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고(행 19:1-2),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14:9), 만약 오늘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 속에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네가 죄로 인해 슬퍼할 때 위로하며 기도할 때 네 연약함을 도와주고 진리의 말씀에서 나오는 비밀스러운 것을 깨닫게 해주었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증언(요일 5:7)을 분간하는 데에 있어 오늘날 교회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교사로서(롬 8:16), 성령이 임재 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Adolph Saphir 박사는 『Christ Crucified』에서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의 능력이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한 마디로 제삼위의 위격이신 성령의 사역(마 12:28)과 내주하심(요 3:3-5)에 대한 자각이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막 16:17-20).

 

그러나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패러다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성령께서 행하시는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훈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은혜스럽지 않는 비신앙적이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통교회 목회자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역과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은 담임목사로부터 주로 듣는 것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하라는 것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할례 받지 못한 책(?), 주로 성령의 은사들과 영성훈련에 관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 거의 부정적인 반응이나 심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데 실은 이러한 반응들은 그 책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모두가 경험하였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여러 번 성경말씀을 읽으며(딤전 4:13),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를 받거나 아니면 하늘나라 상급을 많이 쌓기 위해 전도해야 한다는 소리를 목사나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수도 없이 많이 듣기만 했지(마 28:19-20), 다양한 영성훈련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대교회의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인 니고데모가 나오는데(요 3:10), 그에게 있어 한 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로(요 3:4), 당시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요 3:5-8), 그는 교리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유대의 한 종파인(행 15:5), 바리새파 사람으로(요 3:1), 전통을 중시하고(마 15:1-3), 외부적 시행세칙들에 주의를 기울이며(마 23:23),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엄수하면서(마 23:2),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요 9:22),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전통과 제도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교단/교파/교리’라는 틀 안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신학자/목사였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행 26:5), 남들이 알아주는 탁월한(?)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반복적으로 계속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요 3:5).  그리고 주님께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반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초자연적인 일들이 그에게 얼토당토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사실 바람은 그 누구도 통제하거나 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바람을 길들이거나 그 바람의 활동영역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 같이(행 2;2),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람’은 성령의 예상할 수 없는 행로를 말해주는 것으로 그분의 불가해한 기원을 의미하고 또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는 교회와 개인에게 나타날 때 그 현상을 보거나 느끼거나 감지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행 2:1-4).  이러한 성령의 바람은 신학자/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학적으로 요구되는 곳이나 제도적인 종교 안에는 불어오지 않고 인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찾아오는데, 예를 든다면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마 1:18), ‘진리의 영’(요 16:13), ‘예수의 영’(행 16:7), ‘그리스도의 영’(롬 8:9),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의 작품으로 인간의 편견과 상식을 무안하게 만들어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다루기 힘든 ‘바람’을 니고데모처럼 중생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고전 2:14), ‘교리’라는 박스 안에 가두어 길들이려고 하거나 혹은 교회전통과 제도로 철저히 제한하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치유, 예언, 방언, 방언 통역, 영들 분별, 지식의 말씀)를 합리화하며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비신화화하려고 애쓰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완고한 교리/교조주의를 뒤집어엎고 지금도 여전히 어떤 제도나 전통에 얽매이는 것 없이 임의로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