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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7.07 다양한 사역
  3. 2024.06.23 웨슬리와 구원
  4. 2024.06.16 칼빈과 구원
  5. 2024.06.09 구원의 순서
  6. 2024.06.02 구속 1
  7. 2024.05.26 단독설
  8. 2024.05.12 신인 협동설
  9. 2024.05.05 속죄
  10. 2024.04.21 이중 예정 1
  11. 2024.04.11 우리의 선택
  12. 2024.04.07 그리스도인의 책임 1
  13. 2024.03.31 부활
  14. 2024.03.24 웨슬리와 예정
  15. 2024.03.17 칼빈과 예정 1
  16. 2024.03.10 예정
  17. 2024.03.03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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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24.02.18 원죄 2
  20. 2024.02.11 T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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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2024.01.21 주권과 자유 2
  27. 2024.01.14 보편 속죄 1
  28. 2024.01.07 형벌 대속 1
  29. 2023.12.17 웨슬리와 성경 1
  30. 2023.12.10 칼빈과 성경 1

속전

논쟁거리/속죄 2024. 7. 14. 17:17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나눈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이나 의견의 대립을 해소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서로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 준다.  이런 유익을 주는 대화와 달리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되는 대화가 있다(딤전 6:4-5).  그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식한 논쟁적 대화이다(딤후 2:23). 

예를 들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졌을 때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백해무익한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신학적 논쟁이 그칠 날이 없다’(딤전 6:5).

어느 신학자가 ‘유보적 칭의론’을 강론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의 신학적 칼날을 세워가지고 공격하는 진영이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한 전통적 구원론 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익한 변론들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Lloyd Jones는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벽한 정통적이면서도 죽어있는, 즉 영혼구원에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로마서 14장에 보면 고기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삼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을 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고 일깨워 준다.  

지금은 불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롬 2:24) 악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메마르고 패역한 세대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막 16:15).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길 바란다.  관종(關種)이 너무나 많다.  로마 교인들이 먹는 문제로 서로 실랑이를 벌인 것처럼 신학적 무식한 논쟁을 통해 자기 좀 알아달라는 목사들 말이다.  이들은 어떤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할 시간은 있어도 영혼 전도나 기도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논쟁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살전 5:19).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짓을 일삼는 목사치고 죽은 정통 신앙에 묶여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님이 맡겨주신 목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기름부으심이 없는 메마른 설교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나불거린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목회에 모범을 보이며 맡겨진 양들에게 헌신하는 올바른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식한 변론이나(딤후 2:23), 논쟁을 일삼는(딤전 6:3-5), 바리새인 목사의 가르침을 받거나 추종하는 것은 가룟유다와 같이 귀중한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요 13:2).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고 증거 한다(롬 5:8).  문제는 속죄의 범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의 양적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을 놓고,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한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성경적이고 맞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속죄론’과 택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속죄론’이 있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속전(贖錢)을 지불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6장 51절, 12장 32절, 로마서 8장 32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고린도후서 5장 14절, 디모데전서 2장 6절, 디도서 2장 11절, 히브리서 2장 9절, 베드로후서 2장 1절, 3장 9절,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4절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들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딴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장 21절, 20장 28절, 눅 19장 10절, 요한복음 6장 37-39절, 10장 15절, 26-28절, 17장 9절, 15-17절, 20절, 사도행전 20장 28절, 로마서 3장 26절, 8장 32-33절, 에베소서 1장 4절, 11절, 5장 25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 디모데후서 1장 9절, 히브리서 9장 15절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한’은 구원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대상의 양적제한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실제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교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작정 순서에 대한 신학적 견해와 결부된다.  먼저 개혁파의 유명한 신학자들인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Theodore Beza와 같이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반대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같은 개혁파 안에서 이름난 신학자들인 Augustine, Charles Hodge, Louis Berkhof은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취한다.  이들도 상대방 입장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장한다.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잘못된 것인가?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속전이 지불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이 불합리한 것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모든 관심이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얻은 값진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마 20:28, 롬 3:23-26, 벧전 1;18-21).  다시 말해 그 값을 누가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에 쏠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속죄의 범위에 대한 양대 견해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을 가지고, Lloyd Jones의 말대로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변론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딤전 6:4), 사람들이 언어적 유의를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고전 1:12-13).  이것은 각 사람이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롬 12:3).  무식하게 내 신학이나 신앙만이 맞은 것처럼 우겨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의견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서로 비방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둘 다 멸망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갈 5:15).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엡 2:16).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롬 5:8)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요 3:15)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롬 5:1).  하지만 누구든지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구원으로 초청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한다면(눅 14:15-24),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남아 있게 된다(요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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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과 Wesley는 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물론 두 사람이 사역하는 모습은 유사점이 많았지만 차이도 분명했다.  Calvin은 공식적인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른바  ‘하향식’(top-down) 방식으로 권위를 앞세웠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선포하고 성례전(sacrament)을 올바르게 집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은혜(grace)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다.

그러나 Wesley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된 내용만을 사역의 범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과 교회를 인도하고 능력을 주는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와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과 사회의 요청에 창조적이고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사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Wesley는 Calvin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켰다.  특별히 평신도 지도력을 강화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사역이란 이 세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응답이다.  즉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마 28:20).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사역을 정립하려 했지만, 교회사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이 발전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몇 가지 분명한 영역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씀(고전 4:6)과 성례전(고전 11:23-34)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역, 혹은 묵상(막 1:35)이나 열심 있는 경건 생활(요일 2:6)을 강조하는 사역,  전도(마 28:18-20)를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사역, 그리고 성령의 은사(롬 12:6-8) 중심의 사역, 혹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사역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을 한두 가지로 단순화할 수 없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나 교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영역에 비해 한 가지 영역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다른 영역들을 2차적이나 3차적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영역들을 최소한 조금씩이라도 수행해야 한다고 이상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을 통해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고전 12:12).  한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서로 다른 은사들을 소요한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몸 안에 있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울의 관심사였다.  이 유비는 종종 개체 교회들을 지칭하지만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교회들과 교파들은 서로 보완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Calvin과 Wesley를 비교하면서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앞서 언급한 사역의 모든 영역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방식과 사역에 대한 가르침은 두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었노라’(고전 12:22-23).  여기서 말하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는 그 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지체들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의 은사를 발휘하지도 않은 채 늘 뒤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사실상 그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존재들인 셈이다.  교회에는 눈에 잘 띄는 지체들도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체들도 모두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자기 외에 다른 지체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찮다고 괄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두 사람(목사와 장로)에게만 지나치게 영광이 집중되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2장 25-27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양한 사역의 영역이 있는 것처럼 지도력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사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사역이나 목회자의 지도력에 있어서 특정한 방식이 올바르고 다른 방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은 성경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오직 개혁주의 교회에서 늘 나팔을 부는 것처럼 말씀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균형 잡힌 성령의 사역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Calvin은 교회사에 나타난 신학적 거인이다.  무엇보다도 사역에 있어서 그의 지도력과 신학적 공로를 결코 폄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탁월함이 모든 개신교인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모범은 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Calvin을 목회자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실제 생활에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Wesley의 모습이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 따르는 실제적인 모범이라고 확신한다.  이 말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것은 양쪽 진영에서 수 십 년을 몸 담아 신앙생활해 왔고, 양쪽 진영에 속한 모든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심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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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은 Princeton 철학과 명예교수 Harry G. Frankfurt가 쓴 책이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를까 해서 짤게 설명하고 싶다.  제목이 유별나지만 개소리는 세상을 더럽히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욕(汚辱) 시킨다.  개가 짖는 소리야 당연히 개소리이니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개가 아닌 사람이 ‘개소리’로 나팔을 불어대면 그 사람은 인간 되기를 포기한 개가 된다.  다시 말해 개소리 같은 신학을 늘어놓으면 그는 이미 개 같은 사람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자나 목사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 ‘개소리’ 떠드는 신학자, 혹은 ‘개소리’ 짖어대는 목사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으면 한다. 

독립적인 신학은 우물 안에 갇힌 한정된 신학이다.  이런 신학은 정말 답답하기에 짝이 없는 신학이다.  반면 초교파적인 신학은 언제나 풍성하게 만드는 신학이다.  그 이유는 다른 신학적 입장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갖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불일치하는 영역보다는 공통된 영역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영역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동의한다(삼상 2:6-7).  Wesley의 신학적 접근법이 다른 이들의 접근법과 다를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해서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감소시키는 일체의 신학적 관점을 주장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Wesley의 비판자들은 에게 그런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그의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 이런 주장들이 하나같이 ‘개소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자유에 동의한다(신 30:19-20).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유의 성격과 범위 및 작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불일치할지라도 어떤 그리스도인도 ‘로봇’(Robot) 혹은 ‘꼭두각시’ 같은 인간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그리스도인도 인간의 자유가 그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태생적’(胎生的)이라고 믿지 않는다.  사실 Wesley가 자유의지를 믿고 가르쳤다는 혐의 아닌 혐의를 ‘카더라 통신’ 골빈 신학자와 목사들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그의 책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의하면, 그는 ‘태생적 자유의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라고 말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가 소유한 어떤 자유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속죄의 효력에 동의한다(벧전 3:18).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하다(히 9:12).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 밖에 다른 것이 필요하거나 요구되지 않는다(행 4:12).  즉 속죄 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을 나타낸다(히 10:18).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열심을 다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전 1:23)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행 4:10).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속죄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불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죄는 우리가 구원받은 객관적인 원인이며 주관적 영향을 우리에게 미치는 무엇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 말이 꼭 필요한 것 같다.  『The Letter of Rev. John Wesley, ed. John Telford, 8 vols』에 나온 Wesley의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스스로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선한 생각 혹은 소원조차 이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구원과 관련된 어떤 일과 용납됨 조차 … 회심시키는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이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Wesley 신학의 뿌리는 결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나 태생적 자유의지 개념에 기반을 둔 그 무엇이 아니다.  그의 신학은 언제나 은혜의 신학이다.  Wesley에 대해 쓸데없이 이단적 사상을 가진 신학자라고 ‘개소리’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이 이견을 보인 주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조건(condition)인가, 결과(result)인가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실질적인 은혜의 증거였다.  반면에 Wesley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즉 Wesley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Calvin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을 너무 강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를 주장한다면 인간의 믿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Wesley는 『Thoughts on Salvation by Faith』에서 말한다.  “절대적 예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정을 갖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공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지 않는 한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을 잃게 된다”  

선행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회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나 Wesley는 칭의(justification)가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칭의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기회의 출발점이었다.  실제로 Wesley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축복하고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향하여 인내하며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은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했으나, 성화에 대한 Wesley의 관점은 Calvin과 자주 구별되었다.  Wesley는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하여 말하면서 구원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 즉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의 문제에서 종교개혁자들과 대체적으로 동일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구원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견을 보인 부분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얼마나 역동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그 은혜를 미리 베풀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과 협력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롬 8:4).  그것이 Wesley가 전적 성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Calvin과 Wesley는 구원론에서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의 관점에서 은혜는 실질적, 혹은 저항할 수 없게 역사한다.  그 은혜는 선택된 사람들, 즉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제한된다.  실제로 멸망할 대상으로 저주가 예정된 사람들은 영생을 믿을 의지와 능력이 없는데,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지위를 선포하거나 결정한다. 

