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주에 이어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다른 본문들을 조금 더 설명하겠다. 베드로전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1:17). 오직 선한 것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종말론적인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벧전 3:10-12). 베드로는 시편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언급하는 본문(시 34:12-14)을 인용하면서 이를 모형론적인 해석을 통해 종말론적인 삶에 적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신약성서 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5-11절에서도 신자들이 부지런히 실천에 옮겨야 할 경건의 덕목을 자세히 열거한다. 각 사람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경건한 행위에 의해 확인되고 검증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덕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전 1:11)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상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거짓 선생들의 문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했지만, 경건하지 못한 삶 때문에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질 운명에 놓여 있었다(벧후 2:1-22, 유 1:4-23).
더 나아가 요한일서도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독자들이 예수를 믿었고, 또 그를 그리스도로 시인했기 때문에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를 원한다(요일 2:21-23, 3:23, 4:2, 15, 5:11-13).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순종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를 진정으로 아는 이들은 예수의 계명을 지킨다(요일 2:3-6). 수시로 죄를 짓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보지도 못했고 구원에 이를 만큼 알지도 못한다(요일 3:6). 요한이 죄를 짓는 이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이보다 더 분명할 순 없다(요일 3:8).
사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요일 1:8), 죄의 특성이 지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다(요일 3:9, 5:18). 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며 자신들의 의로운 삶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임을 보여준다(요일 3:10).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 4:7-8).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사람의 결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임을 분명히 한다(요일 5:4-5).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신자들에게 이기고 승리할 것을 촉구한다(계 2:7, 11, 17,26, 3:5, 12, 12:11, 21:7). 이기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오직 이기는 자만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계 2:7), 오직 이기는 자만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계 2:11). 만일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그는 이기고 승리하고 끝까지 견딜 것이다(계 3:5). 따라서 이기는 자들은 최종적 유업을 차지하게 될 것이지만, 악을 따르고 살인, 거짓말, 음행 등을 추구하는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지고 둘째 사망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계 21:7-8). 오직 선을 행하는 자만이 최종적 유업을 받게 된다.
이렇게 요한은 계시록에서 신자들이 끝까지 인내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계 13:10).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영원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계 14:9-11).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계 14:12). 예수님도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마 24:13). 따라서 죽은 자들이 각자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계 20:11-15)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악을 행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는 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는다. 자신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유가 그들이 선을 행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요한은 그럼에도 이 새 생명은 이를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약 1:17), 따라서 선한 행위는 생명에 대한 공로나 대가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엡 2:9, 딛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