유할 수 있으며 만약 사도라고 하면서 이런 특징과 표징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후 11장).  따라서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어떤 일반적인 특별한 특징과 표징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데(눅 9:1-11),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도(계 2:2), 이러한 특징이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도의 표징들에 대해(행 5:12), 바울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표징은 사도의 ‘고난’으로(고전 4:9-13, 고후 4:7-12), 이 고난당하는 목적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고후 6:3-10), 그 어느 누구도 질그릇 같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하여(딤후 2:20-21),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해받는 것과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고후 12:7).  다시 말해 이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위대함을 통해(벧후 1:16-18), 사람들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행 3:12), 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사도들이 단지 인간이고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따르면(행 14:22), 고난과 박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도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고후 11:23-33),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참 사도로서 고난의 흔적이 없거나 사람들을 통해 대접 받기만을 좋아한다면 사도라는 말을 삼가 해야 하고(갈 6:17), 성경에 보면 죽을 것 같은 고난을(고후 1:8-9), 사도들은 누구나 경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요 21:18).

 

두 번째 표징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엡 3:1-6)과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이스라엘 회심에 대한 비밀’(롬 11:25-32)을 보는 거룩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바울은 그가 사람들에게는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들었다고 말합니다(고후 12:1-4, 7).  세 번째 표징은 사도의 흠 없는 ‘성결성’이고(고후 1:12, 2:17, 4:2), 네 번째 표징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표적’과 ‘기사’들이 따랐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것임을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고(눅 24:49, 행 1:8), 이것은 열두 명(행 2:43, 5:12)과 이후에 나온 사도들의 사역에도 가득했습니다(행 14:3, 15:12, 롬 15:19, 고후 12:12).  물론 표적과 기사는 사도 사역의 표징이지만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도 그러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막 16:17-20).  마지막으로 사도의 권위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과 모든 질병을 물리칠 권위가 주어졌는데(마 10:1, 막 3:15, 6:7, 눅 9:1), 이 권위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실 때 그 권위가 그들에게도 주어졌고(눅 10:19), 마가복음 9장38-41절에 언급된 익명의 사람에게도 분명히 귀신들을 꾸짖고 물리칠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위에 열거한 사도적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직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이상의 것들이 참된 사도들의 표징이었다면 그것을 모방한 거짓사도들이(계 2:2), 초대교회처럼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는 한 가지 매우 단순한 방법은 참된 사도는 건전한 성경적 기초,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 새 일을 개척해 나가고 삶의 열매가 있으며(마 7:20),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2:20), 반면에 거짓사도는 분열, 분쟁,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어지럽게 만듭니다(딤전 4:1-3).  Gordon Lindsay는 참된 사도사역에 대해 『Apostles, Prophets and Governments』에서 “진정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겸손함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임을 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하는 역사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의 직임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도 사도의 사역을 행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사도의 사역을 행하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됨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John Eckhardt 역시 『The Ministry Anointing of the Apostle』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면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 은사가 분명히 나타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된 사도는 다른 사역의 은사들 위에 군림을 하지 않을뿐더러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검증된 다른 복음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복종시키는데(갈 2:1-2),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행 9:26), 적어도 17년 이상 사역에 몸담아 오고 있었습니다(갈 1:18, 2:1).  쉽게 말하면 바울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회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전파한 것에 대해 여전히 명성 있고 견고한 믿음의 사역자들과 의논하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갈 2:2).  만일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검증받고자 사역자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면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 말씀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롬 14:4),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인데(고전 14:29), 만약에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거짓사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갈 1:12), 사도로서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올바르고 성경적으로 건전한가를 판단받기 원했던 것이고(행 17:11), 그것이 바울이 사역에 오래 몸담아 옴으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나누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자신들을 은사중단론자로 여겨 1세기 교회 가운데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 사용이 중단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사도를 속사도시대의 직임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문용어로 보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 사도적 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사도 직함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초대교회의 근간을 이룬 사도직임은 종료되었지만 사도의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여전히 계속 부어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도에 대해 많은 논쟁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거짓사도가 있었다는 것은(고후 11:13-14), 오늘날도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사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롬 11:13, 고전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의 명칭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나타나는 ‘표징’과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면서 위에 열거한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칭 사도’일 수밖에 없고(계 2:2), 그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7:15-18).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엡 4:11-12), 그렇다고 아무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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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평신도 훈련/묵상 2015. 3. 25. 11:59

일본의 신학자 하천풍언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이러한 질문을 언제까지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면 실물을 보여주시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청년도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간절한지 몰라도

발견하는 방법이 어그러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직접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다.