그러나 Wesley는 보편적이거나 무제한적으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먼저 구원을 제시하고(롬 10:11) 다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셨다는 것이다(막 16:16).  사람들에게 은혜가 미리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벧후 3:9).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미리 정한 계획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미리 알고 생명의 조건들을 대략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을 구제척으로 미리 결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Wesley와 Calvin이 가지고 있는 차이의 예가 될 것이다.

Wesley는 설교 가운데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 Calvin의 입장에 동의한 설교를 들어보자.  Wesley는 이 설교의 제목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Salvation by 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가장 큰 은혜, 곧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심’으로 된 것이다.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며,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Wesley와 Calvin은 개신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빌 2:5-8)과 죽음(마 27:50)과 부활(고전 15:20)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엡 2: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인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치르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마 20:28).  그런데 Calvin이 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자체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믿었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무조건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히 저주받는 사람들도 징계하신다. 

Wesley Calvin의 이러한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Wesley는 그리스도가 분명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다고 주장하였다(딤전 2:6).  즉 대속(vicarious)은 제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눅 14:15-24)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다(막 16:16, 요 3:18).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영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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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에 속한 성도들의 견인(Perseverance) 구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election)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구원이 보장된다는 Calvinism의 독특한 교리다.  사실 Calvin의 견인구원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환영할만한 구원관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단 한 번이라도 맛본 장로교 신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Calvin의 견인구원을 Wesley는 ‘궁극적 구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Wesley는 한번 믿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Calvin의 견인구원에 제동을 가하기 위해 성경을 제시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적고자 한다.  먼저 에스겔 18장 24절과 히브리서 10장 26-29절, 그리고 특별히 구원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로마서 11장 20-22절과 연관 지어 설명하였다.  지면 관계상 에스겔서와 히브리서는 생략하겠지만, 로마서 말씀에 대한 Calvinist들의 해석은 주로 이런 식이다.  “문맥상 바울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나 진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개별신자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찍혀 나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일반화된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떠나는 한 집단으로서 이방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증편향적 해석이다.   

먼저 구절들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20절에 ‘저희는 믿지 않으므로 꺾여졌다’, 21절에는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2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걸려 넘어진 자들에게 심판으로 행하셨다(롬 9:32-33). 즉, ‘넘어지는(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선택이고 나발(삼상 25:25)이고,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는 말씀처럼 구원은 언제나 조건적이다.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살고(겔 18:30-31),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죽는다는 것이다(창 2:17). 

짧지만 정곡을 찌르는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이라도 떨어져 나갈 수 있으며 마침내 영원히 멸망할 수도 있다”  이것은 거룩함을 입은 자도 죄를 지어 타락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Wesley는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와 같이 Wesley는 Calvin의 ‘성도의 견인’ 교리를 성경을 통해 부정했다.

Calvin이 강조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는 영생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본성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 대한 배척을 지겹도록 강조하였다.  사실 Calvin에게 있어 예정론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죄 가운데 있으며, 그들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Wesley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Calvin의 구원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위치는 Calvinist들 사이에서 논쟁이 심한 '타락 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처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그리스도, 즉 신비한 연합”(mystical union)으로 보았다.  대부분 성례전(sacraments)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했지만, Calvin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의 대속(vicarious)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실질적인 부르심을 확신하고 또한 그들이 거듭나고 믿으며 회개할 수 있게 한다.      

Calvin의 칭의론은 그의 구원론에서 가장 뚜렷한 강조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이 강조한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반영하고 있다.  Calvin은 법적인 방식으로 신학을 세워가면서 바울의 칭의 교리(doctrine of justification)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인정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칭의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우리 안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존재들인 것처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대신하여 예수의 의를 받으셨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예수의 대속의 사역을 통하여 용서를 받았다.  Calvin은 계속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을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확인하여 풀어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결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의로움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믿음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능력은 인간의 공로에 있지 않고,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Calvin과 Luther 모두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칭의와 성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Calvin은 Luther보다 성화를 더욱 강조하였다.  Calvin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더욱더 성숙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이 되기를 얼마나 소망하는지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성화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고통(mortification)과 활력(viv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세 번째 용도(The Third Use of the Law)인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할 필요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화에 대한 Calvin의 관점은 당연히 Wesley와 달랐다.  이 문제는 추후에 다시 논하겠다.  

Calvin은 하나님이 택함 받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고 믿었다.  칭의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어떤 이들은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넘어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참아낸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인내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만이 살아 있는 믿음의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로 인하여 마지막 때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여기서 Wesley는 Calvin의 주장에 다시 한번 성경적 제동을 건다.  Wesley는 하나님의 선택(election)을 두 가지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하나는 특별한 사명을 맡겨주기 위해 거기에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택정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복음의 선포를 위해 특별하게 선택되었다(눅 6:12-16).  그러나 이 선택이 영원한 구원과는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선택된 열 두 제자 중 구원을 잃어버린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요 6:70).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처럼 가룟 유다는 선택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행 1:18, 25).  나머지는 생략하겠다.        

Calvinism 안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문구들 가운데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표현들이 있다.  ‘영원한 보장’(Eternal Security) 혹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문구들이다.  사실 Calvin은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가 사용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 믿음을 심어주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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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주관적 차원에 관련하여, 교회사에는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구원의 순서를 특별하게 설명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많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는 성례전적 관점에 따라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전(seven sacraments)을 행하는데, 그 가운데 다섯 성례전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성례전 차원에서, 구원은 ‘세례’(baptism)로 시작된다.  그다음에는 ‘견진’(confirmation)의 성례전으로 이어진다.  이때 사람들은 세례 받을 사람들의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을 확인한다.  적절한 나이가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확인한 신자들은 ‘성만찬’(Eucharist)에 참여하여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고해성사’(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참여한다.  병자와 임종을 앞둔 이들은 긴급하게 기름부음을 베푸는 ‘병자성사’(Sacrament of the Sick)를 받는다.  이 다섯 가지 성례 전은 모두 실제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구원의 순서로 가능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 Protestant Church의 신앙과 실천은 Roman Catholic church과 구별되는 졍체성(Identify)과 차별성(distinguish)과 함께 개신교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신앙 전통들과 차별성을 찾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의 순서를 명시적으로 작성하려는 노력은 18세기까지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관심은 Calvin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Wesley와 지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동떨어진 독일 루터란 교회(German Lutheran Church)에서 시작되었다. 

Calvin과 Wesley 모두 구원의 순서를 공식적으로 정하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저술에서 구원의 순서에 대한 내용들이 암시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Wesley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 사건을 단계적으로 연결하는 것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Calvin과 Wesley의 추종자(Followers)들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구원의 순서를 찾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는 것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구원의 순서를 불변하는 교리적 차원에서 기술하기보다 사람들의 구원 경험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설명은 사람들이 구원과 영적 성장 그리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면 사람들에게 순서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열정적으로 알릴 수 있기 때문에 동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삶을 살거나 구원의 순서가 적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리적인 설명은 너무 협소한 이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구원과 함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의 차원들이 있다.  은혜(grace), 믿음(faith), 회개(repentance),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것은 아닌 신학적 개념들이 있다.  예지(foreknowledge), 예정(preordination), 택함(election), 사명(calling), 계시(illumination), 회심(conversion), 중생(regeneration), 용납(adoption), 확신(assurance),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인내(perseverance), 절망(mortification),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 등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그러한 용어(term) 들을 정의하고 신학적으로 내포된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반드시 의견의 일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정이라는 말은 특별한(particular) 의미나 일반적(general)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고, 은혜라는 말도 역사(effectual) 하거나 선행(prevenient)하는 의미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한 순서를 정하는 것은 결국 이론(theory) 혹은 신학(theology)이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를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서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저작에서 관찰할 수 있는 구원의 일반적인 순서나 경로에 대한 논의가 신학적으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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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논쟁거리/속죄 2024. 6. 2. 15:56

마가복음에 보면 고질적인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온다(막 5:26).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진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병이 더 호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막 5:34).  또 다른 여성이 요한복음에 나온다(요 4:7).  이 여자 역시 오랫동안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문제는 조상들을 잘못 만나 평생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죽은 전통에서 놓여남을 받았다(요 4:20-24).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가령 신학생이 교수를 잘못 만나면 평생 그 교수로부터 배운 것이 최고의 학문인양 나팔을 불어댄다.  더 큰 문제는 잘못 배운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이기까지도 한다(사 9:16).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가르치는 선생보다 갑절이나 더 지옥자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마 23:15).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시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를 잘못 만나면 영혼이 파멸될 수 있다(눅 11:52).  어감이 최악이긴 하지만 표준어이기에 사용한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요 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요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으로 예언되었다(사 11: 1-5, 40:3).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하나님’으로 호칭되었고(요 20:28)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나(마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눅 3:22).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 되심을 보여준다(행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그러나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사 26: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2:13).  특별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계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히 9:12).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2)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만물의 창조자이시고(골 1:16), 우주를 통치하시는(요 17:2), 율법의 제정자이시다(마 5:22-32).  이러한 성자 하나님께서 대속물(속전)이 되기 위하여(마 20:28), 자신의 신적위엄을 보류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빌 2:6-8),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요 10:18).

이렇게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원수 된 것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엡 2:16).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원해서(요 10:17),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되시고 그 십자가에서 처형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다(히 1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고(엡 1:7),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처럼 단 한 번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향한 구속사역이 완성이 된 것이다(히 10:14).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와 율법의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속량함으로써 대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갈 3:13).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내세우는 주장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다른 형제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약 4:11-12).  그런데 이들은 ‘구속’과 ‘구원’에 대해 혼동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행 5:30)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이다(롬 3:23-26).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고후 5:18-19).  그러나 이  십자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자 물린 자들마다 살아났다(민 21:6-9).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저 십자가만 바라보면(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요 3:14-16).  먼저 영혼이 사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엡 2:8)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요 6:37).  더 나아가 개인 스스로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을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막 16:16).  여기에 ‘불가향력적 은혜’라는 신학적 용어를 끌어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행 26:24-2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놀라운 복음(약 1:21)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롬 1:2).  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 성경에 나온다.  이 구절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핵심 본문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이다.  그런데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오직 십자가만 믿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소리 높여 메시지를 증거 했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행 2:22-36).  그가 고넬료 가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증거 했다(행 10:39-41).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총의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신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이야기했다(행 15:7).  또한 로마서 10장 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바울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행 26:23), 그리고 총독 벨릭스에게 증거 한 것처럼(행 24:21), 십자가의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포함시켜야 온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갈 1:4)과 부활(롬 5:10)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 1:3).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만약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만을 증거 한다면 그것은 복음도 다르고, 영도 다른 짝퉁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고후 11:4).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했다.  그가 십자가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팔을 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고전 15:17).  따라서 누군가 십자가만 믿고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도 없는 사악한 궤변이기 때문에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이런 반쪽짜리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증거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거짓을 일삼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딤전 4:1). 

