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5.02.25 기독교의 기본 진리
  2. 2015.02.21 가톨릭은 이단인가? 8
  3. 2015.02.18 참된 겸손
  4. 2015.02.14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
  5. 2015.02.07 동성애는 성경에 위배되는가?
  6. 2015.02.04 코나열방대학

구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 사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다음,

점진적으로 자기중심이라는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얻었으나

성령을 통해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무에 맺히는 열매의 질은

그 나무의 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르치셨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들의 연속이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고치려면 

먼저 본성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무를 좋게 하라 

그러면 그 열매가 좋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마 12:33, NIV 직역).

 

그렇지만 인간의 본성이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심술궂은 사람을 상냥하게,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이기적인 사람을 비이기적이게 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성경은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복음의 영광이 하는 일이다.

니고데모를 당황하게 하였던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3,7).

 

이 엄청난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새로운 출생(신생, 중생, 거듭남이라고도 한다)은 

위로부터의 출생이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나야 한다.

예수님은 죽기 직전 다락방에서 열 두 제자와 모였을 때,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에 오실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실제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보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더 유리했다.

유리한 점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그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with)있을 뿐이지만,

“저(성령)는 … 너희 속에(in)”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17).

 

성령의 내주하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득권이다.

만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 8:9).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죄 지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갈등이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승리의 길이 열린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싸움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갈 5:17).

 

이는 무미건조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내리는 죄의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거룩으로 끌어올리는 반대 세력도 의식한다.

만일 육체의 고삐가 풀어지면,

우리는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악의 정글 속에 빠질 것이다.

반면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성령께서 가꾸시는 과수원으로 비유된다.

성령께서 나무를 좋게 하시게 하라.

그러면 그 열매도 좋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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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의사이자 음악인이며 아프리카 내전 국가인 남부 수단의 딩카족 마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백분 활용한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의사로서의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버리고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내전지역에 가서 10년간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도중 대장암 선고를 받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톨릭에서 또 한 분 있었는데 노벨 평화상을 받은 45년간 Kolkata, India에서 빈민과 병자, 그리고 고아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 Mother Teresa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인데 그녀가 죽었을 때 인도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사람 중에 한분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저널리스트 Christopher Eric Hitchens는 『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에서 Mother Teresa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는 성녀가 아닌 종교적인 사업가라고 혹평을 하고 가톨릭에 의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과 헌신 무엇보다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솔직히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톨릭 신자와 달리 얼마 전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수는 좋지만 기독인들은 싫다”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답을 했고,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Mahatma Gandhi“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비종교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가톨릭 그리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교로 기독교를 뽑았는데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이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타종교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랑한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다”,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교회건물에 집착한다”, 등등을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실 비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개신교보다는 타종교 특히 가톨릭을 더 선호하는 입장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인데 예를 들어 단군상을 부수거나 절간에 가서 기타 치며 찬송을 부르고 땅 밟는 행위 심지어 같은 교인끼리 교회건물 문제와 헌금문제 혹은 교파간의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볼 때 종교(기독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위선적이고 부정직하며 너무 모순된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이 가톨릭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가톨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사제들끼리 교회건물이나 헌금문제로 싸우거나 법정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가톨릭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높은 반면에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이 하늘을 찌르고 안티기독교인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언행 불일치’와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톨릭에서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고 예를 들어 권위의 문제에 있어 개신교는 성경만을 절대적 지침서로 사용하지만(딤후 3:15-17, 요한일서 5:13, 신 12:32),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구원에 있어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롬 3:24, 5:1, 10:9-10, 엡 2:8-9), 믿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신덕’(믿음)과 선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목회자 중에 어떤 이들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톨릭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이고(욘 2:9),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 7:21).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 55:8).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고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단이고 그들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나 많기 때문에(눅 13:22-27), 개신교가 정통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마 13:24-30), 가톨릭에 교리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딛 2:11).  그러기 때문에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구원의 문제를 놓고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하고(시 3:8), 특히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에 대해 눈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판하거나 적대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5).  잠언에 보면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고 하는데(잠 6:6), 하물며 타종교에서 모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면 비판적인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그들의 모범된 삶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기는 타종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성전을 찾은 세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고(눅 18:1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행실과 언행을 통해(벧전 3:16),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모독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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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

 