예수님이 믿은 하나님은 우주의 다 한 분밖에 없는 영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은

이 육안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종교적 진실이다.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마음에 느껴온다.

 

전선에 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를 알려면

소켓에 손을 대어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소켓에서 하나님을 전기처럼 느낄 수가 있는데,

이는 양심이다.

양심에 하나님의 능력이 짜릿하게 통해온다.

 

어떤 이는 “나는 조금도 양심에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퓨즈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양심 소켓에 하나님의 음성이 통하는 퓨즈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의 퓨즈가 끊어지지 않은 양심 소켓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알만한 충분한 근거를 이미 보이셨다(롬 1:19).

 

-우찌무라 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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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행이 얼굴은 물론, 머리 모양과 옷 모양, 그리고 얼굴 화장과 말투와 행동까지 엇비슷하여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쉽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눈으로 보이는 육적 존재가 이러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잘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와 가짜를 쉽게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5:11-14).  예수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셨고( 24:5), 사도 바울도 사단이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는데(고후 11:14), 사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이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고(딤전 4:1), 특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초자연적인 현상들, 즉 ‘선’을 가장한 ‘악’을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동일한 기적과 이적 현상들을 놓고 보는 시각에 따라 ‘사단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과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 즉 ‘영들 분별함’이 없이(고전 12:10),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좁은 신학적 지식과 신앙, 그리고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는 영분별이 요구되는 분야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많은 상황들은( 6:10-13), 그렇게 분명하게 흑백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무엇인가 확실하게 올바른 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고 과정들 가운데 성령의 다스림( 8:14-16)과 지도하심이 요구되는(고전 2:10-13),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에 대해 개발하도록 격려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은사를 개발한다는 말에 오해 없기를), 이 은사가 비은사주의자들,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강단에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탁한 세상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4:11-16), 반드시 영분별의 은사가 꼭 필요한 은사이고,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방해하는 악한 영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판별해 낼 수 있고( 5:1-10), 어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 바리새인처럼 싸잡아서 매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12:22-37),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부터 나온 것인지( 11:20), 아니면 개인의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8:9-11), 또는 귀신들의 역사인지를( 16:16-18), 확실하게 분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The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의 한 사람인 Petrus Octavianus가 독일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 말씀을 증거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에 어떤 한 사람이 일어나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Octavianus는 그 사람을 향해 조용히 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후에 그는 동료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영분별을 위해 주님께 기도한 후 그 사람의 방언 기도가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다”  이 사건은 『Occult ABC』의 저자이며 수십 년 간 축귀사역을 감당했던 Kurt E. Koch 박사가 쓴 『Charismatic Gift』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Octavianus에게 긴급 상황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임무중 하나인 거짓은사를 방지할 영분별의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강신술사였던 Raphael Gasson 역시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모방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단이 어떻게 자신에게 예언하는 힘을 주는지를 회상하면서, 대부분의 거짓 예언과 영분별의 은사에 대한 거짓 모방은 일종의 ‘투시력’이나 ‘투청력’,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까지 마귀에 의해 교묘하게 모방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영분별의 은사는 사모해야 할 은사이고(고전 14;1), 물론 그 은사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고전 12:29-30), 초자연적 존재이며 엄청난 세력을 가진 사단과의 전쟁에 있어( 6:10-13),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모든 교회에게( 20:28), 필요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무엇보다 영분별의 은사가 다른 모든 은사에게 필요한 이유는 방언에는(고전 12:10), 마귀가 주는 방언과 심리적으로 유발된 방언,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있고, 예언에도(고전 12:10), 예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9:1, 삼상 10:18),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인지( 13:17, 23:26), 또는 귀신의 역사인지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23:13).  이렇듯 영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와(고전 12:4-11), 악령의 역사를(삼상 28:3-20), 구별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은사들을 대할 때 그 출처가 성령을 통해서인지 악령을 통해서인지 혹은 인간의 심리나 최면인지를 구별하여 내는데, 이것은 배워서 익힌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고전 12:11), 그 시에 테스트 없이 직감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영분별의 은사’는 오늘날처럼 거짓교리와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 귀신의 역사가 판을 치는 혼탁한 현대 교회에 꼭 필요한 은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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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

진리의 성령 2015. 3. 18. 10:23

평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에 관해 아는 바가 지극히 적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뭔가를 말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 '진리의 성령'(요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장까지 '하나님의 성령'(엡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고, 성경 말씀 어느 곳에서나 '생명의 성령'(롬 8:2)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의 성령'(엡 1:13)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원하신 성령'(히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난 성령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령'(마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하고,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 합니다(눅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나는데, 오순절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에 대해 수천 명에게 말씀을 선포했고(행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삼위의 삼위를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이 '양자의 영'(롬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확신을 시켜주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보혜사'(요 14:1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살면서 말씀을 배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4:49).  '은혜의 성령'(히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에게 '예수의 영'(행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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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격과 삶의 변화를 목표로 삼으십시오.