심각하는 것은 이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신학적 논쟁이나 정치, 혹은 ‘개콘’을 보는 것처럼 떠드는 것 말이다.  Calvin은 설교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강단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모든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듯이’(마 7:16) 이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딤전 4:2).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상적인 목사라고 착각을 한다.  누구든지 영혼이 살아나려면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요 5:25).

예를 들어 초대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단들, 즉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만 인성을 부인하고(Docetists), 인성은 믿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Ebionites), 또는 위격의 통일(Nestorians)과 양성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Eutychians), 심지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무조건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계 22:18-19).  누구든지 성경을 편리한 대로 골라서 믿는 사람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딤후 2:16-18).  성령의 역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갈 5:22-23),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에는 신학적 비방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 밖에 없다(약 3:14-16).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영이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과 사건들, 출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는 믿음이다(계 22:18-1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것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한 구속이다(벧전 1:18-19).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잡소리’다.  개혁주의신학자 R. C. Sproul 박사의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덕이 된다.  하지만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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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설

칼빈과 웨슬리 2024. 5. 26. 11:35

우리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사 55:8).  그분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두 입장에는 각각의 신비가 담겨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단독설(monergism)과 신인협동설(synergism), 두 입장은 각각 신학적인 유효성과 적절성이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신비에 따라 살 것인지, 어느 쪽을 따르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삼모사’(朝三暮四) 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상황과 환경을 따라 얼마든지 이쪽저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약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Pentecostal Theology과 Wesley Theology, 그리고 Calvin Theology을 공부했다.  엄청난 학비를 들여 가면서 12년이 넘는 세월을 공부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불통(不通)과 골통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신학만을 공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골통’ 소리를 듣는다.  한 마디로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신학하고 다르면 다 이단인가?  나는 정말 이런 개소리하는 목사를 만나 일대일로 살벌한 토론을 하고 싶다.  상대의 신학이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감(語感)이 조금 그렇지만 ‘골통 목사’ 그리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목사를 만나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불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과 상황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라는 차원에서 일관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Calvin 신학의 강점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강력한 확증이다.  Calvin은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했기 때문에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확증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모든 선하심이 근본이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다른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경외하고 흠모할 대상이 한 분 있다고 단순하게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지혜와 빛, 혹은 의로움이나 능력, 혹은 정직이나 참된 진리 그리고 그분이 원인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의 단 한 조각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Wesley 신학의 강점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으면서 인간의 자유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는 구원을 보다 관계적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악의 조건에서 법적으로 구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들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원인을 준비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유는 회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행하고(갈 5:1),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과의 사랑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자라도록 부름 받았다.  그들은 처음 창조될 때 가졌던 하나님의 본래 형상(창 1:27)을 새롭게 함으로써 더욱 많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거룩하게 하는 성령과 관계 속에서 협력하며 행한다(롬 8:4).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 4: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  Wesley는 이 사랑에 대한 강조를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보다 귀한 무엇을 찾으려 한다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며 왕도를 벗어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복을 받은 적 있습니까? 질문할 때 그것이 사랑보다 귀한 것을 의미한다면 여러분은 틀렸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죄에서 여러분을 구원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 이상의 것을 바라야 한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죄성과 타락,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진 인간의 상황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잃도록 내버려주지 않으셨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마 27:50) 그리고 부활(요 20:19)을 통해 구원을 예비한 것을 찬양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엡 2:8-9).  이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딛 3:5)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은 죄수처럼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다(눅 23:43).  하지만 Calvin은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동하신다고 믿었다.  반면에 Wesley는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시작하시고 은혜로 가능하게 하며,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다고 믿었다. 

Wesley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다(요 3:36).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원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구원의 과정에서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기대한다(요 3:16-21).  그 선택은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도록 허락하는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성령 안에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닮아간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가도록(마 22:36-40) 그리스도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빌 3:13)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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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인간에 관한 운명론이나 결정론을 거부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Calvin은 인간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유를 전적으로 확증하는 결정론(determinism) 중심의 신학을 전개한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손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것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특별한 본질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삼림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도적을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見)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더 나아가  Calvin은 신명기 19장 5절 말씀을 가지고 벌목하다가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Calvin에게 있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일어난다.  이것은 『기독교강요』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Calvin과 조금 다른 주장을 한다.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조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일을 ‘선견’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미래로, 또는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 것으로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나는 이들의 주장을 존중한다.

Calvin은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론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단독설’(monergism)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그리스어 ‘하나’와 ‘일하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모든 것을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은혜의 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만이 인간 구원에 영향을 미치신다는 견해다. 

Calvin의 추종자들 역시 단독설 개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관리 밖에서는 생명이나 구원이 일어날 수 없다는 신학적 학증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그 밖에 방식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은혜를 통하여 얻는 구원보다 의로운 공로를 우선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의 추종자들은 Calvin의 5대 강령 TULIP에서 벗어나 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다른 신학은 거의 이단이나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내가 대학원에서 Calvin Theology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개혁주의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몸소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Calvinist들이 가진 단독설에 대한 Wesley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는 하나도 동의하지 않았다.  Wesley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확인하면서 성경과 함께 교회전통과 비판적 사고 그리고 결정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올바른 경험을 통하여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Wesley는 ‘신인협동설’(synergism)로 표현할 수 있는, 즉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역동적인 관계성을 강조하였다.  ‘함께’와 ‘일하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하나님이 은혜로 부여한 사람의 능력과 함께 협력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견해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이라는 실질적인 설명이 Wesley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협동설은 그가 사용한 용어는 아니었다.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은 초대교회 대부분의 기독교 문헌들과 오늘의 문서들은 단독설보다 신인협동설에 더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신인협동설에 대해 조금 더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Wesley는 원죄론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Calvin과 견해를 같이 한다.  하지만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서 선행적 은총이란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기 이전에 타락한 인간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말한다.  Wesley의 설교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 의하면 아담 타락 이후에 자연적인 그대로서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미 칭의 이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Wesley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구원의 시작이며, 이렇게 시작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반응, 즉 협동함으로 완성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도 선행적 은총 때문이라고 Wesley는 말한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 어떤 선한 동기가 생기다든가 하나님을 향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서 원인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은혜를 못 받아서 구원받지 못하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처럼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폼(?)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한다.  이것을 ‘신인 협동설’ 또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 이라고 한다.  이 신인협동설은 인간의 공로를 기초로 하는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구별되며, 인간의 원죄론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구별되고,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근거로 하는 즉, 하나님이 절반, 인간이 절반이라는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도 구별된다.    

Wesley의 설교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죄에 죄를 더하여 범죄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 본래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살리시기 전에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없다. 죽은 나사로가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전까지 걸어 나올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느 인간이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그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까지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우리로 하여금 선한 것을 뜻하게 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는 곧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뿐이다” 

오래전 서철원이가 바지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Wesley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다고 떠들어 댄 적이 있었다.  솔직히 Wesley의 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목사가 그에 대해 신학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더 웃긴 것은 Wesley의 교리와 신학을 펠라기우스주의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이 분이 치매 환자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작금의 시대는 개나 소나 신학자가 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만약 Wesley가 펠라기우스주의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설교만으로도 그 의혹을 풀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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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논쟁거리/속죄 2024. 5. 5. 14:49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Anselmus는 범죄 한 인간의 구원여부와 구원방법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Augustine은 택한 자의 구원에는 속죄나 공의의 만족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상대적 필요성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견해로서 속죄는 본래 필요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결정하신 것뿐이라고 Schleiermacher는 주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atonement) 사역이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죄가 속해지도록 인간의 죄책에 해당하는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히 9:11-14).  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법적으로 연합하기 위해(롬 6:5),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 단순히 낮추신 정도가 아니라(빌 2:6-8), 아예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요 1:29),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요 19:34), 아버지께 버림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마 27:46). 

이 속죄와 관련된 용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있다(롬 3:24).  이것은 속죄가 죄를 속하는 행위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엡 1:7), 구속은 속죄행위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경에서 속죄라고 할 때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사역을 말하는(벧전 1:18-21), 반면에 구속은 속죄에 비해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이란 넓게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사역 전 과정을 가리키고(롬 3:24-26), 좁게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구금된 자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속량’을 가리킨다(갈 3: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때 구속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이다(마 20:28).  이것은 구약 희생 제사에서 대속교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형벌을 면해주셨다(레 9:7).  즉 예물을 드리는 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한 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이다(레 1:4). 

이러한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대한 예표이기에(히 10장), 하나님은 생명이 피 속에 있으므로 동물의 피로 죄를 사하셨다(레 17:11).  하지만 동물의 피가 죄를 영원히 깨끗하게 할 수 없기에(히 10:11),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게 하셨다(히 10:4-18).  실제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시었고(요 1:29),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고후 5:21).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제사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 지는 것들과는 구별된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영 단번의 성격을 띠는 완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10:10-14).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은 매년 지상의 지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히 9:1-7).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었다.  이는 온전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닌 참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신 것이다(히 9:24). 

따라서 그 자신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가 문자 그대로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결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벧전 3:18).  그런데 Gore Charles는 『The Body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실 때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과 달리 그리스도는 단번(once for all)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되었다(히 10:12).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실제적인 제사가 십자가에서 드려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하고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히 10:18).

비록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하신 어떤 일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원문 하고는 거리가 멀고 성경적이지 않다.  심지어 RSV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라고 번역하므로(히 9:12),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분은 지상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일이면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듯 하늘에서도 그런 대속적 행위를 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사를 드림으로(히 7:27),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된 것이고(히 10:12),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한 것이지(히 9:12, 24), 그 뒤에 일어난 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제물,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골 1:20)를 가지고 옛 지성소의 원형인 ‘참 하늘’(히 9:24)에 들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서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계신다(히 9:24).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19:30),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속죄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과 종결성, 즉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따라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히 10:1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히 7:27).  무엇보다도 이 속죄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그 일에 관여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안전한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갈 4:4-5) 속에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히 9:14),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을 어김으로 받게 될 형벌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갈 3:13), 의식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졌다(갈 4:4-5).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받지 못한 자들 위에 왕 노릇 하던(요 12:31),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으로부터 구속을 받았으며(요일 3:8),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근본책임이 그리스도에게 다 전가된 것이다(롬 3: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속사역이 성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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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4. 21. 16:09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8)는 말씀처럼 Wesley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을 강조한 것이다(엡 2:8).  여기까지는 Calvin의 주장과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시키느냐에서는 다른 차이를 보였다.  이 차이는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지만, 그 응용에서는 대단한 의미와 차이점을 드러낸다. 