복음적인 겸손은 그리스도인 자신과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 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신앙고백을 하든 그들의 신앙 감정이 얼마나 높게 고양되었든지 간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합 2:4).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자기를 높이는 성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거의 이해할 수도 없다.  유대인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 의를 위해서나 영적 교만이라는 이 몰록(Moloch)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신앙고백자로 통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 훌륭한 신앙고백자로 인정하려 하지만 천국에서 가장 밝게 빛날 탁월한 겸손한 성도들은 결코 자기에 대해 떠벌리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떠벌리며 자랑하는 사람 가운데 탁월한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 없다고 믿는다.  참된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라고 더 쉽게 고백하고 모든 성도들의 업적과 체험이 자신들의 것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교만한 위선자는 자기 형제의 눈에 있는 교만한 티끌을 보는 데는 빠르지만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의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생활양식을 흠잡으면서 그들이 교만하다고 매우 자주 비난한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있는 더러움 보다 자기 이웃의 아주 사소한 결함 때문에 열 배 이상 쉽게 감정이 격화된다.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다(슥 13:4).  그리고 위선적인 유대인들이 그러했다(사 57:5).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다고 말씀하신다(마 6:16).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사람을 향한 것이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겸손한과 상한 심령의 사랑이다.

성도들의 갈망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겸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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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혀가 말리는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나서 자신의 의지로 절제하고 거부했을 때 혀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에 일어났던 현상이 아내에게 다시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내는 그때도 역시 놀라 기도하다가 말고 응접실로 뛰어나와 묻기를 혀가 자꾸 말리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주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기도할 때 혀에 너무 힘을 주고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한 번도 사모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고전 12:7).  아내는 그때 성령께서 주신 방언(고전 12:11)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방언을 하면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고전 14:28), 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볼 때(갈 5:22-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아내가 방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성경적이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방언을 점화시킨 것으로 보인 사건은 1900년 12월31일 Topeka, Kansas 신년 집회에서 시작되었는데 Stanley H. Frodsham의 『With Signs Following』에 의하면 벧엘 신학교 ‘기도의 탑’이라고 알려진 방에서 학생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세 시간씩 교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적)기도를 드렸고 이렇게 학생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방언을 통해 여러 학생들에게 임했고 그 후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Roger Stonstad는 『Spirit, Scripture and Theology』에서 당시 학생들이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부흥사로 활동했던 이 학교 교장인 Charles Fox Parham이 El Dorado Springs, Missouri에 이어 Houston, Texas에서 “성령이 가장 두드러진 해석, 신학과 변증”이라는 설교를 할 때 그곳에 참석했던 William J. Seymour는 Parham의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Los Angeles에 있는 Azusa 거리에서 1906년 4월9일 월요일, 자신과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버려진 감리교 교회에서 매일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Douglas J. Nleson은『The Black Face of Church Renewal』에서 그 결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하심과 같았다고 말하면서 2년 후인 1908년에 이 운동이 거의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순절교회의 탄생 과정은 아무런 반대가 없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Topeka의 운동과 Azusa의 부흥운동은 많은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의 의해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부되었고 일부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루터교회 안에서는 이 운동을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양분되었는데 특히 반대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마귀적이라고 비난하면서 1909년 오순절 부흥 운동을 반대하는 “베를린 선언문”(Declaration of Berlin)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던 독일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사라졌고 이렇게 조롱을 받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20세기에 들어와 오순절 지도자들 중에 한 사람인 Thomas F. Zimmerman과 오순절 운동의 대변인으로 평가받는 David J. Du Plessis에 의해 일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사귐을 갖게 되면서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통해 Van Nuy, California 성공회 사제인 Dennis Bennett으로 부터 시작된 제2의 물결인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 그리고 John Wimbur에 의해 일어나고 Peter Wagner가 명명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초교파적으로 확산된 제3의 ‘물결운동’(The Third Wave)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거나 칼빈주의 신학에 병적으로 집착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은사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사도시대 마지막에 중단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하겠지만 오늘날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자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 이상 방언만이 최고의 영성이거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고전 12:30),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는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행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는 없고(롬 1:16),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이지(고전 1:18), 어떤 특정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5:24).  물론 방언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개인의 경건생활, 즉 자기 덕을 세우는데 있어(고전 14:4), 방언만큼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금지해야 될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에 따라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고전 14:39).  