제자훈련의 목표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제자훈련의 목표는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정보(Information)를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제자훈련이 단지 머리 속의 지식만(Head knowledge)을 위한 것이라면, 그 지식은 머지않아 죽은 지식(Dead knowledge)이 되고 말 것입니다.

 

2.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할까요?  먼저 변화되어야 할 영역이 무엇인지 깨달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삶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즉 그 원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분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순종해야만 변화가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인격과 삶은 깨닫고 순종한 만큼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3. 반드시 시험을 받게 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제자훈련은 결코 순탄한 과정이 아닙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좋은 날씨와 궂은 날씨가 있듯이 제자훈련도중에도 여러 가지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문제로, 훈련생들 간의 관계적인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여러분은 도전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는 바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될 것임을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이 배우는 진리가 증명되고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되는 기회임을 기억하십시오.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험을 뛰어넘는 믿음을 키우십시오.

 

4. 건강한 소그룹리더십을 계발하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제자훈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평신도 지도자로 세움 받기 위한 제자훈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제자훈련 소그룹은 여러분에게 소그룹을 이끌어가는 원리와 방법을 가르쳐주게 될 것입니다.  단지 훈련생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도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십을 계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이 구원 받았던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필요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제자훈련이 얼마만큼 성공하느냐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기억하시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보좌를 향한 여러분의 손을 결코 내리지 마십시오.  제자훈련의 축복은 여러분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났을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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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위치가 높거나 입장이 유리한 사람에게 ‘갑질’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명 중에 9명이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지식사전에 의하면 ‘갑질’이란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단어로 권력이나 권리관계, 다시 말해 상대적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영어로 표현하면 “boss (someone) around”, 즉 우두머리처럼 누구한데 이래라저래라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면서 메뉴에 왜 죽이 없냐는 불평부터 밥이 설익고 라면도 설익었다고 짜증부리며 가지고 있던 책으로 승무원을 때린 ‘라면상무’나 얼마 전 큰 이슈가 되었던 항공기불법 회항사건은 많은 여론과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일단락되었지만, 이러한 갑질의 행동은 비단 불신자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그리스도인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본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 넘는다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갑의 행포란 어느 곳에서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의 갑질의 행동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한 가지만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성경말씀을 조금 안다고 ‘갑질’(?)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좋지 못한 공통점은 신학/교단/교파 정신에 매여 있어(세뇌당한 표현이 더 좋을지 모르겠지만) 목적을 읽어버린 채 ‘종교재판’(宗敎裁判)/‘이단 심문’(Inquisition)을 하듯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맞지 않으면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얼마 전 어떤 인터넷 신문에서 자칭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가 무슨 계기가 생겨 상대방 목사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신원조회를 하듯 무례하게 물어보면서 거의 공갈과 협박을 하는 글을 읽어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전과는 달리 전화나 이메일 그리고 SNS에서 주고받는 모든 것들이 기록으로 남는 세상이고 심지어 IP주소를 통해 어디서 접속을 했는지 훤히 아는데 목회자라는 사람이 다른 목사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의심이 들지만 사실 이런 사람 때문에 목사라는 직분이 믿음이 약한 사람 특히 불신자들로 하여금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불신자보다 못한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교단신학에 철저하게 얽매여 좁은 시각으로 자신만이 가진 신앙이 성경에 가장 근접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비판의 칼을 가지고 휘둘러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단들과 싸우면 되는데 문제는 영성이 있는 목회자들까지도 이단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교조주의적인 태도나 편협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도 문제이지만 어떤 사람 중에는 신학을 정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이단을 연구하거나 세미나 강사 노릇을 하면서 어떤 교회나 목회자를 놓고 재판장의 입장에서 서서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데 마치 종교시대 때 마녀사냥을 하듯 이들이 덕스럽지 못한 행동,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신병 수준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학을 한 사람은 자신이 배운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배워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올바른 해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허접하고 균형 잡히지 않은 반쪽짜리 성경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향해 서슴없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 그리고 신학적 편견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누구에게나 부어지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고(행 2:16-18), 이들의 독선적인 주장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교리로 인한 싸움과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약 3:13-16),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마 7:20),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바리새인처럼 트집 잡기를 좋아하고(눅 11:54), 비판의 영을 가진 완악한 불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갑질 횡포’는 교회 역사에서도 나오는데 제네바 시의회에서 Calvin에게 직위(성경학 교수)를 부여했을 때 그는 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영적기준에 미흡한 자들에게 보다 엄한 치리를 시행할 것과 심지어 교회에서의 출교와 성만찬 참여금지 조치까지 불사하였는데, 아마 Calvin이 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겪었던 대표적인 논쟁은 아가서가 외설스럽기 때문에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Sebastian. Castellio와 예정설을 놓고 논쟁을 벌인 Jerome H. Bolsec, 그리고 가장 곤욕스러웠던 것은 의사출신이며 『기독교강요』에 대한 답변으로 『기독교 원상회복』을 쓴 Michael Servetus를 들 수 있는데 칼빈은 Servetus가 교리적으로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화형을 해서 죽였습니다.  여기서 Calvin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가톨릭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였던 종교재판에 의한 사형 제도를 용인한 것인데 물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키려는 열심이 이를 용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혁을 빌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마 5:21-22).  사실 Calvin에게 있어 좋은 것은 배워야 하겠지만 자신의 신앙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가혹한 권징이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며(롬 13:9-10), 무엇보다도 자신만이 습득한 관점에 대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비판하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영혼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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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4과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에서 훈련생들은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과 성경의 기능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우리의 신앙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한다는 사실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배움과 깨달음은 당연히 말씀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씀의 손 예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법에 대해 간략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1권 4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말씀의 손 예화에서는 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네 손가락은 네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 즉 듣기, 읽기, 공부, 암송을 보여 주며, 성경의 가르침들을 일상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는 묵상은 엄지손가락에 해당된다.  이 예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균형 있게 섭취할 수 있는가를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이 다섯 가지 방법은 하나하나가 모두 다 중요하다.