Calvin은 은혜의 작용을 ‘이중 예정’ (double predestination) 교리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택(election) 받아 구원으로, 또 다른 이들은 유기(reprobation) 즉,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정해졌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 Calvin의 불변적 입장이었다.      

반면에 Wesley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에 연관시켜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셨으니’(롬 3:2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롬 3:24)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에게’(롬 3:26)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Wesley는 Calvin의 예정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막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셨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은총은 값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시며, 그들은 때어나기도 전부터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적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육신과 영혼이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도록 태어났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Wesley는 이 설교를 하고 나서 Calvin의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이 바로 그 가공할 만한 무서운 예정의 교리에 담긴 신성모독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내 입장은 확고하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이 교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예정 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악마보다 악한 것으로 더 거짓되고 더 잔인하고 더 불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하는 것이다”

이렇게 Wesley가 예정론을 신성모독적인 교리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모욕하는 결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만큼 그 예정을 아실 터인데(마 9:2-7, 막 2:6-8, 눅 6:8, 요 1:47-51, 4:18, 11:11-15, 행 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 즉,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요 6:40).  구태여 예정된 사람에게 꼭 이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이라면(엡 1:4-5) 죽기 전에 구원받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창세 전에 누가 선택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Wesley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며 Calvinist에게 말했다.  “Calvinist들은 예정을 붙들지 않으면 자유의지를 붙들게 되어 인간의 구원 속에 있는 영광의 하나님께 누가 될까 두려워한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온 이 말은 짧지만 강력한 말이었다.  Wesley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은혜의 수위성을 강조하는 여러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때, 그는 Calvinist들과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입장을 Harold Lindstrom는 『Wesley and Sanctification』에서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Wesley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개념을 거부한다. 즉 은혜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양태로는 작용하지 않는다. 은혜의 효과성은 인간의 협력에 달려 있다. 이런 기본 사상에 동조하면서 그는 무조건적인 견인 교리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배교할 수 없는 자들로 간주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문제를 가지고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참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요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히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롬 11:22).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3:12).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한다(마 7:21-23, 10:33, 12:31-32, 24:13, 눅 8:13-15, 요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갈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히 2:1, 3:6-14, 6:4-8, 10:26-39, 12:14, 약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절, 계 3:5, 15-16, 22:19).

무엇보다도 Wesley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이 말이 상당히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주권’이란 인간 스스로 내리는 어떤 선택이든 이를 얼마든지 함께 고려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손상을 입지 않는 차원의 주권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Wesley는 자신이 Calvinist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여긴다고 실제로 믿었다.  스스로 제의를 거절할 수 없는 누군가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전에 정해져서 저항할 수 없는 작정에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Wesley의 입장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이 상급을 받거나 벌을 받을 수도 없는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결핍된 인간론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면서 동시에 인간론을 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주권적 창조주 개념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공의로운 통치자라는 개념을 추가했다.  Wesley의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Allan Coppedge는 『John Wesley in Theological Debate』에서 이런 추가로 인해 인간의 결정이 끼어들 자리 및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에 응답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통치로 인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고 Wesley는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할 책임이 있고(막 16:16), 또한 영적 흑암에 빠져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전도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마 28:19-20).  마태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감춰져 있는 만큼 Calvin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지 설명해 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Wesley는 사랑의 하나님은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은혜를 베풀어 제대로 누리게 한다고 확신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배타적으로 구원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인간이 어떤 노력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처럼 무식하게 떠들어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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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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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십자가와 부활 2024. 3. 31. 11:01

기독교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 가마리엘이 관찰한바처럼, 지도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 보통 어떤 운동이든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행 5:5:34-39).  부활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며 실로 믿을 만한 설명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전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느냐 아니야에 걸려 있다.  여기에는 교회 내의 소위 급진파들에게 주는 경고가 나온다.  부활의 특질이 결여된 설교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설교가 아니다.  하지만 이 경고의 말은 급진파들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목사들 중에서도 마음으로는 부활의 진리에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교와 믿음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는 경축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경축하지 않는다.  물론 십자가가 없이 부활만 전파하면 그릇된 승리주의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부활 없이 십자가만 전파하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즉 ‘막다른’(dead) 골목이다.

Mahatma Gandhi는 인도의 한 선교사 단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은 대단히 열심히 일합니다. 장미는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냄새를 맡도록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미가 향기롭다면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기 위해 정원을 건너오고 가시를 참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주 예수의 향기로 가득 차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에 끌린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말하는 바를 통해서 증거 하는 만큼이나 사는 방식을 통해서도 증거 한다.   

Paul Beasley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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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는 Calvin 신학에서 신학적 원리로 제시한 단일 예정(single predestination)과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중에서 어느 것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Augustine과 Luther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단일 예정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739년 4월 29일 주일 아침, 그의 전체 설교 사역 가운데 한 획을 긋는 한 편의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로마서 8장 32절에서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이며, 제목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예정에 따른 결론은 대다수의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속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절대적으로 구원하지 않을 것을 작정했다고 믿는다. 이는 그들을 멸망당하도록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죽음을 명하시면 저주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든, ‘간과’이든, ‘단일 예정’이든, ‘영원한 멸망’이든,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하고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Wesley는 신학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Calvin의 모든 신학적 변주(變奏)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술어들이 뜻 하는 것은 분명하다.  Calvin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한편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구원받게 되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믿는 것과 상관없이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Herbert Boyd McGonigle는 Wesley가 증거 한 설교, 『Free Grace』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설교는 신학적인 대작이다. 예정에 대한 이 첫 번째 설교와 출판물은 Wesley가 교리적으로 반칼빈주의(anti Calvinism)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Calvin과 Calvinist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설교에서 대상으로 삼은 것이 Calvin의 무서운 결정, 즉 ‘잔인한 작정 교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Wesley는 이 설교를 한 다음 날 “난 잔인한 작정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라고 선언했다. 

Wesley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설교를 조금 더 들어보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하는 것이 모두 다 공허한 일이 된다. 이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다. 설교를 듣던지 아니 듣던지 간에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는 유기된 자들에게는 헛된 일이 된다. 선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소용없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와 상관없이 그들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헛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Calvin의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ism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단지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복음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눅 15:3-5),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지겹도록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예정)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거을 예견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Wesley 역시 Calvin의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성화를 직접적으로 소멸시킨다. 그 교리 자체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화를 추구해야 함을 파멸시키는 뚜렷한 경향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성결함을 따르고자 하는 맨 처음 동기들을 전적으로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 자에게는 인생의 싸움을 경주하게 할 아무런 동기가 되지 못한다. 자기가 영생이든, 사망이든 둘 중의 하나로 이미 판결이 났다고 믿는다면 성화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예정의 교리는 성화의 몇몇 특별한 가지들, 즉 온유함과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잘라 버리는 경향이 있다   

Wesley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Calvin은 하나님의 다른 특성들, 즉 사랑(요일 4:16), 거룩하심(시 99:9), 의로우심(계 15:3), 공의(사 5:16), 선하심(시 34:8)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Wesley는 말라기 3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었다.  이것이 성경적 사실이라면, 영생의 선물(요 1:12)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불변한 사랑(약 1:17)과 선하심(시 86:5) 역시 포함된다고 그는 믿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명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즉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이다”(막 16:16).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영적인 자살을 범하고 있었다(요 8:21-24).  Wesley는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과 관련해서 개인의 삶에 영향력을 가지고 저항할 수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보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의지라는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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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predestination)이란 용어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이미 정해 놓았고, 인간의 다른 조건들도 이미 하나님이 정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었다.  즉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의 원인을 정하심이라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의 차원에서 ‘섭리’(providence)로 알려졌다. 섭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와 사람들을 위하여 명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 전에’(엡 1:4) 이미 주어진 명령이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러한 명령은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섭리’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요약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온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먼저 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주장한 Calvin의 말을 『기독교강요』에서 들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과 생명이 없는 피조물뿐 아니라 사람의 계획과 목표에서 시작하여 예정된 목적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주관한다고 선언한다”  Calvin은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가 자연적인 사건이든 인간의 결정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의 발생을 세밀하게 명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세심한 섭리’(meticulous providence)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원한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영생을 얻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기로 미리 정해졌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 결과를 얻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거나 죽음을 얻는 것이 예정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저주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Calvin신학만이 보여주는 성격이다.   

성경에는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용어가 하나님께서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같은 방법으로 실행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 다지 좋은 용어가 아니다.  그런데 Calvin은 ‘이중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신학 곳곳에서 이러한 개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온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 조명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영원한 멸망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처절하게 버림받는 유기자들이 있다는 관점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였다.  이렇게 미리 선택받은 사람들과 진노받을 사람들을 정한 것을 Calvin의 추종자들은 ‘이중 예정’이라고 명명하고, 그들의 개혁신학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온건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 자들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지만,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t)와 다르게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이되,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건적이라고 믿었다.