그래서 우리는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영성의 전부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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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Newsweek의 커버스토리는 동성결혼의 성경적 근거를 다루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동성애가 가증스러운 죄라는 많은 성경구절들을 인용하지만 이들은 이웃사랑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무시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거부하고 증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기사화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구절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를 정죄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고대 유대사회의 규범에 다룬 특정 본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특히 레위기 20장13절에서 레즈비언의 행위에 대한 말씀이 없기 때문에 동성애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고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은 구약시대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W. Norman Pittenger 박사는 “기독교의 복음의 요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는데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마 11:28), 주님의 사랑이란 삭개오처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지(눅 19:1-10), 죄인지를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묵인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Erwin W. Lutz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사랑은 모든 악행을 정당화 해주는 면허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의 사건 속에서 오늘날 ‘동성간의 연애’(동성애)를 뜻하는 ‘소도미’(sodomy)라는 단어를 창세기 13장13절과 18장20절 그리고 19장25절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이 성경 기사의 배경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겠지만 문제는 확실하게 소돔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입장은 동성애는 성경적 규범에 반하는 것으로 소돔 사람들이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성연애의 죄악에 깊이 빠져 있어 롯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에게까지 그 혐오스러운 행위를 하려다가 심판을 받았다고 해석합니다(창 19:1-5).  물론 이런 해석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상관하리라’(5절)는 말은 “성관계를 가진다”(창 4:1)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두 명의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기 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구약성경에 히브리어 ‘야다’는 943회가 나오지만 육체적인 관계, 즉 성적인 교접을 의미하는 말은 10회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구절은 “우리가 그들을 그냥 알기 원한다”는 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소돔의 심판은 동성애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겔 16:49-50)과 교만과 위선(사 1:10), 그리고 간음과 거짓 때문이라고(렘 23:14), 말하면서 사회적인 무책임과 외지인에 대한 불친절 때문에 멸망당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해석들은 개연성은 있으나 이 일로 인해 소돔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 3장9절예레미야 23장14절 그리고 에스겔 16장46-59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더러운 음행을 소돔 지역의 퇴폐적인 성도덕과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사사기 19장22절에 나오는 기브아의 사건을 통해 그 어휘의 용례와 정황을 살펴볼 때에 당시 가나안 지방에서의 동성연애는 널리 퍼져있는 악습일 뿐 아니라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행위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레 18:12, 20:13), 소돔 사람들이 롯에게 요구하는 것이 분명 동성 강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창 19:5).  더 확실하게 성경의 글자와 문맥 그대로 소돔이 가증스러운 죄악, 즉 동성애를 통해 심판받은 것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 구절을 찾아본다면 아마 유다서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동성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은 없지만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창세기 2장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 이룰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계획은 동성간의 결혼이 아닌 이성간의 결혼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레위기에서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위협적인 선언들, 즉 ‘너는 여자와 동침함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것이니’(레 18:22), 그리고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라고 경고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 특히 Peter E. Coleman 같은 사람은 ‘가증스럽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도덕보다는 종교적 금기인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신학자는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오늘날 폐지된 구약의 ‘의식법’(히 8:13)에 속하는 부분이거나(갈 4:9-10),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관습이기 때문에(골 2:16-17), 현대의 동성애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해석은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 23:17, 딤전 1:10).  사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한 죄의 대가로 당장 돌에 맞아 죽지는 않겠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나와 있고(고전 6:9), 특히 큰 논쟁을 일으키는 구절인 동성애에 관한 로마서 1장26-2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구절들을 구약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구절들과 (레 18:22, 20:13),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레위기의 가르침은 신약교회에서도 규범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동성애에 대한 욕망 자체를 하나님께 맞서는 개인의 정욕에 의한 반란으로 보았는데(딤전 1:9-10), 그 이유는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질서를 반하는 역겹고 가증스러운 행동일 뿐 아니라(롬 1:24),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창 2:24), 철저히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1장26-27절의 말씀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동성애 옹호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겠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닌 “부자연스러운 행동” 즉,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대로 쓰기’ 때문에 상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 중 하나인 John Boswell 박사 역시 바울이 정죄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범하는 변태적인 동성애적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현대어/현대인 성경에서 번역했듯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스러운 법(정상적인 성생활)을 어기고 변태적인 짓(성적범죄)을 저지른” 인간의 부끄러운 행위 자체를 바울이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구약 성경은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행위는 하나님의 정하신 성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로, 인간 스스로가 무절제한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내버려둠으로써 생긴(롬 1:24, 26, 28), 무서운 심판의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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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4주년 기념으로 오아후를 거쳐 코나열방대학(YWAM Kona)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침에 바라본 와이키키 해변


오후에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아름답기로 유명한 와이키키 해변의 저녁노을


오하우에서 코나로 출발하기 전 타고 갈 하와이언 항공


소도시 시외버스 정류장 같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빅아일랜드 코나 국제공항


공항 북쪽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힐튼 와이콜로아 빌리지로 가는 길


빅아일랜드는 아직도 용암이 흘러나와 바위처럼 굳어 버린 땅


코나열방대학 정문


열방대학을 대표하는 국기 광장


기도실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은 미주지역과 한국에서 오신 분들


소그룹 모임


소박하게 느껴지는 도서실




대강당 안에 있는 식당


코나 캠퍼스에서 바라본 바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코나공항으로 가는 길


코나국제공항 입구와 야외 대합실




시골 역을 연상케 하는 출국장


빅아일랜드 상공에서 바라본 코나


짧은 여정이었기에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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