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의 말은 사실상 나는 그와 같은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는 말이다.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확신하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항상 자신의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죽여라.  실로 죄를 죽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라.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이기는 삶을 목표로 삼으라.  만약 죄를 계속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죄의 활동성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죄를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죄는 겉으로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활동적이다. 

또한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운다(7:23).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린다’(5:17).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죄이다(1:14).  욕심은 도덕적으로 항상 선한 것을 방해하고 악한 행동을 유도하며 우리의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제하는 것을 막는다.

결론적으로 말해 죄는 항상 우리 속에서 활동하며 항상 우리를 속이고 유혹한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거하는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죄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오염시키려고 발악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을 때, 그런 죄를 죽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서 813절에서 말한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즉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과 같은 노선에서 가능한 한 더 큰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그 결과 불결한 생각은 나중에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의 욕구는 탄압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처음에 불신앙적인 생각을 갖게 하고서 나중에 무신론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정욕을 자극해서 그 경로를 통해 더욱 큰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마치 무덤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죄의 거짓됨이 드러난다.  죄가 승리할 때 인간은 강퍅해져서 파멸하게 된다(3:13).

이처럼 죄는 서서히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마음속에 처음 들어온 죄가 나중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바대로 우리가 아무리 작은 죄라도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강퍅해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죄의 세력은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하게 된다.  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적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죄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그것의 머리를 쳐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무를 우리가 저버린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온갖 종류의 저주스러운 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죄를 대적하는 성령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라는 말 다음으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5:17).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주어진 성령, 또는 새로운 영적성품은 육체를 거스르는 성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후서 14-5절에서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위해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 결과로 우리 속에는 육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뿐만 아니라 마음의 법이 생기게 된다(7:23).  이 두 개의 법이 서로 싸울 때 마음의 법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가두고 죄의 법을 자유롭게 활개치도록 내러벼 둔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영적싸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이 달려 있는 싸움이다.  매일매일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품성과 성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자원을 경홀히 여기는 셈이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뿐만 아니라 은사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매일매일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지혜, 은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마음속에 주어진 은혜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성취라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은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은혜는 부패해서 썩고 만다.  그리하여 죄가 세력을 얻어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3:2, 3:13).  다시 말한다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은혜는 시들게 되고 대신 죄의 욕망이 번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악화된다.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 결국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차갑고 화를 잘 내며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에 동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무서운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한 극단은 굳은 결의로 죄를 이기려는 자세인데 이것은 결국 율법적인 태도로 남의 흠을 잡고 분노와 시기 그리고 악독과 교만함을 낳는다.  또 다른 극단은 자유함과 은혜라는 핑계로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삶과 관련해서 진정으로 복음적 입장은 양극단을 회피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는 이 중용의 입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의무

우리의 의무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다(고후 7:1).  또한 우리는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의무가 있다(벧전 2:2, 벧후 3:18).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 4:16).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무들은 매일 죄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죄는 거룩한 모든 행동을 방해하고 성도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죄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죄의 공세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자제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다기보다는 죄와 타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죽일 수 있고, 처음 회심해서 죄의 자각과 수치심을 느끼고 죄와 대항하는 새로운 원리를 마음속에 심어 죄를 이기는 보편적인 삶의 토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의 마음속에는 죄가 거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매일매일 끊임없이 죄를 억제하고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자칭  신앙인이라고 공헌하는 일반 사람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 죄를 죽이는 자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로 이 세대의 사람들은 광명의 빛을 받았고 그것과 함께 영적인 은사들을 얻었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과 결합해서 오늘날에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종교와 종교적 의무에 관한 이야기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전처럼 경박하고 텅 빈 헛된 설교가 아닌 영적은사를 쏟아내는 설교들을 많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의 빛을 통해 회심을 했고 이전보다 영성에 대해 더욱 많은 말을 하며 주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공표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거의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헛된 시간낭비, 게으름, 비생산적인 자세, 시기, 싸움, 알력, 경쟁, 분노, 교만, 세속적인 생각, 이기심 등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지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도 그와 같은 죄의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구원하는 빛을 소요한 사람들이 이 지경이라면, 종교심은 있지만 복음의 빛을 경멸하며 죄를 죽여야 할 성도의 의무를 단순히 외형적 오락에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행위 정도로 축소시키는 사람들의 경우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선하신 주님은 이런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죄를 이기는 성령을 보내주신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인들에게서 다음 두 가지 악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당사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다음은 타인과 관련된 것이다.

 

1) 자신에게 있는 악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죄의 쓴 맛을 음미하지 않고 그 죄를 그대로 삼키기 때문이다.  은혜와 자비에 대한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소화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음탕한 것으로 바꾸고 죄의 속임수로 인해 그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 

신앙을 공헌했지만 결국 배교를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경로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한때 그들은 죄를 자각하고 그 자각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자신들의 자각을 사람들에게 공표도 했다.  실로 그들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벧후 2:20).  하지만 복음의 교리를 알았지만 자신들이 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한 탓에 은혜의 교리로부터 도태되어 의무를 소홀히 하는 모습으로 전략하게 되었다.

 

2)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도 선한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죄를 이기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인의 내부는 모두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이런 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면 종교에 열심은 가질 수 있지만 그 열심에 인내와 보편적인 의가 함께 동반되지 못한다.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은 방탕함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매우 세속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랑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말은 영적이자만 실제의 삶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철저하게 세상과 영압한 삶을 운위한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자랑할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중적 언행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인들은 타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어 그들을 속인다.  그래서 이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외형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할지라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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