Calvin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따로 선택하셨다는 Augustine과 Luther의 신학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이 저주받을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때로 ‘단일 예정’ (single predestination)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셨으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 ‘간과’(preterition)해 버렸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간과’라는 말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사람들을 방치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Calvin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응답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예정되었다는 교리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작정 교리는 잔인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여기에서 ‘잔인한 작정 교리’란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면서 설명한 유기의 교리를 가리킨다.  Calvin은 하나님께서 유기의 창시자라는 생각에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생각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것이 잔인하고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러한 예정에 관해서 Calvin 자신도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두려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관해 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예정을 굳게 믿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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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3. 10. 11:25

『What Love Is This?: Calvinism's Misrepresentation of God』의 저자 Dave Hun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 안에서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은 서로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정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주지만 선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념 간에 미묘한 차이는 이것이다. 선택은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인 반면 예정은 최종적 운명을 위해 그렇게 선택된 이들을 미리 선정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이 두 단어가 의미상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요약하면 선택과 예정은 자기 개념 속에 서로 함축하고 있는 상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Reformed 전통에서 ‘예정’은 상당히 폭이 넓은 단어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수여자(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신자를 위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완전히 구원에서 제외된 불신자를 위한 ‘유기’(reprobation)의 양면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선택과 유기의 대상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영생으로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호의에 근거한다.  반면에 영원한 정죄로서의 ‘유기’는 하나님의 심판,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다.  지난 2천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놓고 살벌하게 논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Louis Berkhof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작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선택이든 유기이든 간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모두 일으키신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 죄가 개입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예정하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로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Systematic Theology』에서 나오는 Berkhof의 말이 사실이라면 Calvin의 예정론을 비판하다 Geneva에서 추방된 Jerome Hermes Bolsec의 주장이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는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며 Calvin을 고소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Calvinism 신학에서 타락 후 선택론(Infralapsarianism)과 타락 전 선택론(Supralapsarianism)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Calvin의 추종자들 보기에 이것이 좋은 전통이라고 자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전통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이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이 용어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논쟁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Reformed Theology에서만 가지고 있는 골치 아픈 전통이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Calvinist 입장에서 예정의 근거 본문을 비스름하게 제시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그것이 창세기 6장 8절, 12장 1절, 신명기 10장 15절, 14장 2절, 예레미야 1장 5절, 말라기 1장 2-3절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여섯 번 정도 나온다(행 4:28, 롬 8:29, 30, 고전 2:7, 엡 1:5, 11).  특별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사용된 경우에는 모두 사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예정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의 ‘프로오리조’(proorizo)다.  전치사 ‘프로’는 ‘~전에’, 또는 ‘~앞에’라는 뜻이 있고, 동사 ‘오리조’는 ‘제한하다’ 또는 ‘결정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 둘은 합쳐진 합성동사로 문자적인 의미는 ‘앞서 결정하다’, ‘미리 경계를 정하다’가 된다. 

영어로 ‘예정하다’(predestine)로 번역된 것은 ‘‘종국적인 운명을 결정하다’라는 뉘앙스(nuance)가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그 뜻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로마서와 에베소서에서는 영어의 뉘앙스가 담긴 의미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미리 결정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접두사 ‘프로’(~전에)는 에베소서 1장 4절과 요한계시록 17장 8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결정이 일어난 시점이 창세전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은 영생을 주려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유기는 비택자들을 영원한 정죄에 처하도록 정하시는 것을 말한다.  

Calvin에게 있어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of God)이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그의 뜻에 따라 미리 정한 것을 예정(豫定)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설명할 때 Bernard와 Augustine, 그리고 Melanchthon의 글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예정을 주장하고 강조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Calvin은 하나님의 주권을 핵심이 되는 조직 원리로 삼는 예정 교리를 완전히 체계화했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예정의 교리를 반드시 성경에서만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Calvin의 추종자들 역시 이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다. 

그러면 Wesley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Calvin의 절대 예정론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주장한 것처럼 ‘조건적 예정’(conditional predestination)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조건적 예정은 예지(foreknowledge)를 기초로 한 예정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또 보시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아시고 구원으로 예정하신다는 것이다(롬 8:29).  예정에 대한 Wesleyan의 핵심은 바로 예지의 역할이다.  그러면서 그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명 Calvin과 Wesley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을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된 명령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본다.  즉 예정이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이 어떤 이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며, 무조건적인 선한 기쁨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이들이 아닌 이들을 선택하심에 있어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신 것은 전혀 없다.   

반면에 Wesley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의 능력에 달렸다고 본다.  즉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함으로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을 제공하셨다.  하나님은 이 조건을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충족시키시는지에 대해 예지 하시고 이를 기초로 해서 선택하신다.  따라서 선택은 조건적이 되는 것이다.  Wesley의 신학이 잘못된 것인가?  Calvin의 ‘예정론’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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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칼빈과 웨슬리 2024. 3. 3. 12:13

‘수다한 사람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교묘히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말에 사용된 동사는 부정하게 ‘이윤’(利潤)을 얻기 위해 순수한 원액 포도주에 물을 넣어 희석시킨 포도주를 파는 행상인들에게 사용하던 단어였다.  당시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자신들만이 유대 법과 연설법을 훈련받은 전문적인 설교자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인 보화를 파는 ‘밀매인’(NRVS) 혹은 ‘장사꾼’으로 보았다.  우리말 성경에는 ‘혼잡게’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서신의 뒷부분에서 이들을 ‘거짓 사도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사탄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11:13-13). 

성경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다룰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금의 문제는 장사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술에 물을 타는 것처럼 신학자나 목사가 개인의 명예와 탐욕으로 인해 성경을 신학적으로 묽게 만들어 ‘자기 해석’(eisegesis)을 한다.  만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가르친다면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고전 4:6) 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 밖에 넘어가 신학적 용어와 신학자의 말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자기 해석이 꼭 맞은 것 같이 기를 쓰며 주장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바울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할 때, 신학자들의 말을 들먹이지 않았다.  심지어 철학적인 사람들이 살았던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도 신학적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복음 전파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피력했다(행 17:16-34).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는 어떠했는가?  그 역시 학자이자 웅변가이지만 복음을 증거 할 때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통해 유대인들의 말을 이겼다(행 18:28).  다시 말해 어떤 신학적 이슈(issue)를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거나 같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은 관종이나 할 짓이지 목회자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고전 13:12) 해석할 뿐이다.  이번 글만큼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성경은 ‘예정’(predestination)을 가르치고 있는가?(엡 1:5).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성경에서 나온다.  그중 하나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대하여 강한 말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여기서 ‘작정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배치하다’ 혹은 ‘할당하다’를 의미하는 군사적 용어다.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작정된 자’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유대인(신 7:7)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거기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골 3:11). 

바울은 에베소서 첫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를 두기 이전에 선택하셨음을 주장했다.  ‘곧 장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  특별한 목적이나 운명을 위해 개인이나 공동체(community), 혹은 그룹(group)을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은 선택교리(doctrine of election)의 기초가 된다.  가능한 신학적 용어조차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창 12:3, 신 7:6-8, 11).  즉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엡 1:5, 11)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엡 2:8).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딛 3:5).   

또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곳 신자들이 믿게 된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이유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그들이 신앙을 가지자 바울은 결론 내리기를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들이 믿었다고 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 2:13).  그 외에도 바울은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에 관해 언급할 때(살후 2:13), 그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딤후 1:9)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계획된 무조건적인 은혜때문임을 강력히 주장한다(롬 8:28-30, 9:11-13, 살후 2:13, 딤전 5:21). 

그렇다면 선택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든 어차피 구원을 받는 것인가?  바울의 행적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바울은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머문 도시는 고린도였다.  고린도 도시에 선택받은 자들이 많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행 18:9-10), 바울은 그곳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증거 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말씀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바울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롬 10:14, 17).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가 전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었다(막 16:15-16).       

여기서 궁금한 것은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엡 1:4-5)은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살전 1:4, 2:13).  하지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 다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11).  오래전 이사야는 이 같은 불신앙을 이미 예견했다(사 53:1-3).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땅’(His own/NKJV)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민족’(신 7:7) 그리스도의 소유였던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헬라어로 ‘그가 그 자신의 것들에게 오셨다’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한 것이다(요 12:37-41).  당연히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외면했다.  도대체 유대인들은 누구를 영접하는 것인가?  요한복음 5장 4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메시아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사람’(엡 1:4)도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34절 말씀은 어떠한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어미 닭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의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하셨다.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단 한 번만이 아닌 것 같다.  구약 성경의 몇몇 구절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롯 2:12, 시 17:8, 36:7, 61:4, 63:7, 91:4).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분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선지자들을 배척하였듯이(마 5:12) 이제 메시아를 배척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부하는 것이다(요 5:40).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제안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애통해하셨다(눅 19:41).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 즉 ‘원 가지들’(롬 11:21)도 얼마든지 잘려 나갈 수 있다(롬 11:20).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우는 곳’(요 15:6)이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면 ‘풀무 불에 던져 넣는’ 지옥이다(마 13:41-42).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논쟁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한 구절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이것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것이지만, 세상에는 좋은 눈을 가진 사람과 나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떤 눈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꺾이운 원가지들’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 가지들이 구원을 상실한 참 신자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이 가지는 구원이 아니라 상급을 상실한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 신앙생활을 하던 자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주장들이 생기는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누구든지 신학적 관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런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지(고전 1:12-13)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약 3:13-18).  도대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처럼 성경 그대로 믿고 전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행 2:14-42).  오히려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라는 고통스러운 회개의 반응이 나타난다(행 2:37).  더 나아가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나고(행 2:41)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으기를 힘쓴다(행 2:43-47).              

성경에서 말하는 택하심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미스터리’(mystery)한 비밀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공부를 해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누가 예정되었거나 선택을 받았는지 전혀 모른다.  처음에 잘 믿다가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 같은 사람도 있고(딤후 4:10),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눅 23:42-43).  이런 일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이라 하나님 외에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욘 2:9). 

요지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이다(빌 2:12).  그 이유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히 9:27).  어떠한 심판을 받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이다(마 16:27, 고전 3:12-15, 벧전 1:17, 계 22:12).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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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의 입장은 확고했다.   Calvin이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죄에 대하여 책임 있는 분으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Calvin은 주야장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된 원리’ (determinative principle)라고 일관되게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reprobate)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조금 섬뜩하게 성경을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6).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5)”.  이 난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런데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보면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Calvin은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머리로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Calvin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2004년도 일어난 Indian Ocean Tsunami 역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 10:29).  참새는 시장에서 팔리는 가장 싼 종류의 새다.  세상에서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참새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동의가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참새에게까지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이 귀한 것(마 10:31)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인도양 쓰나미 희생자는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 죽은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누구든지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눅 13:4-5).

최근의 실례를 들어보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이루어진 것인가?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저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 가신다. ….저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도 저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허용’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과 ‘작정’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서 시편 115편 3절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따라 닥치는 대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만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습 2:1-3 참조).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주권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직접 진두지휘 하신다는 것이다(렘 33:2).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겠는가?(삼상 2:6-7). 

여기서 궁금한 것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온 Calvin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압살롬은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추악한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에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살육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15-16, 7:14, 50:25-27).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9). …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 28:21).  …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삼하 16:10)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삼하 16:10-11)”.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게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누구든지 허용’이고, ‘나발’(삼상 25:25)이고, 불합리하게 지껄인다면, 그것이 바로 ‘개소리’라는 것이 Calvin의 입장이었다. 