 

듣기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듣는 일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점은 보통 설교자가 분당 약 125단어를 말할 수 있는 반면, 우리 머리는 분당 약 1,000단어 이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할 정신적 에너지의 90%는 사용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안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는 기록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설교자보다 한 걸음 앞서 생각하고 다음에는 설교자가 실제로 하는 말을 들어 보는 것이다.  계속해서 생각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듣는 방법이다.

 

읽기 - 효과적이고 즐거운 성경읽기를 위한 지침

성경을 읽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자세가 요구된다.  성경 읽기의 목표는 즐거움과 새로운 힘을 얻는데 있는 반면, 성경 공부는 확신을 높이고 구체적인 적용을 하는데 있다.  성경 읽기를 위한 도움이 될 만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고 대화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갖게 하며, 이를 통해 삶의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개인의 경건 생활뿐만 아니라, 소그룹에서의 나눔에도 큰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둘째는 집중적으로 읽는 것으로, 이러한 읽기의 목적은 성경의 어떤 장이나 책의 내용에 흠뻑 젖어 드는 데 있다.  성경의 한 권이나 한 장을 택하여 작정한 횟수만큼 되풀이 하여 직접 읽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읽기를 통해 개인 성경 공부를 위한 보다 깊은 준비를 할 수 있다.

 

공부 - 스스로의 탐구 : 효과적인 성경공부의 열쇠

성경공부를 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주어진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분석해야 한다.  첫째는 이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둘째는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인가, 셋째는 이 구절을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세 질문은 관찰, 해석, 적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경공부를 위한 실제적인 방법으로는 먼저 공부할 책을 전체적으로 통독하면서 저자의 목적과 해당 장이 전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는다. 둘째, 그 장의 성경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하면서 명령이나 약속, 교훈이 없는지 찾는다.  셋째, 다시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서 짧은 요약 혹은 개요를 작성한다.  넷째,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이 말을 하는 속뜻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해석한다.  다섯째,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적고, 그 가르침과 연관하여 나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적으면서 적용한다.

 

암송 - 성경 암송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중 하나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암송함으로써 균형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일을 계발시켜 나가야 한다.  성경 암송은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데도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묵상 - 성서적인 묵상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

말씀을 섭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방법인 듣기, 읽기, 공부, 암송이 있지만, 이 방법들이 묵상과 연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을 수가 없다.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분석하며, 단어들을 생각으로, 생각을 행동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는 우선 기도한 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주의를 기울인다.  중요한 것은 섭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섭취한 그것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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