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과 Wesley는 신자의 은혜의 수단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Calvin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유효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고, Wesley는 하나님이 신자들과 함께 선행적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초대하고, 함께 하도록 하는 외부적 수단 혹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이 ‘수단이나 지원’(means or aids)을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 특별히 성도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시는 방법이나 통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에서 믿음과 구원으로 역사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에서 외적으로도 역사한다.
Calvin은 하나님이 교회, 설교 및 ‘성례전’(Sacrament)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는지 우선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Latin Fathers Cyprian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가 된다” 조금 더 참조하면 『기독교강요』 각주 2에 인용된 구절에서 Cyprian의 가르침이 전문으로 인용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섬길 수 없다”
성례전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는 ‘가시적 말씀’(visible word)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은혜의 수단들보다 중요하다. Calvin은 “Augustine은 성례전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각각의 형상들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가시적 말씀’으로 부른다”라고 말했다. Calvin은 계속하여 “또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생각할 수 있는 거울이라 부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성례전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이 영의 양식으로 은혜를 더해주므로, 성례전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한다.
Calvin은 일곱 개의 성례전에 대한 Roman Catholic의 전통을 거부하고 오직 두 가지, ‘세례’(baptism)와 ‘성만찬’(Lord’s Supper)만 성경적이라고 믿었다. 세례는 심지어 ‘유아 세례’(Infant Baptism)까지, 신앙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했듯이 세례가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유아들이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Calvin은 성만찬이 성도들이 신앙을 키워주고 확신을 강화하며 구원을 유지시킨다고 믿었다. 성만찬은 구원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수단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은혜의 수단으로 남아 있다.
Wesley 또한 은혜의 수단을 믿었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모든 단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 『The Means of Grace』에서 “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외형적인 표지나 말 또는 행동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을 파송하여, 그들이 선행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혹은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전하는 보편적인 통로가 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Wesley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그들을 통해 일하실 뿐 아니라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구원으로 부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은혜의 수단은 Calvin이 제안한 교회와 설교 및 성례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은혜롭게 사람과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은 사람들의 성화와 마찬가지로 칭의에서도 중요하다.
Wesley는 여러 가지 경우로 은혜의 수단을 배열하였다. 그는 ‘제도화된’(instituted) 것과 ‘재량권이 있는’(prudential) 은혜의 수단을 구분하였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에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은 ‘기도’(prayer), ‘성경 읽기’(searching the Scriptures), ‘성만찬’(Lord’s Supper), ‘금식’(fasting)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임’(Christian Conference)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모임을 통하여 Wesley는 소그룹 모임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들에 더하여, Wesley는 사람들이 정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말했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자들의 경험과 함께 교회의 역사에서 형성된 영적 구조에서 시도되고 증명된 방식들을 보여준다. Wesley는 그러한 실천들이 “보이는 것과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의 훈련’(exercise of the presence of God)”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Calvin처럼 Wesley도 신앙적 실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즉 은혜의 수단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그러한 은혜의 수단들에 대하여 길든 짧든 전하기 때문에, Wesley는 은혜의 수단들이 구원의 모든 단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확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미리 주시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회심과 인내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이 신비하게 함께 일한다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은혜의 수단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과 함께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과 은혜에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혜의 수단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수단을 배우고 실행할 수 있도록 그 수단들에 관하여 말한다. 사람들이 은혜의 수단을 실행하는 이유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당신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협력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Calvin과 Wesley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엡 2:8-9).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다(딛 3:5).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완성하는 분(욘 2:9)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롬 12:3).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역사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거나 도울 수 없다고 믿었다. 반대로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는 것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에 선행하는 은혜를 역사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만약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항할 수 없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아마 사람은 굉장히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사람들이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야 함을 항상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성경과 체험이 분명히 증거 해 준다.