Calvin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작정(Decrees of God)과 예정(predestinate)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Calvin이 주장하는 것은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라면 Jerome Hermes Bolsec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책임 있는 분으로 만든 것 말이다.  오늘날도 누군가 Calvin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찍힐 수 있는가?  Harry Frankfurt 교수의 말대로 ‘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나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신다’(욥 34:10)라고 성경은 말한다.  바울 역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주장한다(롬 9:14).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냥 속 편하게 시편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또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엡 1:11)이라는 말씀을 믿고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 인권 후진국 한국처럼 ‘입틀막’ 해야 하는가?  논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여기까지만 하겠다.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둘 중에 하나이다.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부주의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안에서 일어난 일인가?  선택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 Wesley는 Calvin의 예정론이 숙명론적(fatalistic)이라고 반대했다.  Calvin의 성경해석과 신학방법론, 즉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신학적 논리에 하나도 동의하지 않았다.  Wesley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인간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이미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 설명을 잘 준비해 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예정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여전히 신비(mystery)로 남아 있는 것으로 분명했다.  그러기 때문에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 아는 것 같이 나대거나 관종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Wesley는 인간이 전적인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쳤다(창 3장).  즉 인간의 원죄,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은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을 인정하였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창 6:5),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말한 빌립보 간수처럼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롬 3:23).  그러나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Calvin과 의견이 엇갈렸다.  Wesley의 입장에서 보면 Calvin의 주장하는 신학적 논거들, 특별히 예정론은 성경적이지 않았다.  Wesley의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Calvin의 예정론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Calvin의 추종자들 보기에는 ‘야마’(山)가 도는 일이다.   

Wesley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서 어느 정도 인간에게 책임을 허용하고 또한 가능케 하신 것을 믿었다.  즉 인간은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라고 강조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응답하고(롬 8:14)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엡 2:8)을 받아들일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막 16:16).  하지만 얼마든지 성령을 거스를 수도 있고(행 7:51),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 수 있다’(갈 3:3).  인간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아담의 죄보다는 그들의 실제적인 죄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겔 18:30-32).  그러므로 인간의 죄성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겔 18:19-20),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 이미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작정과 예정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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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칼빈과 웨슬리 2024. 2. 18. 11:30

성경에 의하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기 전’(시 90:2),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셨고(창 1:1), 자기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 1:26-27).  Calvin과 Wesley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라고 믿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자유의지(free will)다.  자유는 인간이 소유하는 절대적 가치이며 가장 소중한 권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반드시 유익이 있는 반면 책임이 동반된다.  즉,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잘못된 선택, 하와(고후 11:3)처럼 어리석고 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Calvin과 Wesley는 인간이 창조를 통하여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서(창 1:28)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창 3장)를 범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유전된 영향(롬 5:12)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불렀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죄는 인간의 영혼 모든 영역에 퍼져 있는 유전적 타락이고 본성의 부패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하고, 다음으로 성경이 경고하는 육체의 일(갈 5:19)을 우리 안에 행하도록 한다.  … 아담으로부터 벌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원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노아의 홍수 때 지면에서 쓸어 버릴 정도로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타락하였다고 믿었다(창 6:5-12).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의 성격이 집중적이기보다는 광범위하다고 보았다.  죄는 인생의 전반적인 모든 차원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Wesley는 원죄의 교리에 대해 어떠한 주장을 하였는가?  그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믿었다.  『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A.m.: Original Sin』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자.  “성경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단언한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타락하고 죄로 가득 찬 아담은 자신과 똑같은 아들을 낳았다. … 결과적으로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고,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세상을 살았던 자들이다” 

그리고 『The Image of God』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원죄는 타락이며(롬 5: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반드시 필요하다(행 4:12)”.  그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창 1:27)이 죄를 범함으로 파괴되고, 또한 주어진 자유와 행복이 무너진다고 보았다(창 3:16-19).

Wesley는 원죄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의 전체적 구조를 부인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의 초대 학장 John Taylor 박사는 ‘원죄에 관한 성경 교리’(The Scriptural 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라는 논문을 통해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입장에서 원죄론을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자 Wesley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이라는 논문을 써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한 것입니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입니까?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만큼 진정한 성도이며, 부정한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불신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짓기를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하려는 자를 이교도라고 분명히 규정할 수 있다”  원죄의 교리는 기독교와 이교도(異敎徒) 사이를 구분 짓는 중대한 ‘기독교의 교리’라고 강조한 것이다. 

Calvin은 인간의 책임(responsibility)과 의무(duty)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을 주해하면서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원죄는 육신의 출생에 의하여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부패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상정(想定)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아담)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天稟)을 가지며 또 잃어버리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 

결국 피조물인 인간은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 1:11) 하나님의 예정대로, 그러나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타락했다.  Calvin에게 있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일어나지만(창 1:3),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命題)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Calvin은 이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계획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있는 존귀한 존재임을 감안할 때(창 1:26-28), 인간의 죄성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죄는 언제나 인간의 잘못이었다. 

이러한 죄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지 사람에게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Calvin이 살았던 시대에 크게 일어났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Calvin의 예정론과 은총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Jerome Hermes Bolsec이었다.  그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반대 의견을 과감히 내세우며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며 Calvin을 고소했지만 결국 기소되어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Calvin의 관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Calvin과 Geneva 사람들은 그러한 도전을 살벌하게 배척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에 반하는 주장을 하거나 다른 견해를 가지면 Reformism  목사들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는 패역하고 부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Wesley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삶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결과적으로 범죄 하여 타락하게 했다고 믿지 않았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고(창 1:27) 은혜로서 창조 이전이나 이후에 참된 자유의지(free will)를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조종받는 Robot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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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evangelicalism)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고 말한다(욥 42:2).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피조물을 다스릴 주권과 능력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시 135:6).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욥 2:1) 간에 모든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다스리신다(빌 2:10).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미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잠 21:1),  즉,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것과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주신다(출 9:16).  따라서 그분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엡 1:11).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일을 정하실지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1:5).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하여 수많은 구절들이 드러나 있다(시 115:3, 잠 16:9, 단 4:34-35).  이미 충분한 성경구절들을 위에 열거했지만, 에베소서 1장 11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이유를 조금 더 제시하겠다.  먼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고 기본 주제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우리의 구원이다(엡 1:4).  이 구절에 따르면 신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구원받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엡 1:9).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과 뜻을 따라 구원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을 포함하여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God's sovereign rule)와 인간 구원에 대한 선택(choice for salvation)을 말해 주고 있다.

먼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계획)에 따라’(11절)라는 구절에 관하여 주석가들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한글 성경에서는 ‘뜻’과 ‘계획’을 중복하여 번역하고 있지 않고, 두 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런데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뜻’(Thelema)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말한다.  반면에 ‘계획’(Boule)은 목적을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을 나타낸다.  따라서 11절의 정확한 해석은 John Eadie의 말대로 ‘심사숙고하여 세워 놓은 계획’을 가리킨다.      

Brooke Foss Westcott는 『St. Paul's Epistle to the Ephesians』에서, 이 구절의 근본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현명하게 이루어지도록 숙고(熟考) 한 후에 선택(choice)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Charles Hodge가 말한 것처럼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라는 것(롬 8:29)과 하나님의 선택(요 15:16)은 예견된 행동이나 인간의 공로 등과 같이 하나님의 무관한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렘 33:2).

하나님의 생각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자신이 목적과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선택하시고 성취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까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창 1:3), 다른 행위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충분히 그리고 단독적(stand-alone)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시는 일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요 15:16)과 천사(히 1:14) 등의 대리(代理)를 통하여 이루어 내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피조물에게 발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문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 방법인 예수님 조차도(행 4:12)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가 되었다’(행 2:23).  의사 누가는 ‘할당하다’, 혹은 ‘배치하다’라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행 13:48).  사도 바울도 ‘원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롬 9:16).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신다’(롬 9:1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든 구문(構文)들 중 최고로 강한 구문이다.  성경은 인간 사건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증거 한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Calvinist들은 열광할 것이다.  Calvin이 Geneva에서 살벌하게 목회하던 것처럼 TULIP에서 벗어난 모든 신학과 신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망나니 같은 서슬 퍼런 신학적 칼 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요 16:2).  바울이 가장 좋은 본보기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가졌던 신학은 ‘카타르시스’(Catharsis)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응어리’를 밖으로 분출할 때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데 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통해 성취감을 가진다(행 9:1-2).  심각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행 26:9-11, 갈 1:13-14, 빌 3:6).  이 증세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정신 질환의 일종인 사이코패스(Psychopath)다.              

그런데 하나님도 Calvinist들이 독선에 빠져 절대적 주권만을 강조할 것을 아신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John Wesley를 준비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먼저 J. I. Packer의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개의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성경적으로 제시하겠다.  신구약 성경은 자유가 전제되어 있는 선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봇이 아닌 이상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결과는 불순종이었다(창 3장).  아론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슷한 선택을 제시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줄 한번 잘못 서서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사람들이 삼천 명이었다(출 32:25-29).  예배드리는 문제는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 속에는 선택이 있었다(수 24:15).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강력한 메시지다(마 6:24).  엘리야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사이에 머뭇거리지 말 것’을 재촉하였다(왕상 18:21).  혼합 종교가 판치는 시대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통해 중요한 선택을 주셨다.  요한복음 5장 40절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선택을 잘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눅 13:34).  예수님도 불가항력적 은혜(?)가 자유로운 선택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설득적인 것이지 강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일 4:9-10).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은 강간을 못 하신다. 사랑을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를 제압(制壓) 하는 건 하나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상 명령을 통해서도 마지막 선택권을 주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요 5:24).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하시지만(벧후 3:9)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 5:4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눅 7: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들은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사실상 거절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절할 수 있으며 실제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 앞에 이행할 의무를 펼쳐 놓지만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도록 Remote control로 조종받는 Robot이 아닌 지, 정, 의를 가진 한 사람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자유로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엡 2:8)라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롬 10:9-10)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主管)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약 두 개의 신앙 중 하나만을 믿는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믿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관계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것이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Augustine과 Pelagianism 사이에서 살벌한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이다.  칼빈주의(Calvinism)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Dutch Reformist) 사이에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못지않게 쓰디쓴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행 23:6-10).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Calvinist들이 심하게 논쟁하면서 영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딤 3:9).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딤후 2:23)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도 없어져야 할 전통이다(딤전 4:7,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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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속죄

칼빈과 웨슬리 2024. 1. 14. 11: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가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일 2:2), 아니면 그가 이미 알고 계셨던 구원받을 자들만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 17:9)  이 부분에서 Calvin과 Wesley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롬 8:22).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국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대속(vicarious)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롬 8:33).  이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모든 사람(딤전 2:6)을 대신하지 않고 오직 선택(election)된 사람만(요 17:9)을 위해 죽었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과 멸망당할 사람들을 오래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멸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정당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고 볼 수 있다” 

‘제한적 대속교리’라는 표현은 Calvin이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다.  하지만 후대의 Calvin 추종자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Calvin의 신앙 체계 안에서 논리적 함의(含意)가 되었다.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특별 구속(particular redemption) 혹은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는 Calvinism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는 매우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다.  왜냐하면 같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과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가?”(사 55:8-9).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다음에 죄를 세상에 허락하셔서 그 죄로부터 선택받은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반면에 타락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를 세상에 허락하시고 그다음에 죄로부터 선택받은 일부를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이 신비를 해결하도록 하기 위한 자료나 뒷받침할 만한 성경구절들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양쪽 진영 모두가 옳은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추상적인 신학적 용어(타락 전, 타락 후,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들을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학이 개혁신학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Calvin의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에 기록된 말을 들어보자.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온 세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과연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이 말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난독증이 걸리지 않은 이상, 이 말은 확실하게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는 구절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딤전 2:6).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는 Calvin은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를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의 문만 열어 주신다”  Calvin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 힘으로는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강조했던 학자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궁금한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Reformed Theology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Calvinist들은 이에 대한 답변은 분명 이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위해 어떤 이를 무조건 선택하고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 즉 항거할 수 없는 은혜를 그에게 적용시켜 구원이 일어나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은혜로운 일이다”  이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진다면 쓸데없는 논쟁과 논란을 야기시킬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솔직히 Calvin 자신도 이 문제를 가지고 오락가락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자에서는 ‘보편속죄론’ (universal atonement)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최종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선택받은 사람들, 즉 ‘제한속죄론’(unlimited atonement)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esley는 대리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limited)이란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속(universality redemption)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Calvin 추종자들, 특별히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들은 Wesley의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격은 Wesley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과 구원의 수용과 거부에 대한 결정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왔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을 제공하지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자(요 12:32, 딛 2:11), ‘온 세상’을 위한 것이며(요일 2:2), 하나님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그 조건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요 3:15).  다시 말해 믿음에 의해서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막 16:16).  지면 관계상 몇 군데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겠지만, 특별히 성경이 믿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 구원을 가르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 3장 18절, 3장 36절, 사도행전 16장 31절의 구절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물론 Wesley의 이러한 주장에 Calvinist들의 답변은 뻔하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Wesley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해 말할 때, 성경은 우리를 기계적인 피조물이나 로봇으로 보지 않았다(계 22:17).  즉 복음을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인 피조물, 즉 참된 인간으로 보았다(마 23:37).  달리 말하면 속죄 사역의 범위에 있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는 한 어떤 죄인이라도 구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요 5:40).  더 나아가 선악과에 관해 아담에게 하신 말씀 안에는 잘못된 선택(불순종)을 벌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창 2:16-17).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거나(히 10:29), 가지고 있는 양심과 믿음마저도 얼마든지 파선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딤전 1:19).

작금의 Calvinist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다.  Calvinism의 5대 강령에 하나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를 강조하는 것이다.  외적 소명(external call)이 아닌 내적 소명(internal call)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강력한 입장이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Calvinist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아 영생의 유익을 누린다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온건 칼빈주의자(Moderate Calvinist) Norman Geisler는 TULIP의 맨 마지막 항목만을 인정하는 신학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누구든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믿으면 된다(롬 12:3).  궁극적으로 속죄에 관한 가르침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유비(類比)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는 일의 비밀을 다 아는 것처럼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Wesley의 말을 인용하면 “속죄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려 든다면 결국 목적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미로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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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우리에게 자격이 없는데도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다채로운 선물들을 가리킨다(약 1: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명코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자비롭게 유보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구원, 그리고 영생이라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들을 허락하셨다.  우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소송이 우리를 유죄(有罪)라는 필연적인 판결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요구한다.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엡 2:9).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갈 2:16).  사람의 믿음 그 자체는 ‘행위’로 여겨져서도(갈 3:2), 누구든지 자랑할 근거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전 1:29).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요 3:16).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을 주셨다(딛 3: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딛 3:3)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의로운 일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었다(롬 3:27).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딤후 1:9)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요 4:10).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벧전 2:24)과 부할(롬 1:4)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하였고(요일 2:2),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요 14:6)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셨다(고후 6:16). 조금 더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표준 구절로 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을 제시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이것이 형벌을 대속할 존재가 필요한 이유였다.  죄를 속하지 못하는 동물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히 10:4).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었다(히 9:25-26).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었다(행 4:12).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징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의와 거룩하심을 충족시키신다(롬 3:25).  그와 동시에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신다(롬 3:26).  Justin Taylor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로 향하지만 성자가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가 그에게 쏟았진 것이다.    

교회사에는 이러한 대속(vicarious)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이 등장하였다.  먼저 구속과 동의어로 쓰이는 대속(代贖)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 받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리신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킨다(히 9:12).  영어 어원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at-one-ment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준비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있다.   

사실상 신학자들 사이에서 속죄(atonement)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면서도 이견(異見)이 많은 문제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 논쟁의 핵심으로 제기된다.  특별히 형벌 대속이라는 견해는 속죄에 대한 표준적인 개혁주의적 접근법의 특징을 이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그런 접근법을 수용해 왔는데, 그중에는 Charles Hodge, William Greenough Thayer Shedd, Louis Berkhof, John Murray, Lean Morris, John Stott 같은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형벌 대속론의 뿌리는 John Calvin의 저작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Calvin은 역사적인 대속(atonement)의 교리를 확정하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죄의 결과로 희생 제물(sacrifice)이 되어(히 10:14) 무서운 심판(롬 5:16)과 영원한 죽음(롬 5:14)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마 20:28).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필요한 값을 치르셨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죄가 없는 판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징벌을 받아야 할 죄를 범했지만, 그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로 옮겨졌지 때문’이라고 말한다(사 53:12).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징벌(punishment)을 직접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Calvin의 대속교리는 인간의 행위를 대신한 예수의 객관적인 구원 사역에서 법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에 때때로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속적 희생을 가리킨다(막 10:45).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여기서 대속물(ransom)은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代價)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속전(贖錢)을 치르셨는데, 거기에 요구된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갈 3:13).  후에 베드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기록했다(벧전 1:18-19).  이 희생으로 사람이 지은 죄의 형벌을 용서를 받게 하시고(롬 5:9), 의를 전가하시고(고후 5:21),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롬 5:10).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죄 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리(代理) 대속이다.

그렇다면 Wesley는 징벌을 대신하는 대속의 관점에 대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다”  특별히 Wesley의 설교들 가운데 그가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와도 구별되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설교가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Works (Bicentennial Edition)이다.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독교 체계 내에서 속죄 교리는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이신론과 기독교 사이를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점이다”  이 설교는 당시 만연하던 ‘선천적 의지론’과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구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Wesley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보았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엡 2:1-3),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 10:12) 즉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히 9:12)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스스로 우리의 죄(고후 5:21)와 죄책(갈 3:10)과 형벌(요 1:29)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Wesley는 복음의 본질인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가에 대해서는 Calvin의 주장과는 엇갈렸다.  다시 말해 Wesley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것’이지 단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사 53:6)처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막 16:16)이 있다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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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라는 설교에서 “결단코 사람에게 있는 여하한 능력이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값없이 내어 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롬 8:32) 그런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다”  그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闡明)했다.

이러한 메시지를 증거 한 Wesley는 Calvin 못지않게 성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Calvin이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거룩한 감동(벧후 1:21)과 신앙적 권위(Authority) 그리고 신뢰성(Reliability)을 굳게 믿었다.  그의 『설교집』 서문에서 Wesley는 성경의 중요성(Importance), 특히 구원에 있어 성경의 유익함을 말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한 책(성경)에 이 일을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책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것이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책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평생 성경 한 권만 읽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증거 하는데 있어 성경 말씀에는 생명을 걸었다.

Wesley는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서 성서의 권위에 우선성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백 년 후에 활동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개신교회와 Roman Catholic Church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Wesley는 『The character of a Methodist』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 충분한 규율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Roman Catholic Church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정경화(Canonization) 되고 전파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딤후 3:16)을 원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믿었다.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 2』 에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성경은 가장 중요한 인도자이지만 모든 면에서 규율(規律) 대로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규율이 된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성령을 안내자로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를 의미하고, 성경을 규율이라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가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Wesley는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A Clear and Concise Demonstration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s, Works』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만드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 크고 놀라운 증거가 있다. 바로 기적(miracles)과 예언(prophecies), 교리의 완전함(good of the doctrine) 그리고 성서 기자들의 도덕성(moral character of the penmen)이다”

Wesley는 성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엄청난 독서의 사람이었다.  단순하게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론(Ecclesiology)과 신학의 발전을 포함하여 400여 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또한 교회사에 능통한 Oxford University 교수였다.  영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외에도 다른 외국어에 능통한 그는 많은 책들을 읽고 편집하고 집필하였다.  이미 16세기 개혁주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서양의 고전으로 시작하여 논리학(logic)과 수사학(Rhetoric)을 성서와 함께 읽을 것을 권면했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s』이라는 글에서 오직 성서연구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감리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서의 연구는 최고의 열정이다. 만일 성서 외에 다른 책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도 다른 책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책들을 가져오라. 특별히 양피지에 기록된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딤후 4:13). 그러나 나는 그 책들을 읽어도 마음속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책들도 읽어 그 맛을 보기 바란다. 그러나 곧 다시 돌려주도록 하라”  성경이 확실하게 좋고 유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목사가 되지 않으려면 다른 책들도 보충자료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과 영성과 사역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위격과 역사를 넘어서는 방대한 자료들을 배제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Wesley는 평생 Church of England의 서품 받은 사제(Priests)로 살았으며, 흔들림 없이 그 전통에 신학적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은 영국의 개혁자(British Reformers)들이었다.  그들은 Roman Catholic Church과 대륙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중도의 길’(middle way)을 모색하는 자들이었다. Anglicans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어 성서와 교회 전통 가운데 신앙적인 권위를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적 권위의 우선성(Priority)과 함께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에도 합리적으로 이차적인 권위를 부여할 것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만을 절대적인 ‘신조’(信條)로 내세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과 차별성을 가졌다. 

Wesley는 성서와 신학,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Humanism)와 명목주의(nominalism)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Luther와 Calvin의 교육과정에 깊이 퍼져 있던 일반적 사상의 흐름이었고, 그들의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달리 말하면 Luther와 Calvin이 오직 성서만 의지했다고 믿는 것은 착하고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잘못 배운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빈틈없이 세밀한 신학자로 이성의 능력을 신봉하는 당시의 흐름을 이미 숙지(熟知)하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말이 ‘오직 성경’이지,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 없이 ‘오직 성경’ 한 권 만을 연구하는 가운데 살았던 것처럼 믿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아는 것이 개신교회의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알아 가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Wesley는 교회 전통과 비판적 사고를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 유용한 도구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Anglican Church의 중도의 길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그는 이 방법론(methodology)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서’(Sola Scriptura)의 원칙과 대립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Wesley는 항상 성서의 권위(Authority)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서 성서의 권위를 높게 부여하였다.  설교와 논문을 모은 『Work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전집에서 나는 진지하고 솔직한 독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나의 신학적 견해가 성서와 이성, 그리고 초기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그의 생각은 초기 기독교가 가장 성경적이고 순수한 시대의 교회 가운데 초대교회의 신앙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Aldersgate에서 성령을 체험한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을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생생한 실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실재를 구체적으로 느꼈고, 이는 성경의 약속을 비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신앙의 올바른 근거로서 체험을 확신하면서 감정의 변화와 체험을 분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A Farther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Part 1』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 본문들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 본문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고전 2:10)와 성령의 감동(벧후 2:21) 그리고 예수의 영(행 16:7)이 그들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느끼는 신자들의 감정을 분명하고 이성적으로 발견할 것이다”

Wesley는 성령의 임재(계 1:17), 즉 성령의 증언(롬 8:15-16)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Calvin은 성경의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성령의 증언(요 14:16)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Wesley는 신자의 삶의 여러 차원들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임재의 경험적인 유효성 역시 중요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유효한 확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이차적일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성령의 체험(행 9:1-19, 고후 12:1-10)이 성서의 우선적인 권위와 함께 전통과 이성의 차원에서 신앙의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그는 성서(Scripture)와 전통(Tradition), 이성(Reason)과 체험(Experience)을 신앙의 권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가리켜 ‘Wesley의 사변형’, 혹은 ‘Wesley의 사중표준’(Quadrilatera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리교 신학자 Albert C. Outler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로, Wesley의 신학방법론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물론 Wesley는 이러한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Calvin이 ‘오직 성서’(Sola Scripture)라는 신조를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Wesley와 결합된 용어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한 관점들, 즉 ‘사변형’을 제시하였고, 이 네 가지는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경이 궁극적인 원천이며 모든 신학의 일차적인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이차적인 동시에 성경을 위한 보충 자료로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Wesley의 사변형이 신화(myth)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만약 이렇게 따진다면 Calvin이 말한 적이 없는 ‘오직 성서’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단 사냥꾼처럼 얼마든지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질 수 있지만 유익이 없기 때문(딤전 6:3-5, 딛 3:9)에 여기까지만 하겠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신화는 성서의 권위에 관한 탁월한 강조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신화다.  ‘사중 표준’과 ‘오직 성서’라는 방법론은 두 사람의 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관점 차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Calvin과 Wesley모두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위를 굳게 믿었다.  또한 두 사람은 성경이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권위가 있으며(시 119:33-34), 신뢰할 만(잠 3:3) 하다고 믿었다.  특별히 두 사람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탁월한 연구와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Calvin은 종교개혁의 구호가 된 ‘오직 성서’를 주장한 인물로 알려졌다.  반면 Wesley도 성서적 권위가 우선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차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신학적으로 다른 권위들도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적 기독교와 성도의 삶 속에서 일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확인하는 올바른 체험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관점에서 신자들의 매일 삶을 힘들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궁금하다.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하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성경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다(히 4:12).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기’ 때문이다(마 8:16).  신자가 병들었을 때, 혹은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삶의 어려운 문제에 빠졌을 때, 목사가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고 메마른 말씀을 전한 것이다.  비위가 상하겠지만 이것은 목사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례비를 위해 강대상 위에서 원맨쇼를 보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이 ‘오직 말씀’(마 8:5-12)이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훈련받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부족해서 능력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이유 말이다(눅 24:49).   그 당시 이미 기록된 성경이 있었다.  작금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주야장천 ‘오직 성경’만 강조하면 되지 않을까?  듣기 거북하겠지만, ‘오직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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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신자들에게 통치하는 창조주(창 1:1)이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사 43:3)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하여 성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경’(眼鏡)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겨우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경을 쓰면 똑똑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성경이 선지자(행 3:21)와 사도(행 1:2)와 그리스도(히 1:2)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벧후 1:21).  완전함(시 19:7)과 영원함(시 119:10) 그리고 능력 있는 권위(행 20:32)는 오직 성경 밖에 없고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Calvin의 성경 이해는 Roman Catholic Church의 성경관과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Catholic Church는 정경화 과정(canonization process)을 포함하여 교회의 권위(authority)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성경을 포함하였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 지도자들과 공의회(councils) 그리고 교회의 결정을 통하여 역사하고 정경(canon)의 내용을 정했다는 입장이다.  초대교회가 성경을 성문화하였기 때문에 역사적(historically)으로나 신학적(theologically)으로 교회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선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Calvin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성경의 감동과 권위만을 인정하고(벧후 1:21), Catholic Church의 입장에는 일절 동의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에 기록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自證)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이성(理性)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교회의 모든 권위가 성경에서 나오기 때문에 교회는, 특별히 Catholic Church 은 제멋대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 성경의 단순성(simplicity)은 성령의 감동과 권위 그리고 신뢰성을 확증한다.   

Calvin은 요한계시록을 빼놓고 성경  대부분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성경해석, 즉 전문적인 성서해석(biblical interpretation)의 이론(theory)과 실제(practice)를 연구하는 해석학적(hermeneutic) 접근에 서투르지 않고 노련했다.  당대의 최고의 학문과 인문주의 학문(humanistic studies)을 배운 그의 성경 해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기억할 것이 있다.  Calvin은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 일어난 19세기 이전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의 성경해석학을 후대의 발전된 차원과 비교하는 것은 낡고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대와 중세 교회 성서해석의 실재적인 유산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해석가들, 즉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와 인문주의자 Desiderius Erasmus, 그리고 Luther와 함께 종교개혁에 힘썼던 Philip Melanchthon과 1.5세대 종교개혁가라고 부르는 Martin Bucer 등의 해석학을 인지(認知) 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연구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능숙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 즉 literal(historical) 역사적 문헌과 allegorical(symbolic) 상징적 비유 그리고 topological(moral) 윤리적 유형과 anagogical(metaphorical) 비유적 유추의 방식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Commentaries and Prefaces』에서 Raymond A. Blacketer는 Calvin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Calvin 당시의 다른 주석가들과 비교할 때 추상적인 주석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영적 감각을 중보적으로 사용하는 ‘사두마차’(Quadriga) 즉, 네 가지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서해석 방법론을 자주 비판하였다. 본문에 대한 본능적(Instinctive) 느낌과 문헌적(literary), 그리고 역사적(Historical)이며, 직설적인(Straightforward) 의미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Calvin은 Luther의 주장처럼 성경의 명료성(clarity)은 사람들이 스스로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난해하거나 숨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tholic Church는 성경의 해석이 전적으로 교회의 권한에 두었다.  하지만 Calvin은 각 사람에게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 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으로, 때로는 광신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면 현재에 대한 예언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였다.  그의 비판은 하나님이 성경보다 교황(Pope)과 주교(Bishop)들에게 가르치는 권위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Catholic Church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Calvin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Calvin은 성경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사람들의 주장도 배격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정부 간 관계의 고리를 끊고, 교회 모델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Anabaptist 사람들을 지적한 것 같다.  Calvin은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이 성경을 초월하여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容認) 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 밖에’(고전 4:6) 넘어서는 계시(啓示)라는 주장들로부터 지켜주는 확실한 안전장치다.

Luther는 그리스도의 믿음과 실천을 결정하는 성서의 권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Calvin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종교개혁의 첫 번째 원리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차용(借用)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Calvin은 이 짧은 어구를 『기독교강요』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에 담긴 본질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Luther는 1521년 Diet of Worms에서 열린 이단 재판에서 황제와 제국의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자신의 주장이 성경에 의하여 오류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성적 판단’과 ‘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들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성서’라는 명제 아래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자료나 요소들은 기독교 안에서 절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대는 벤뎅이 소갈딱지 같은 ‘고답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History of the Church, vol. 5』에 기록된 최종 변론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Luther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성서의 증언이나 뚜렷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제 양심은 말씀 안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지했던 것은 오직 성경이었다.  Luther는 성경의 권위를 대체하려는 Catholic Church의 교황권과 교권의 권위에 강경하게 맞서는 입장을 견지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은 Calvin의 저서 전체를 꿰뚫고 있었다.  또한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을 강조하고(갈 1:8-9), 기독교의 최종적 표준(딤후 3:16)과 규범적인 기준(계 22:18-19)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는 『기독교강요』 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과 예언서에 다음에는 사도들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거나 교회 내에서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인정된 교수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지시와 표준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권위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이다.

Augustine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처럼 Calvin은 성서의 권위를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무비판적인 문자주의(Literalism)에 빠지지 않았다.  더 나아가 Calvin 역시 치밀하게 교회사에 나타난 교부들의 문헌들과 신학적 판단에 필요한 자료와 요소, 그리고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성경을 보충하는 2차 자료(Secondary Sources)로 사용하였다.  그가 보여준 정교한 논리와 사고방식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Protestant 전통에서 제외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성경 외에 다른 권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자들에게 심한 냉대를 받았던 Anabaptist를 들 수 있다.  이들에 대해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Luther는 Anabaptist를 ‘광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Calvin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친개들’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였다.  그들을 혐오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Calvin은 자신의 기독교 처녀작 『Psychopannychia』에서 Anabaptist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날 일도 모른 채 비판 정신만 살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Calvin이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 참석해 Luther의 영향을 받은 Martin Bucer의 중매로 Anabaptist 출신이며, 아이 둘 있는 과부 Idelette de Bure와 결혼을 했다.  주례는 Geneva에 종교개혁 운동을 정착시킨 William Farel이다.  Calvin은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첫째 아기가 태어난 지 2주 만에 죽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그리고 3년 후 딸이 태어났지만 둘째 역시 죽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났지만 이 아이도 죽었다.  사랑하던 아내 역시 결혼생활 9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신학적 논쟁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삶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다(약 4:14).  왜 그렇게 하셨는지 하나님도 침묵하셨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몰라서 침묵하셨는가?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성경구절을 생각하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마 10:29).  François Baudouin은 Calvin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적이 많으면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에 혈안에 되어 있는 자, 기도 하기보다는 비판 정신만이 살아 있어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들 말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목사들이 꼭 있다.  나는 이런 자들이 목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요지가 무엇인가?  “귀는 길어야 하고 혀는 짧아야 한다”(전 5:2).        

Calvin의 저작들 곳곳에서 Jerome과 Augustine, 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을 인용하고, 자신의 신학과 사역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Calvin의 사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Augustine이다.  그의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인간의 자유 (Free Will) 관계를 논하면서 그랬다.  추후에 논의하겠지만 Calvin은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해설할 때, Augustine 외에도 Melanchthon과 Bernard의 글도 자주 인용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주장하고 강조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그는 예정론을 체계화시켰다.  Calvin은 개신교회의 규범(規範)과 신조(信條)들을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성서와 그의 책들은 후대 칼빈주의 추종자들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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